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거울 앞에

24/12/15 대림절 셋째주일

ViaNegaTiva 2024. 12. 12. 21:56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스바냐서 3:14-20

   응송 | 이사야서 12:2-6

2독서 | 빌립보서 4:4-7

3독서 | 누가복음 3:7-18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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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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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John the Baptist Preaching, Mattia Preti, 1665 (마티아 프레티의 작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1.

복음서를 이끌어가는 중심인물은 대림절 2주였던 지난주부터 마지막주까지 계속해서 세례 ‘요한’입니다. 그가 바로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주 오실길’을 예비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입으로만 말하는 외식한 신앙인들을 엄히 경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될 그날의 심판과 환란을 피하고 구원을 얻고자 자신을 향해 나오는 이들에게 대단히 단호한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받고, 반드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으로 스스로를 입증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이 요구에 응답한 이들을 위해 그는 두 가지 메시지를 덧붙입니다.

첫번째 스스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종교적 기득권을 버리라는 말일 겁니다. 기득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인간은 늘상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려 든다는 점에서 보면, 그의 요구는 대단히 무겁습니다.  하다못해 아는 사람 하나라도 있으면 득을 보려고 하는 것처럼 어찌해서라도 기득권을 얻으려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인데 이걸 포기한다는 것이 쉬울리가 없습니다.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긍심이야 말로 유대인으로서 살아가는 정체성 자체였는데 이것을 부인하라고 하니, 그의 요구는 유대인들에게 대단히 불편했을 겁니다.

두번째는 환란의 날이 임박했다는 경고입니다. 그가 타협하지 않고 거칠고 단호하게 사람들을 몰아세우며 회개를 요구할 수 있던 근거가 바로 이겁니다. 나무뿌리 앞에 이미 ‘도끼’가 놓여있으니, ‘언제라도’ 심판은 쏟아질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에 쏟아져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죽는다’는 앎과, 하루 하루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전혀 다른 문제인 것처럼, 이걸 의식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먹고 사는 일에 내몰린 오늘이 더 급하고 중하게 여겨질 겁니다. 그러니 얼마든지 실망하고 돌아가거나, 그런가 보다 하고 흘려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요한을 찾아왔던 사람들은 그의 말에 이렇게 반응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 누가복음 3:10b

 

사도행전에도 이런 유사한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 사도행전 2:37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셨던 오순절,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난 이후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대체 어떤 능력있는 설교를 했던 걸까 싶지만 사실 그가 외쳤던 말은 설교라기 보다는 ‘고발’에 가깝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했으니까요.

 

2.

요즘의 교회는 안팎으로 비난과 조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말하는 신앙과 달리 ‘행함’도 ‘돌이킴’도 보이지 않는 가식적인 모습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베드로’나 ‘요한’의 외침에 응답했던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우리가 행함이 없고, 돌이킴이 없고, 실천이 없는 ‘말’에 그쳐왔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회개’라고 하면 쉽게 무언가를 고치거나 해내야겠다는 다짐이나 결단 정도로 만족하지만, ‘회개’라는 것은 오히려 ‘무엇’을 ‘어찌해야’할른지 모르는 ‘낭패감’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말입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그러나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위급하고 위태롭습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총’에 기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출발할 때만 결코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는 우상숭배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철저한 ‘자기무능’을 경험하는 이들에게 드러나는 빛입니다. 그래서 이 두가지, 자신의 한계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사건앞에 서지 않는 한, 결국 인간은 또다시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해 폭력이나 기만, 불법과 불의함도 서슴치 않으며 스스로를 높이려 들 것이 뻔합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은 어떠한지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유일한 희망입니까? 아니면 수 없이 많은 선택지 중에 하나일 뿐입니까?

이제 자신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로 나아오는 이들을 향해, ‘요한’이 제시한 실천방안은 세가지였습니다.

11절 자신의 소유를 나눠줄 것, 13절 정해진 것보다 더 받으려하지 말 것, 14절 남의 것을 빼앗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이 요구를 받은 대상이 제 각각입니다. 11절은 ‘가진 자’들에게, 13절은 ‘세리’들에게, 14절은 ‘군인’들에게 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가지 방안이 아니라, 사실은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제시한 맞춤식 방안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요한의 요구사항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당시에 종교인들을 포함한 모든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얼마나 타인의 가난과 고통에 무관심했는지, 세리와 같은 이들이 양심을 속인채 동족의 고혈을 수탈했는지, 무슨 벼슬이라도 한 것처럼 권력에 줄을 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군인들이 백성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일이 얼마나 흔했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그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은 더 은밀하고 공공연히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허기사 군인들이, 또는 군인들을 통해 국민의 생명을 강탈하려던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우리 시대니까요. 우리는 여전히 요한의 메시지를 그저 교훈처럼 듣고 흘릴 뿐, 여전히 제 배를 채우는 일에만 기민하고 타인의 고통에는 인색합니다. 남을 속여서 이윤을 많이 볼 수록 성공한 사람처럼 인정받습니다. 다른 이들을 짓밟고서 제 몫을 이루는 일에 익숙하도록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식의 메시지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없고, 그래서인지 이런 말씀은 거의 설교되지도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안타깝게도 ‘요한’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아직 ‘구원’을 얻기 위한 ‘회개’조차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빛’을 잃고 ‘맛’을 잃어버렸음에도 아무일 없는 것처럼 살다보니, 우리 주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터무니 없는 일들이,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3.

‘요한’의 메시지가 절절하게 들리려면, 지금 붙들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이제 곧 무너질 것이라는 그의 메시지의 긴급성과 절박성이 실감나는 경우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것을 실감난 사람이라면 ‘회개’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다면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삶 자체는 결코 변화되지 못할 것이 뻔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본문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오 그는 자기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오.’ | 누가복음 3:16-17

 

The Voice in the Desert, James Tissot (French, 1836-1902), 1886-1894

‘요한’이 말했던 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사는 것만으로도 우린 충분히 칭찬받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만큼 지금의 신앙이 ‘요한’의 ‘회개’의 세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요한’의 뒤에 오실 ‘그리스도’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 또는 그가 제시했던 응답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극면하게 드러내는 단어가 바로 ‘물세례’와 ‘성령’과 ‘불’ 세례의 차이입니다. ‘회개’의 세례인 ‘물세례’를 통해,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간다면 충분한 것 아닐까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요한’이 외쳤던 것처럼 사람들이 삶의 방향을 바꾸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살만한 세상이 될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실천으로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모두들 문제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해매다 이상 기온과 환경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한마음으로 대응하지는 않습니다. 인류 전체의 종말을 초래할지도 모를 대량살상무기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대국들의 무기 생산과 판매는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공의와 정의의 가치를 실감하지만 돈이 되고 이득이 된다면, 그리고 나의 일이 된다면 얼마든지 눈감는 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요한’의 요구대로 비록 나누어주고, 탐욕에 휘둘려 착복하지 않고, 강탈하거나 빼앗지 않는 세상이 된다고 해도,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절대적 정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요원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역사가 지금껏 그래왔기 때문입니다.

 

4.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지향은 ‘요한’에 머물지 않고 ‘예수’를 지향합니다. 그분이 가지고 오시는 ‘성령’과 ‘불’세례라는 사건을 향하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요한’의 세례가 가지는 한계를 뛰어넘는 길이 오직 그분께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제시했던 세례의 실체는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식의 자기 주체성이 근거입니다. 그러나 ‘성령’세례의 주체는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성령’을 모든 죽어가는 것들안에 ‘숨’을 불어넣어주시는 ‘생명’의 영으로 소개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소개하고 있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숨’을 내쉬던 대목도, 우리는 마치 죽은 자처럼 절망에 떨어져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살아있는 자들로 회복시킨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언제나,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통치와 구속과 이끄심에 순응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과 동의어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이런 본질적인 ‘변화’를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이 말한 예수께서 가지고 오실 ‘세례’는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불’ 세례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그는 자기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오.’ | 누가복음 3:18

 

‘요한’의 말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시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가 말하는 것은 ‘종말’에 이르러 드러나게 될 ‘예수’의 실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본 모습입니다. 농부가 ‘쭉정이’를 ‘알곡’과 함께 받아주지 않는 것처럼, ‘쭉정이’는 결코 ‘알곡’과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우리가 ‘오해’하면 않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입니다. 우리를 지옥에 보내거나 형벌을 받게 한다고 해서 사실 그분께 도움이 될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만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또한 영원한 구원자시라는 사실 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이신 주님께서 온전히 한몸되셨던 것처럼 우리도 또한 삼위가 일체되시는 당신과 한몸되는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중에 과연 ‘쭉정이’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겉으로는 아닌 것 같아도, 썩어없어질 것들을 찾아 매달리고 그런 것들에 매달리던 못난 마음이나, 주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결실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던 탐욕 덩어리들이 여전하지 않던가요? 그날에 이르러 이런 모습 그대로 주님을 뵙고,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여전히 문제는 결코 우리 자신이 스스로는 의로워질 수가 없다는 겁니다. 

 

5.

그러고 보면, 이 말씀은 ‘쭉정이 같은 인간들은 다 지옥에 가게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날’에는!, ‘쭉정이’를 모두 태워 깨끗하고 정결함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해주시는 분이 ‘주님’뿐이시라는 것이 분명하다 싶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이 모든 것은 ‘주님의 날’이 이르면 이루어지게 될 겁니다. 다만 우리는 이미 ‘세례’와 ‘성령’을 통해 생명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쭉정이가 모두 태워진 사람들이라는 약속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날’의 일은 오직 주님께 맡기고, 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준비해야만 합니다. ‘요한’이 전했던 ‘물세례’가 바로 그것을 말해줍니다. 

‘요한’의 물세례의 한계에 대해 실컷 이야기하더니, 결국은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이냐? 반문하고 싶으실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물세례’와 ‘성령과 불’세례는 ‘선행’을 이루어 ‘천국’에 간다거나 ‘영생’을 얻겠다고 하는 것과 ‘하나님’께 용납을 받고 ‘생명’을 얻은 사람이기에 ‘선행’을 행하는 말처럼, 하늘과 땅의 차이 만큼이나 큽니다.

 

저는 ‘종말’에 대한 두려움에 내몰린 우리 자신의 헤아림을 뛰어넘어, 우리의 구원을 약속해주시는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바울’사도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그의 말처럼 주님은 그렇게 우리를 구원해주실 겁니다. 그 약속이 있기에, 오늘도 우리는 기울어져있는 곳에서 비교와 차별과 소외에 내몰려 울고 있는 이들에게 아낌없이 자신의 품을 내어줄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더 많이 가지라고 탐욕을 부추기는 세상을 거스르며 제게 주어진 분수에 자족하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타인의 손해나 아픔에 기꺼이 눈감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빼앗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정직하게 땀흘리고 수고하며 울며 씨를 뿌리던 이들의 것을 빼앗으려드는 그런 불의한 이들을 가로막아주는 듬직한 버팀목이 되어주어야만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 ‘스바냐’는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불의하고 불법한 시대 가운데 ‘남겨진 이들’이며, 언제나 ‘하나님’은 기꺼이 이런 이들의 구원의 주님이 되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  | 스바냐 3:17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아직 그날은 오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말했던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사는 것이 힘겨운 세상입니다. 여전히 불법과 불의함이 가득하고, 탐욕이 사람들의 마음을 온통 휘어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욕망’에 스러진 이들이 광기에 내몰려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합니다. ‘의’의 길은 때로는 ‘외로운’ 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불신하며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결국은 ‘쭉정이’처럼 불에 태워지고 사라질 삶을 살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모든 쭉정이를 태우고, 순전한 알곡으로 우리를 받아주실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을 믿으시겠습니다. 대림절 세번째 주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