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4 대림절 2주
2016년 12월 4일 대림절 두번째 주일
본문 - 로마서 15:4 ~ 13 https://youtu.be/DbwZtbjAO_U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함께 나누실 수 있습니다
'위로와 소망의 하나님'
- 로마 교회에 써 보낸 편지
로마서는 ‘프로스 로마이우스’ 즉 로마인들에게 라는 말로 시작되어지는 바울의 편지입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3차 선교여행중 고린도 지방에서 써 보낸 편지라고 알려져있습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로마교회는 바울이 직접 선교하거나 전도하면서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자신이 직접 전도하지도 않았지만 로마의 심장부에 세워진 교회를 바라보면 바울은 어떤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있었을까요 ?
바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놀라웠을까요 ? 대견했을까요 ? 그것도 아니면 애써 싹 틔어진 교회에 대한 걱정이 앞섰을까요 ?
로마서안에는 예수를 주로 믿는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의 도리, 복음의 내용, 즉 기독교신앙의 정체를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적혀있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황제를 신으로 섬기고 있는 로마안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주로 믿겠다고 결심한 성도들에게 그들이 믿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지를 잘 이해시키려고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셈입니다
살아있는 인간이 신이되어 있는 로마에서 그들이 보아왔던 신의 모습은 세속적 성공과 명예, 부와 동의어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믿고 따르는 예수는 그런 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자칫 예수를 로마 권력의 변방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야하는 자신들처럼 소외된 자들을 권력의 핵심까지 세워줄 세속적 성공의 방편으로 받아들일 여지가 큽니다
- 로마 교회의 형편은 어떠한데 편지를 써서 보내야했을까 ? 또 어떤 내용을 보냈을까 ?
기록에 의하면 실제로 바울이 총 15장의 로마서중에서 13장을 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제국은 그리스도교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제국 정부는 교인들에게 신앙을 부정하지 않으면 고문을 가하거나 죽이겠다고 위협했다고 합니다 그때 로마 교회 교인들의 선택은 손 쉬운 변절 대신에 죽음으로 지킨 신앙, 순교를 택했습니다 교인들의 선택 자체만을 두고 본다면 바울의 13장 편지글에 정확히 반하는 저항입니다 13장은 정부와 권세에 복종하는 시민이 되라는 내용입니다 로마교회 교인들은 이 본문을 어떻게 받아들였던 것일까요 ?
그 해석에 따라서, 바울이 편지를 써 보낸 상황과 목적이 드러나게 되겠지요
신앙을 버리라고 하는 제국 정부는 권세입니다 말씀 그대로라면 신앙을 버려야만 합니다 그런데 로마교인들은 신앙을 지킴으로 제국 정부의 권세에 저항한 것입니다
- 절망의 자리 그 다른 이름 ‘신앙인의 인내’
시퍼렇게 살아있는 로마의 신, 제국의 신이 지배하고 있는 땅은 변할 것 같지 않습니다 여전히 황제의 권위는 하늘처럼 높기만 하며, 제국은 세상을 뻗어나가기만 합니다 해가지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이런 삶의 자리에서 그 탐욕의 자리를 버리고 자신을 죽여 생명을 살려내려던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를 믿는 삶은 비천하기 그지 없습니다
마치 오늘의 세상살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욕심을 부리고, 남의 것을 빼앗고, 남을 속이고, 남의 아픔에 눈감고 제 잇속만 챙기고, 죄 짓고, 뻔뻔하게 사는 사람이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 말입니다
교과서에서는 배웠지만 여전히 삶은 그런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고, 그 틀이 바뀌거나 나아질 것처럼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됩니다 순간 순간 어떻게 하면 좋을까 ? 흔들림이 찾아옵니다
이제 동녘교회는 창립 3년이 되어갑니다 개척 목회를 하면서 뜨거운 마음으로 달려왔습니다
한국교회의 현실과 아픔을 체감하며 살아냈습니다 … 왜곡되고 그릇된 목회의 모습, 교회의 탈선, 성장지상주의 모습에 결연했던 마음의 선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바르게, 성경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구하며 나아가는 걸음의 내일이 보이지 않을 때입니다 두려울 때입니다 그런가하면 여전히 건물이 있고, 재정이 튼튼하고, 업적과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가 양적 성장하는 모습이 겹쳐질때 여전히 내가 걷고 있는 길을 분명히 볼 수 있는 용기를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는 신념을 지켜나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내 가족과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의 힘든 삶을 바라보면서도 있어야할 자리를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무엇을 하여도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절망이 곁에 있는 동안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독립운동가들, 전쟁속에서 국가를 지키다 장렬히 전사했던 군인들,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당장 지금 경험되고 있는 그들의 삶은, 그들의 후손들의 삶은 여전히 힘들기만 합니다 대체 이렇게 사는 것이 맞기는 한 것일까요 ?
죄 짓고, 친일하고, 탐욕에 취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잘 살고 있는 듯 보이는 세상속에서 이런 질문은 당연히 따라올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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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로마교회의 교인들의 하루 하루는, 그들에게 있어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들의 기도, 그들의 예배는 바로 이러한 치열한 갈등이 반복되어지는 그러면서도 여전히 내일은 뿌옇기만 한 삶의 한복판에서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믿음은, 그들의 신념은, 그들의 신앙의 삶은 늘 치열한 갈등과 고뇌속에서 빚어진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난 이후의 삶은 늘 이렇습니다
이전까지의 삶과 예수를 만나고 바라보게 되는 삶은 거리가 그렇게 멉니다 신앙의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에야 그 간극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일단 예수를 만난 이후에는 치열한 갈등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인지 질문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만나면, 일단 예수안에서 생명을 만나게 되면 지금까지의 삶에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예수는 우리 삶에 그런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답을 요구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붙잡게 되었던 로마교회 그들의 삶의 자리의 이름은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의 심장부 로마에는 ‘살아있는 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살아있는 그 신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그를 살리신 하나님을 참 신으로 믿겠다는 결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경험해야하고 극복해야하는 박해와 고통은 실감나는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매일 놀림이나 비난, 박해는 점점 심해져갔을 것입니다
일을 마치고 주어지는 개인시간에 예배를 드려야하는 이들에게 상전들은 폭력을 일삼고 자유시간을 빼앗아갑니다 고난의 매일입니다 살아있는 신이라 불리우는 황제를, 세상의 방식을 택하지 않은 대가입니다
하지만 ‘인내’는 그저 허벅지 꼬집으면서 참는 정도가 아닙니다 인내는 주님을 선택하는 것이 옳음을 적극적으로 믿는 믿음의 행위로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있기에 오늘의 힘들고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따르기에 닥쳐오는 현실을 억지로 참아내는 것이 아닌,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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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티비 생활방송에서 진주 양식장이 소개되었습니다 멀쩡한 조개속에 이물질을 이식해두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진주조개의 몸부림이 우리들에게 영롱한 진주로 나타납니다 조개가 아파하면 할 수록, 그리고 그 아픔을 견뎌낼 수록 진주의 가치는 커져만 갑니다
멀쩡하고 아무일 없는 조개는 평범한 조개로 버려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 치열한 삶의 몸부림의 자리가 있어 진주조개의 가치는 달라지게 되는 것처럼, 로마교회 교인들의 신앙적 갈등의 삶은 그들의 믿음, 그들의 신앙을 더욱 굳게 만들어냈습니다
- 인내와 위로의 끝은 소망에 있다
성경이 말하는 인내는 단순히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는 것처럼 참아내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소망이 있으니 오늘을 인내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인내하다보니 소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소망이 있기에 인내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오늘만 있다면, 우리에게 다가올 내일은 좌절입니다 내일이 없는 인내는 참담한 자기부정일 뿐입니다
소망은 오늘의 자리에서 내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니 내일을 오늘로 살아낼 수 있는 힘이 바로 소망입니다
내일은 어디에 있을까요 ? 내일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오늘'뿐입니다 내일의 영역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내일이 있음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망'이 되는 것처럼, 내일에 계시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 내일을 오늘로 이루어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내일은, 세상에게 내일은 불확실과 불명확함의 연속이지만, 하나님께 내일은 오늘보다 더 분명하고 선명한 가능성의 날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 히브리어 ‘에예 아세르 에예’ 의 본래의 뜻은 ‘나는 되게 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즉 내일을 오늘로 이루는 신이 바로 하나님 야웨인 것입니다
출애굽한 노예들에게 위로는 ‘내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노예들에게 소망은 ‘내일’이 자신들의 편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일이 반드시 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는 내일이 오고 있습니까 ?
오늘 여러분의 신앙에도 내일이 오고 있습니까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고 말하였던 시인의 노래속에는 지금은 비록 빼앗긴 들이라는 현실이지만, 내일이라는 봄이 오고 있음에 대한 믿음이, 그 믿음이 가져다 주는 위로와 소망이 진하게 베어있습니다
결연한 의지는 바로 내일이 분명해질 때 생기는 법입니다
내일이 희미하면 결단과 확신에 찬 삶은 생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신앙의 삶,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걸음이 흔들리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합니다 내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일이 없다는 것은 소망이 끊겼다는 것입니다 소망의 주님을 믿고 있지 않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 로마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위로 '성경-말씀'
본문 4절의 시작은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교인들이 보고 있는 기록된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이 인내하며 소망을 바라보고 살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대체 성경이 무엇이기에 '위로'가 되는 것일까요 ?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안에 거하였던 이들과 만나셨던 하나님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자, 과부, 고아, 낮은 자들을 높이 세우시는 하나님, 노예로, 포로로 끌려간 삶의 자리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계심이, 그분이 우리의 내일을 이끌어 오고 계시는 '소망'이며 위로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위로를 받아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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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2번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다시금 꿈을 꿉니다 내일을 오늘로 이끌어 오시며, 오늘을 내일로 바꾸어가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지고 완성될 것을 바라보는 꿈입니다
세상 무엇으로도 그 빛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 무엇으로도 그 찬란한 아침을 가로막을 수가 없습니다
어둠은 아무리 짙어도 새벽의 미명을 덮을 수 없고, 어둠은 아무리 짙어도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우리에게는 위로가, 우리에게는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