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거울 앞에

24/06/16 성령강림후 넷째주일

ViaNegaTiva 2024. 6. 14. 11:03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무엘상 15:34 ~ 16:13 ( 에스겔 17:22 ~ 24)

  응송 | 시편 20 ( 92:1 ~ 4, 12~ 15)

2독서 | 고린도후서 5:6 ~ 10,(11~13). 14~17

3독서 | 마가복음 4:26 ~ 34

 

# 설교음원

http://naver.me/x67ThkpS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Zg-F18Vs6bA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기름붓는사무엘(VictorBiennoury,1842)

 

바로, '이 사람'이다

 

1.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입니다. 그가 기름 부음을 받았던 때만 해도, 초대 왕의 재목감으로 부족함이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철저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기억 때문일까요? 실각한 ‘사울’을 대신할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에게 기름을 부어야 할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사무엘의 마음이 무겁기만 합니다. 대체 어떤 이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뽑아야고, 그런 인물을 찾아낼 수는 있을까요? 

 

바로 이 사람이다!’ | 사무엘상 15:12c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에게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성도라면 누구라도 한번쯤은 이런 음성을 듣는 꿈을 꿔봤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성서기자는 ‘사무엘’ 처럼 영성이나 신앙이 깊어지면, 쪽집게 처럼 답을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고 인생의 문제들의 해답을 가르쳐주는 분이라면, 애당초 ‘사무엘’은 이새의 집에서 번거롭게 장남인 ‘엘리압’이나 차남 ‘아비나답’, 삼남 ‘삼마’를 마주할 필요없이, 곧장 ‘다윗’을 찾았으면 그만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그런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엘리압’을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이 바로 이 사람이구나’라고(6절)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막연하게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두셨다’는 두루뭉실한 말씀 때문에, 오히려 ‘사무엘’은 계속해서 헛수고를 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셨던 사람을 도무지 알아채지 못하던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 사무엘상 15:7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라는 이 말씀은 반대로 읽으면, 그렇게 대단해 보이던 ‘사무엘’조차도 결국은 사람의 겉모습에 시선을 빼앗길 뿐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서기자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지만 우리는 늘상 미쳐 알아차리지 못한 채 지나치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늘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긴 탓 입니다. 실재로 한 사람의 됨됨이라던가,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 들여다 보는 수고에 익숙하질 않습니다. 아니, 관심이 없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겁니다. 그러기에는 기다림에 대한 우리의 인내심은 너무 빈약합니다.

 

2.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 ‘중심’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중심’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 ‘레바브’는 말 그대로 ‘속 마음’, 즉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들여다 본다는 말은, ‘감추어진 것’을 헤아리고, 이면에 흐르고 있는 일의 ‘실상’과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보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두어도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고 본질을 헤아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감추어져있기에 가만히 들여다 보아야 하고, 계속해서 반복하며 살펴야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면 먼저 ‘눈’으로만 보는 법을 버리고, 마음으로 보는 법에 눈을 떠야만 합니다. 섣불리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내면은 결코 볼 수 없게 됩니다. ‘중심’에 있는 ‘마음’이나 ‘생각’ 가치관 같은 문제들은 쉽게 드러나거나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오해하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나 ‘믿음’의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지만, 정작 지금 내 ‘믿음’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가늠이 되질 않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눈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자꾸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으로 확인받으려고 하다보니 불안해지고, 혹시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불신으로 떨어지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게 되는 겁니다. 

물론, ‘중심’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자기 내면에만 국한되는 문제만은 아닙니다. 자기 내면을 깊이 들여다 보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주변도 허투루 둘러보지 않게 됩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고 있는 울음 소리를 들어내고, 제 아무리 그럴 듯해 보여도 남을 속이려는 사특함으로 가득찬 속마음을 눈치 채기도 합니다. 지쳐있는 누군가의 한숨 때문에 걸음이 멈추어지고, 절망하는 이들의 손을 뿌리칠 수 없어 먼저 손을 내미는 것도 ‘중심’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 서신서에서 ‘바울’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자랑할 것이 있는 것처럼 겉으로 떠벌리는 외식함(고후 5:12)을 꿰뚫어 보는 것도 ‘중심’을 보는 이들의 몫입니다.

 

3.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신앙인들이 보아야 할 ‘중심’이란, 훨씬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는 모두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부하고 돈을 벌고 세상안에서 똑같이 한주간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들을 전부로 여기는 세상과 달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이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경제가 힘들어서, 안보가 위태로워서, 전쟁이 날 것 같아서 망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움과 공포를 조장하는 이야기들이 들린다고 해도, 그리스도인들은 섣불리 낙담하거나 불안해하거나 호들갑 떨지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실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의 전통이 하루 아침에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앞서 걸어갔던 신앙의 선배들은, 세상을 호령하던 제국의 권세나 영광을 풀이나 꽃처럼 속절없이 시들고 말 것이라며 의연하고 늠름하게 살아갔습니다. 로마에 의해 삶이 늘 벼랑끝에 내몰리고 생명이 위협받는 순간에도, 신앙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배신하지 않고 살아냈습니다. 그들은 모두 ‘중심’을 볼 수 있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역사’가 누구에 의해 씌여지고 있는지를 꿰뚫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교도들이 득세하고 악인들이 형통하며, 비록 믿음의 사람들이 고난 가운데 눈물 흘리는 현실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운명을 포함한 온 땅이 하나님의 통치안에 있음을 믿으며 살 수 있던 겁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인 마가복음 4장은 지금도 교회의 전통안에 면면히 살아 숨쉬고 있는 이런 믿음의 역동성, 세계와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그 ‘중심’으로 우리의 시선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4.

누가복음 4:18절에 보면 주님은 ‘그리스도’로서 당신의 소명의 시작을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는 말씀으로 여셨습니다. 여기에서 ‘성령이 임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씀이 피상적으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앎’이라는 것은 여전히 어렴풋이 아는 것, 주님에 관해 전해들은 말씀이 전부입니다. 대단한 체험을 했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아주 작은 경험일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치’란, 생명으로 충만한 ‘하나님 나라’를 온전하게 맛보고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고 한 몸이 되셨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님을 성자이신 하나님으로 고백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로마 제국이 지배하던 현실에 짓눌려 있을 때, 주님은 제국의 운명 너머 이면에서 꿈틀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살고 계셨습니다. 그런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사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상대화’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의 운명이나 원수인 로마에 대한 보복이나 멸망 예언 같은 이야기를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던 겁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에 알찬 낟알을 낸다. /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 | 마가복음 4:26 -29

뿌려진 씨앗이 언제 자라게 되었는지 알지도 못한 사이에 싹이 나고, 어느새 이삭을 내더니 낟알을 얻게 되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처럼,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도 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보고 계셨던 ‘하나님의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일까요? 주님의 말씀은 여러분께서 상상하시던 ‘천국’과는 얼마나 닮아 있습니까? 쉽게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잔뜩 ‘하나님 나라’의 외형이나 겉모습만 상상하는 우리 기대와 달리,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작동되는 ‘나라’인지를 가르쳐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5.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마치 천국이란 없는 것처럼,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처럼 살아갈 뿐입니다. 여전히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습니다. 다 망한 것처럼 보이고, 그런 일은 없을 것처럼 절망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씨앗’같은 나라입니다. ‘자라나고, 성장’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얼핏 보면 보이지 않고, 얼핏 보면 없는 것 같고, 얼핏 보면 죽은 것처럼 무력해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다리는 사람들은 다시금 돌아보고 또 돌아봅니다. 그렇게 돌아보면 어느새 싹이 나있고 또 혹시나 하고 돌아보면 어느새 열매가 맺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거기에 있는 ‘나라’, 기다림안에서 자라가는 ‘나라’입니다. 

금새 기다림에 지쳐 ‘대체, 언제까지입니까?'라고 늘상 되묻기만 하는 우리와 달리, 농부는 어떻게 씨를 뿌리고도 싹이 날때까지, 싹이 난 이후로도 이삭이 맺히고, 열매가 맺혀질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는 것에 익숙합니다. 늘 그 이면의 '중심'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와 농부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우리는 기다리지 못하는데 하나님은 기다리시고, / 우리는 돌아서지만 하나님은 실망하지 않고, / 우리는 믿지 못하는데 하나님은 믿으십니다. 우리가 빈 땅을 보고 있을 때 농부는 이미 심기워져있는 ‘씨앗’을 보았고, 우리가 씨앗을 보고 있을 때 그는 곧 피게 될 이삭을 보았고, 또한 우리가 여전히 이삭만 볼 때도 그의 눈은 이미 맺혀진 ‘열매’를 보고 있습니다. 들여다볼 수 있던 눈을 가진 농부는 기다렸고, 우리는 볼 수 없었기에 ‘기다림’에 실패할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 겉모양이 아닌 중심과 내면을 들여다 보는 이 ‘차이’를 성경은 바로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6.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것, 그것만을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된다는 것이나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그의 나라를 실감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가 되어야 합니다. 돈이 신이 되고, 욕망에 뒤틀린 세상이 온통 깨어질 것처럼 보여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면에서 역사를 주관해 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곳에 선물처럼 임하여 있다는 사실을 들여다 보는 통찰, 그 믿음이 우리안에 있기를 빕니다.

‘사무엘’은 비록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이며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도무지 그의 눈에는 민족의 운명을 이끌어갈 소망의 ‘빛’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만약 그 때 ‘바로 이 사람이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없었다면, 그는 또다시 ‘사울’의 실패가 반복되는 역사때문에 절망으로 떨어지고 말았을 겁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또한 ‘바로 이 사람이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온 땅을 구원해 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를 짊어지고 가신 그분,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 ‘복음’의 씨앗으로 이 땅에 심기우신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 고린도후서 5:17

 

바울이 말하고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꿰뚫어 보는 영적인 통찰을 가진 사람입니다. 옛 것처럼 다 지나가고 말 겉으로 보여지는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자라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함께 날마다 새롭게 자라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지금, 역사를 뚫고 꿈만 같던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의 삶 가운데 들어와 있음을 실감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이전과 같이 소망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보기전에는 모르고 믿기 전에는 몰라도, 이제 보게 되었고 믿게 된 사람이라면, 이전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당장이라도 소도 팔고, 집도 팔고 감추어진 보화를 캐내기 위해 ‘밭’을 사러 가야만 합니다. 

 

7.

물론 여전히 우리 자신은 부족함 투성이입니다. 아무것도 바꾸어내지 못하는 무력감이 밀려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고 자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보게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근거이고 희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제는 이 땅과는 다른 ‘하나님 나라’에 마음을 쏟고 영혼을 집중하며 날마다 새로운 매일을 살아가십시오. 이윤과 효율, 성공과 부유함을 강요하는 세상과 달리, 오늘도 또다시 하나님 나라의 방식 즉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된 ‘성도’의 삶입니다.

좋은 집이 있어야만 행복하다고 말하는 세상 때문에 서러움에 내몰린 집없는 이들과 함께 ‘그러나 우리는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 인정받기 위해서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가진 것이 많아야 한다는 강요에 짓눌린 이들에게 ‘당신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존재만으로도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 너는 않된다고 차별과 소외로 내몰린 이들에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 모두가 부자가 되야 한다는 욕망으로 치닿고 있는 세상을 가로질러 ‘너와 내가 함께 나누고 베풀면서도 우린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 왕의 식탁을 쟁취하는 한 사람이 되라고 욕망을 부추기는 세상에서 오히려 ‘왕’이신 ‘그리스도’와 모두가 다함께 먹고 마시는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을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세상을 향해 주님께서 ‘바로 이 사람이다’라고 외치고 계신 그 한 사람, 우리가 바로 ‘교회’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는 예수의 제자이전에, 교회 이전의 방식과는 다르게 살아가십시오. 겉모습에 휘둘리는 세상과는 다른 방식, 이면을 꿰뚫어 보는 ‘믿음’과 ‘통찰’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그곳에 주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 ‘믿음’을 통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오늘도 자라갈 것입니다. 이것만이 우리의 믿음이고 어둠의 권세를 거스르는 우리의 유일한 투쟁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 | 고린도후서 5: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