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거울 앞에

25/03/23 사순절 세번째 주일

ViaNegaTiva 2025. 3. 19. 17:43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이사야 55:1-9

  응송 | 시편 63:1-8

2독서 | 고린도전서 10:1-13

3독서 | 누가복음 13:1-9

 

# 설교음원

https://naver.me/5pwgTpud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wszU6b2ZhcM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지다

구원하는 복음, 이기적인 신앙

 

1.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사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거라. 어찌하여 너희는 양식을 얻지도 못하면서 돈을 지불하며, 배부르게 하여 주지도 못하는데, 그것 때문에 수고하느냐? "들어라,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으며, 기름진 것으로 너희 마음이 즐거울 것이다.’ | 이사야 55:1 - 2

 

지금으로부터 대략 2700년 전 ‘유다’ 신앙회복을 부르짖었던 선지자 ‘이사야’의 외침입니다. ‘돈’이야 말로 무엇이든 살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전능자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젊은이들은 이유도 모른 채 끝을 모르는 비교와 경쟁의 시스템에서 내몰려 절망하고, 복지 사각지대에 가리워진 이들은 생존의 투쟁을 하듯 매일을 버텨내야 하며, 스스로를 지켜낼 수 없는 이들은 가뭇없이 제 목숨을 포기해야하는 서러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각자의 생존을 위한 발걸음을 재촉할 뿐 누구 하나 손내밀어 주지 않는 그런 잔인한 세상에서 현실성 없는 선지자의 말은 한가롭게 들릴 정도입니다.

우리는 굶주리고 배고픈 이들에게는 빵을, 아픈 이들에게는 치료를, 직업을 잃은 이에게는 든든한 직장이, 절망하는 이들에게는 희망이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모두가 다 함께 최소한의 인간 다움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복지국가나 선진국을 만들어 보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또 그렇게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라’는 이런 구호는 여전히 공허하기만 합니다. 저는 사실 이런 현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대체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얼마이고, 교회가 얼마인데, 그렇게 선교를 말하고 봉사를 말하고 있는데도 선지자의 외침이 낯설기만 한 걸까요?

 

2.

많은 경우에 이런 식의 말씀은 현실과는 무관한 신앙의 이야기로만 받아들입니다. 천국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는 이야기라는 식입니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런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을 만큼 이기적인 것이 우리 자신임을 도무지 받아들이려고 하질 않습니다. 물론 ‘돈 없이 값없이 먹고 마시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죽하면 ‘공짜라면 양잿물이라도 마신다’는 말이 있을까요. 다만, 이런 일이 ‘나’에게 주어질 때와 ‘너’에게 주어질 때, 우리의 기준과 판단은 형편없이 일관성을 잃고 만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신이 혜택을 받을 때는 ‘복지’라며 환호하지만, 타인의 ‘복지’를 위해 자신이 부담해야 할 몫의 세금에 불편해 합니다. 풍성하신 하나님과 달리, 우리는 그저 서로를 위해 부담과 짐을 나누어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 마땅하지만, 언제나 자기 자신 밖에 모를 만큼 우리는 이기적입니다. 그런 우리를 재촉하시는 걸까요? 아니면 애당초 우리로서는 불가능하니 직접 그런 나라를 가져와야겠다 싶으셨던 걸까요? 주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값없이’, ‘무조건’ 베푸는 잔치와도 같은 나라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허투루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 | 요한계시록 21:6b

 

선지자 이사야가 외치던 예언의 나라는, 요한 사도가 환상 가운데 본 나라와 동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실 나라의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무관심하고, 심지어는 이처럼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마져도 가로막으려 들기도 합니다. 무슨 터무니 없는 말인가 싶을 겁니다. 이어지는 이 말씀은 어떻습니까?

 

너희는, 만날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너희는, 가까이 계실 때에 주님을 불러라. 악한 자는 그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 이사야 55:6-7

 

아마도 이 말씀은 오늘 교회 밖의 사람들을 향해 ‘회심’을 강요하거나, 게을러진 신앙을 질책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한 말씀만 더 읽어볼까요? 

 

악한 자는 그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 이사야 55:7

 

이 말씀은 어떤가요? 주님께 돌이켜야 할 ‘악한 자’, ‘불의한 자’라고 하신 이들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3.

본문은 분명히 ‘악한 자’는, ‘불의한 자’는 돌이키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다름 아닌 ‘유다 백성’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껏해야 마치 악한 길, 불의한 길이 따로 있는 것처럼, 어떻게 하면 ‘악한 길’, ‘불의한 길’에서 돌이킬 수 있을까?를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그런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하고 걸어온 걸음이 쌓여서 악한 길이 되고, 의로운 길도 될 뿐입니다.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이 악한 이나 불의한 이가 아닌 것처럼 스스로를 감추고 덮으려고만 들지만 이 말씀을 뒤집어 읽게 되면, 주님께로 향할 수 있는 사람,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악한 사람, 불의한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느냐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기도했던 세리처럼, 기도하고, 십일조를 바치고, 선행을 베풀고, 신앙생활을 했다는 식으로 자신을 덧씌우려 들지 않고 그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구하고, 조용히 그분으로부터 주어질 은총에 기울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본문을 읽을 때마다 여러분이 더 이상 악하고 불의한 사람이라고 하면 도둑질하거나, 남을 속이고, 해를 끼치는 이들을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중에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하거나 의롭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자신의 명분, 정당성, 의로움을 통해서는 은혜, 즉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주어지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악인’이나 ‘불의한 이’들을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하는 사람들’ 또는 그렇게 ‘돌이키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어떤 상황에 되면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이키려고 하게 될까요?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는 ‘악’한 길이나 ‘불의’한 생각이라는 것이 늘 혐오스럽고 어리석고 꺼리는 것들만은 아닙니다. 따지고보면 오히려 ‘복’처럼 보이고, ‘성공’의 길처럼 달콤하고 커 보일 때가 더 많습니다. 주님께 돌이킨다는 것은 그런 것을 포기한다는 말일텐데, 대체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내게는 유익하지만 불의한 길을 포기할 용기, 생명의 가치를 위해서 아무 쓸모도 없는 일을 기꺼이 선택할 수 있는 용기, 돈만 되면 양심도 팔아넘기는 세상을 거스를 수 있는 용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기로 결단했기에 기꺼이 포기함으로 응답할 수 있는 용기말입니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스스로 악한 길과 불의한 생각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은 악함과 불의함이 들춰지고, 심판이 임하거나, 그런 달콤함 보다 훨씬 기쁘고 행복한 것을 발견할 때 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 돌이키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은, 다름아닌 자신의 허물을 직면하고 깨닫고 돌아설 용기를 낸 사람들,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야말로 마르지 않는 기쁨임을 발견한 사람들인 겁니다.

 

4. 

서신서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출애굽 공동체의 ‘세례’ 사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 고린도전서 10:2

 

아시다시피 이들 공동체는 급하게 애굽을 탈출한 길이었습니다. 언제 애굽의 군대가 자신들의 뒤를 쫓을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 수백만의 군중들이 홍해를 지나면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말입니다. ‘바울’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요? ‘출애굽’사건은 전적인 하나님의 ‘구원’ 사건입니다. 제국인 애굽에 부역하던 이들이나, 노예들, 그 안에서 권력자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던 이들이나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아이나 어른이나 여자나 남자나, 그들 모두를 살려내신 것은 하나님입니다. 그날, 하나님의 구원에는 차별함이 없었습니다. 애굽의 압제로부터 건져내시는 그분을 믿고 의지한 이라면 누구라도 주님은 받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우리’를 구하셨다는 출애굽 공동체의 고백이야 말로, ‘세례’의 정신이 아닐까요?

그렇게 읽으면 복음서 말씀이 자연스레 읽혀집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일이 터졌습니다. 이런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도 없는 일이 생길 때마다 사람들은 그 원인과 근거를 확인하려는 유혹에 떨어지곤 합니다. 무슨 까닭이 있으리라는 생각 말입니다. 불안하고 막연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조급함 때문입니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 누가복음 13:2b

 

예수님의 답변을 보면 이들이 주님을 찾아와 무엇을 말했는지 충분히 예상이 가능해집니다. 두번이나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는 주님의 말씀이 뒤따라 오는데다가, 마지막 6절 이후의 비유에 나오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라'는 말씀 때문에, 다시금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포도원지기가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 | 누가복음 13:8 - 9a

 

그러나 본문의 핵심은 도덕적, 윤리적으로 바른 사람이 되거나 신앙인이 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무거운 죄책을 어떻게 씻어 낼 것인지가 아니라,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일지라도 여전히 오래참음과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에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운명안에 있습니다. 자주 말씀드리는 것처럼, 부자는 부자로 죽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자로 죽고, 잘난 사람은 잘난 사람으로 죽고 못난 사람은 못난 사람으로 죽을 뿐입니다. 그저 ‘언제’인가의 차이외에 ‘죽음’ 아래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 동일합니다. 하나님 없는 우리는 똑같이 불행하고 동일하게 불행합니다. 

 

5.

그래서 저는 망대사고로 죽은 사람들의 소식을 가지고 ‘죄’문제로 끌고 가려는 이들이 ‘악마’처럼 보입니다. 겉으로는 위로하는 것 같고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통해 ‘나는 너보다는 더 낫다’는 것을 확인받고, ‘나는 아닌 척’ 드러내고 싶은 오만함만 드러날 뿐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어떤 특정한 악하고 사특한 이들만의 마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사특하고 왜곡된 신앙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 본적이 없는 탓에, 하나님을 심각하게 왜곡하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상숭배’라고 하면 ‘금송아지’만 떠올립니다. 하지만, 먼저 왜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는지를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시대와 지역을 무론하고 금송아지를 만들던 손은 늘 있었습니다. 까닭은 분명합니다. 내일에 대한 ‘불안’에 떨어져, ‘오늘’의 삶을 원망하던 이들의 손이 만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돌’을 떡으로 만들어야만 한다는 ‘조급함’에 내몰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의로움의 도구로 삼으라는 마귀의 유혹에 휘둘리지 마십시오.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타자를 향해서는 더더욱 믿음을 업적삼거나 타인과 비교하고 정죄하는 흉기로 삼지 마십시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다음날도 ‘값없이, 먹고 마시라’는 하나님의 은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이들을 자신의 나라로 용납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기쁨의 양식 삼아 살아가십시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례 받고, 삶을 경축해도 좋을 만큼 충분한 기쁨의 이유를 안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사순절 세번째 주일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