23/12/17 대림절 셋째 주일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이사야 61:1-4, 8-11
응송 | 시편 126
2독서 | 데살로니가전서 5:16-24
3독서 | 요한복음 1:6-8, 19-28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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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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έν Χρισϖ_주님 안에서
1
대림절 세번째 주일입니다.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간절함은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지나치던 것을, 나는 보았고 들었고 알게 된 것이니 ‘선물’처럼 주어진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게 간절함이 있다는 것은, 아직은 사방을 우겨싸고 있는 절망조차도 무너트릴 수 없는 ‘소망’이 나를 지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지켜왔던 다시 오실 ‘주의 재림’에 대한 이 소망은, ‘이천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도 기다리느냐?’가 아니라, 이천년이나 지났지만 지금도 기다릴 만큼 주님이 얼마나 간절하고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 은혜가 교회에게만 허락되어 있다는 뜻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맺혀진 과일을 무심코 지나치지 않고 곧 거두어야 인생의 때가 온다는 것을 읽어내는 사람들처럼, 교회는 이미 이천년전 이 땅에 찾아오신 그분을 통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맛보았기에, 참 평화를 이루실 그분을 기다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가운데 날마다 충만해지는 깨달음의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 이미 대림 첫주 말씀에서 나누었던 것처럼 이 땅의 모든 교회가 기다리는 것은 '지금, 여기’에 계시는 주님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 요한복음 1:11~12
세상은 이천년전 첫번째 성탄의 그때처럼 여전히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는 어두워진 세상 가운데서도 불을 밝히는 사람들입니다. 성실하게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어진 사주간의 여정을 마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기다림의 끝에서 참된 평화 되시는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겁니다. 그 날이 오면, 주님은 하늘을 가르고 만민이 우러러 보는 가운데, 세상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 곁으로 오실 겁니다. 지금은 가라지와 알곡이, 불의와 정의가, 생명과 죽음이, 가식과 진실함이 뒤섞여 있지만 그 날에는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될 겁니다. 누구나 예외없이 그분앞에 서게 되고, 그분 앞에서는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을 감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분을 ‘심판주’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2
심판하시는 주님으로 오시는 그날을 꿈꾸는 이들에게 오실 주님을 향한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한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기다림을 가지고 있는가 일 겁니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기다림’을 안고 살아가는 삶의 내용은 하늘과 땅처럼 달라질 겁니다. 여러분이 보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독서 이사야 61장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아’가 오셔서 어떤 일을 이루시게 될 것인지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바라던 구원의 내용이며, ‘메시아’를 기다리던 간절함의 이유가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61장 전체가 그리고 있는 간절한 그들의 소망은 기쁨과 치유와 자유였습니다. 가난하고 마음이 상하고, 포로 되고 갇혀 있는 이들이 절실하게 하늘로부터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들입니다.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얻고자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가리고, 제 힘으로는 스스로를 지켜낼 수 없고, 단 하루도 스스로 바꾸어낼 수 없는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것들이라, 성경은 하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하늘의 은혜라는 것은 언제나 가난하고, 애통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박해에 내몰린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능력으로만 역사합니다. 마치 하루를 살아가가야 하는 이들에게는 신령한 은혜였던 ‘만나’도 제 그릇에만 쌓아두려고 하는 이들에게는 썩고 냄새나는 불편이 되고 마는 것처럼 말입니다. 현실의 힘과 권력에 짓눌려 열패감에 떨어지고 억울함이 뼛속까지 사무친 이런 사람들만이, 자신을 찾아오신 메시아를 발견하면 큰 소리로 노래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분이야 말로 시대의 노예로 떨어지도록 강요하던 세상을 향해 우리를 대신해 보복해주시고, 자유와 해방을 선포해 주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꿈꾸던 구원의 날, 세상을 거스르며 살아가던 교회 공동체가 갈망하던 종말의 날은, 하나님의 종인 메시아가 오셔서 슬퍼하던 그들을 위로해주시고, 원수를 갚아주시는 기쁨의 날을 선포해주시는 것 뿐이었습니다. 오늘, 성탄의 날을 준비하며 장식을 하고 행사에 바쁜 교회의 소망과 우리의 기다림은, 말씀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종’이 하실 일과 얼마나 관련되어 있습니까? 메시아를 통해 그저 어제 보다는 조금 더 나아지고, 오늘보다는 더 개선된 내일을 바라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늘로부터 오시는 구원자'는 까마득히 잊은 채, 연말에 들뜬 세상을 닮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기만 간절히 바래야 하는 것은 지나친 우려일까요?
하지만, 바울 사도는 서신서에서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조금 더 형편이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그렇게 살고 싶고,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우리는 '항상, 끊임없이,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고 있지 못합니다. 잠깐은 기도할 수 있고, 어떤 일에는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지만, 삶은 언제나 기쁘고 감사한 일보다는 모든 것을 감사할 수 없게 만드는 막다른 곳으로 우리를 몰아세울 뿐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지고 아무리 인정 받아도 결국은 노예나 포로라고 하는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죽음’이 내 운명의 목줄을 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어떻게 해서든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에만 마음을 모아보려고 하지만, 실패로 끝나버린 시간은 오히려 정죄감을 가중시킬 뿐입니다. 이건 개개인의 신앙이나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슬퍼할 수 밖에 없는 일로 가득차 있을 뿐만 아니라, 억울하고 아쉬운 것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의 가능성이 아닌,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세상에 갇혀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이겨내고, 극복하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행복해지려고 합니다.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을 하려고 하니, 힘겹고 지치고 결국에는 가식에 떨어지게 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한 가지 뿐입니다. 이런 삶, 이런 세계 전체가 완전히 뒤바뀌고 새로워지는 겁니다. 세상을 덮고 있는 ‘죽음’이 깨어지고, ‘생명’으로 충만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오실 ‘메시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3
지난 인류의 역사와 치열했던 삶에 대한 기억은 다시금 우리를 절망으로 끌어내리려 하는 지금도이라도, 메시아가 오시면 이런 일이 우리에게 가능해질 수 있을까요? 바울은 이런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지 마소하는 우리에게, 한줄기 소망의 빛줄기같은 말을 전해줍니다. ‘엔 크리스토’(έν Χρισϖ),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고 하는 대목입니다. 이런 구원은 그리스도 밖에서는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교회안에서 말씀을 들으면서도 현실에 눌려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과연 무엇이 그리스도 안에 머물지 못하게 하고, 또 무엇이 그리스도안에 거하도록 이끌어 주는 걸까요?
사람들은 으레 자신이 얼마나 암울한 현실에 놓여있는지를 애써 외면하려고 합니다. 다행스럽게 그런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어도, '내일은 나아지고, 이 다음에는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달콤한 말로 스스로를 속입니다. 하지만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나’에 대한 정직한 물음 앞에 서고, 겸손하게 답을 얻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앞서 신앙의 길을 걸어갔던 이들이 ‘메시아’를 향해 한결같고 간절한 기다림을 안고 살아갈 수 있던 것은,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감당해야하는 현실과 자아를 깊이 들여다보는 성실함 그리고 마주하게 된 자신의 한계와 무능함, 심지어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는 불의함 마져도 감추지 않고 정직하게 직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나 '교회' 공동체는 자신들이 언제라도 그런 상황에 떨어질 수 있고, 제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달리, 밥 세끼 먹고 하고 싶은 것 하며 지내니 살아있는 것 같지만, 늘 결핍되어 있고 허무로 내몰려 있으며, 언제고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죽음’안에 있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모든 일상의 삶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갈망하며 살지 않을 수 없던 겁니다. 비록 어제도 기다렸고, 오늘도 기다렸지만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한 그릇 먹던 것을 두 그릇 먹거나, 이런 것을 먹던 식탁이 저런 것을 먹는 것으로 바뀌는 차원이 아니라, 더 이상은 염려하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전혀 새로운 날이란, 하나님만이 가져다 주실 수 있는 것이라고 답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꽤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늘 하늘만 올려다보고 주님을 부를 생각만 합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은혜를 경험해도 받은 은혜가 대체 흔적도 없이 어디로 그렇게 사라져버리는 것인지 몰라, 허둥거릴 뿐입니다. 은혜가 쌓이고 믿음이 결실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비어있고 허무해지는 것인지를 모르니, 공연히 하늘을 원망하고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 떨어지기만 하는 겁니다. 말씀이 문제가 아니라, 말씀을 대하는 '나' 자신의 태도가 문제인데도 말입니다.
4
복음서 말씀은, 자신의 한계와 정체성을 정직하게 들여다 본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 주 오실 길을 예비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인, ‘세례자 요한’입니다. 복음서가 주목하고 있는 그의 모든 정체성은 오시기로 약속되었던 ‘메시아’와의 관계 안에만 달려있습니다. 사람들을 가르치고, 시대를 일깨우고, 세례를 베푸는 것도 본질은 아닙니다. 그는 그저 '메시아'를 위해서 준비된 사람일 뿐입니다. 대체 무엇이 남 달랐기에, 빛을 잃은 암울했던 시대에도 깨어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라는 부름을 받을 수 있던 걸까요?
‘그들이 다시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요한은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당신은 그 예언자요?" 하고 그들이 물으니, 요한은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 요한복음 1:21
그는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주의 오실 날을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날'이 임박했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더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은 하나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날'에 필요한 것은, 오직 '그날'에 찾아오실 '그분'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이 오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부와 명예, 권력을 얻으려고 부산한 사특한 종교지도자들과 달리, 메시지와 일치된 삶을 살던 그에게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급기야 비교에 떨어진 종교지도자들이 당신이 ‘엘리야’나 ‘예언자’냐고 질문을 쏟아냅니다. 사람들로부터 ‘엘리야’의 환생으로 불리울 만큼 요한이 사람들로부터 대단한 신망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니오’라고 답 밖에는 할 줄 모릅니다. 사람들이 조금만 우러러보고 칭찬해주면 마치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것처럼 우쭐거리고, 더 큰 명성이나 영향력을 얻으려고 하는 우리에게는 낯설고 어색할 만큼 지나친 겸손함입니다. 하지만 '너 자신을 알라'던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자기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고 무지한 존재인지를 들여다 본 요한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수식어를 가져다 덧붙인다고 해도 자신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습니다. ‘너 자신의 인생’이라고 말하는 세상의 신화에 길들여져 살다보니, 적어도 자신의 인생에서 만큼은 '신'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합니다. 끊임없이 '나' 자신을 중심에 놓으려는 본성에 취해버린 탓에, 결국 서슴없이 제 마음과 영혼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맙니다. 기쁨이나 행복함에 젖어들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스스로에게 만족합니다. 하지만 불안과 염려, 고난과 힘겨움에 내몰린 이후에도, 이런 상황에 떨어진 '나'에게만 매달립니다. 하지만 요한은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보는 용기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깨달음이 그를 그리스도 앞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만한 자격도 없소.’ | 요한복음 1:27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고스란히 들어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일을 이루고 대단한 능력을 가진다고 해도 죽음앞에 소멸될 뿐인 우리에게 아득한 능력입니다. 역사를 주관하고 심판하실 그런 주님 앞에서 보니, 아무리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어도 그 또한 심판의 대상일 수 밖에요.
5
요한이 암울한 어둠에 삼켜지지 않고 주 오실 길을 예비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던 것은, 하늘의 구원과 은총에 목말라 끊임없이 오실 주님만을 기다리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는 무능하고 무력한 자신의 한계를 가벼이 보지 않았던 덕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느냐?는 물음 이전에, 구원을 이루거나 구원해줄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철저하게 구원받아야만 하는 무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인간의 신에 대한 지식은 인간의 자기 자신에 관한 지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포이에르 바하’가 한 말입니다. 기독교 강요를 쓴 '장 칼뱅'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인간을 알 수 없고, 인간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주님을 알기 이전에, 우리는 먼저 자신을 들여다 보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 삼아 바라볼 때만, 비로서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 눈에 들어오는 자신의 모습은, 가난하고, 결핍되어 있고, 억눌리고 상해 있는 갇힌 자의 안타까움 뿐입니다. 하지만 그때야 비로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음과 영을 다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종은 그런 이들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시고, 기쁨과 자유를 가져다 주시기 위해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온 맘으로 하늘로부터 오실 '메시아',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늘의 은혜에 목마르고, 하나님의 구원이 절실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믿음은, ‘지금’ 목말라 하는 이들에게 ‘은혜’로 갈함을 채우시고, ‘지금’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고 희망을 가져다 주시며, ‘지금’ 재를 뒤집어쓰고 뉘우치는 사람을 일으켜 하늘의 빛나는 관을 씌워주실 주님을 향합니다. 그래서 그런 주님을 기다리고 있기에 교회가 ‘지금’ 그렇게, 그분을 본 받으며 살아가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정의로 통치하실 분을 기다리는 사람이 불의에 편승하며 살아갈 수 없고, 긍휼과 자비를 기다리는 사람이 어려운 형편에 떨어진 사람을 나몰라라 할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비록 현실은 하나님의 침묵이 계속되는 것 같아도, 늘 ‘예수 그리스도’안에 머무십시오. 그리고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기준 삼아 살아가십시오. ‘나’ 자신이 어디로 기울어진 사람인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그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구원의 능력이 샘솟을 겁니다. 그것이야 말로,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힘이 우리를 세례자 요한 처럼, 어둠 가운데서도 깨어 주 오실 길을 예비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자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줄 겁니다. 대림절 셋째 주일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