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2. 18 대림절 4번째 주일
2016/ 12/ 18 대림절 4번째 주일
본문 - 마태복음 1:18 ~ 25
https://youtu.be/KyHp8ouuyt8 = 클릭하시면 설교 영상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나를 무너트리는 소망"
1
해변가에 앉아 모래성을 만드는 어린아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파도가 밀려오면 금새 사라지고 말 허무이지만 아이는 되풀이 되는 파도와의 실갱이를 놀이로 여기며 모래성을 쌓아갑니다
한 사람의 삶의 모습도 따지고 보면 이런 모래성 쌓기와 같아 보입니다 끊임없이 계획을 세우고, 무너지고, 다시 세우고, 무너지고 또 다시 세우는 지루함의 연속입니다
그 사이의 반복이 계속되고 있어도, 막상 성이 무너질 때면 우리는 새로운 상심에 휩쌓이고 맙니다 언제 경험해도 무너진 자리는 여간 아프기만 합니다
2016년 한해도 우리는 수 많은 계획을 세우고, 꿈을 꾸어왔습니다 행여 기분좋게 성취한 것들도 있겠지만, 이룰 수 없었거나 이루지 못했던 것들이 있다는 것은 여전히 유쾌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단순한 불쾌감 정도가 아닌 가슴이 시리고 잠들 수 없을 만큼 아픈 시간으로 경험되기도 했습니다
2
실패와 좌절의 반복되는 복판에서 또 다시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문제는 대체 어떤 결정을 내려야하는가 ? 물음의 답을 찾는 것입니다 하지만 순간 순간 어느 것이 내가 선택해야하는 정답인지에 대하여 속시원하게 주어지는 대안은 없습니다
3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결정해야하는 답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내가 선택하느냐 않느냐는 갈림길에서 만나게 되는 두려움입니다
눈 앞에 선명하게 길이 보여도 우리는 ‘혹시’ 라고 하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손쉽게 사로잡힙니다
4
신교대에서 받게 되는 헬기 레펠 훈련은 사람이 가장 두려움을 느끼기 쉬운 11미터에서 시행됩니다 사실 안전 장비가 다 갖추어져있고 교관들이 로프를 제어하기 때문에 그냥 뛰어내려도 사고가 날 위험은 적습니다 하지만 막상 점프 장소에 오르면 다리가 굳어집니다 교관들의 불호령이 나고, 얼차려를 받아도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앞에 뛴 전우가 무사히 착지하는 것을 보아도 마찬가지 입니다 한번 찾아온 두려움은 결정을 방해합니다
5
이처럼 우리들의 삶에 찾아온 결정의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우리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만납니다 성공이나, 실패 모두 사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내일’의 일들임에도 유독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실패’에 예민하고, 실퍠를 그렇게 우리의 걸음을 붙잡을 만큼 강력합니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 성공에 대한 확실성 뿐입니다
6
오늘 성서일과 제1독서 구약본문으로 주어진 이사야 7:10 ~ 16절은 당시 유다의 아하스 왕의 통치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다에게는 가시처럼 두려움의 대상인 나라가 둘이 있었습니다 수리아와 에브라임입니다 유다의 변방의 실질적인 위협인 이들을 막아낼 힘이 없던 아하스 왕은 당시 신흥 강국으로 떠 오른 ‘앗수르’와 외교적 관계를 맺어 이둘과 맞서기로 작정합니다 외교적으로는 실리가 있는 판단입니다
오늘날도 국가의 유익을 위해서는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외교력은 국가의 힘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런데 앗수르와 화친하고 연합하기로 작정한 순간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 징조를 구하여보고 앗수르와의 화친을 결정하라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그에게 전해집니다
7
선지자의 예언은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선뜻 결정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징조를 구해 확인하는 것이 나쁠리 없습니다 그런데 아하스왕은 7장 12절에서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니 구하지 않겠다고 외칩니다 신명기 6:16 에 말씀을 근거로 하는 말이니 신앙이 대단해 보입니다 신앙의 지조와 결기가 느껴집니다
하지만 사실 아하스의 반응은 믿음의 표현이 아닙니다 선지자를 통해 주어진 본문에서 계속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은 우상문화의 산실인 앗수르와는 함께 하지 마라는 것임을 볼 때 아하스의 반응은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계획의 갈등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는 속내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아하스는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지를 않았던 셈입니다 징조를 구한다면 주어질 하나님의 답변은 뻔하게 예상이 됩니다 하지만 아하스의 입장에서는 현시국에서 유다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앗수르를 선택하는 것은 최선의 선택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면 에브라임을 대적할 수 없어 필경 유다가 큰 피햬를 입을 것처럼 보입니다 두려움입니다
8
이로부터 약 7백년이나 지난 이후 오늘 함께 읽은 제3독서 복음서 본문인 마태복음 1장에서 비슷한 장면에 처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의 아버지인 요셉입니다
결혼을 약속한 약혼한 여인 마리아가 아이를 임신했다고 합니다 복음서 기자는 성령으로 인한 잉태를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요셉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일 뿐입니다
9
유대법에 따르면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잉태한 여인은 돌에 맞아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왠만한 남자였다면 마리아가 아무리 항변을 한다해도 믿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파혼함으로 마리아는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셉에게 사람 하나 살리는 셈치고 눈 딱 감고 마리아를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강요할 수도 없습니다 당장은 몰라도 그 불신이 이후의 결혼을 파국으로 몰아 놓고 그의 삶을 뒤죽박죽으로 망가트릴 지도 모를 일입니다
10
그때 20절 주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 성령으로 잉태함을 고지하고 마리아를 받아들이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이 말도 되지 않는 상황,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갈등하게 된 상황에서 요셉은 그 명령을 순종합니다 더욱이 아이를 낳은 이후에도 천사의 예언대로 예수라고 이름을 짓고 불리우도록 했습니다
11
예수라는 이름은 헬라식 이름이며, 히브리식으로는 여호수아, 혹은 예수아라고 읽혀집니다 그 뜻은 ‘하나님은 구원하신다’ 라는 뜻입니다 즉 요셉이 들은 명령은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그에 순종한 셈입니다 자신과 마리아의 혼인관계도, 자신의 삶도, 태어날 아이의 생명도 모두 하나님께 기댄 순종입니다
12
아하스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기 위해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붙들고 순종하였습니다
아하스는 두려움에 휩쌓였기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했고,
그의 판단은 훗날 자신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을 때 앗수르의 침공을 당하게 되는 더큰 환란을 초래하고 맙니다
반면, 요셉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그에게서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해낼 그리스도께서 나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3
오늘 성서일과 제2독서인 서신서 ‘로마서 1:17 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결의 영으로 인하여 택정함을 입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결의 영’ 퓨뉴마 하기오쉬네스에서 ‘성결’이라는 말은 윤리적으로 온전하다거나 도덕적으로 깨끗함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결’이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힌 것이 없는 소통되어지는 영적인 능력을 말합니다 그러니 예수는 늘 하늘 아버지와 소통하시는 분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앞에 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주님의 고백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자의 외침입니다
하나님과 막힘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충돌하거나 갈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제고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14
성결의 영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 막혀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성령이 아닌 사람의 영, 어두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성결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걷는 길의 방향은 늘 생명을 살려내는 곳을 향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명이신 하나님과 소통하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합니다
반면에 폭력과 차별과, 거짓과 기만, 탐욕, 분열, 죽음을 향하는 이들은 어둠에 이끌리는 이들입니다
어둠에 이끌리면 ‘죄’와 ‘죽음’에 지배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성결의 영을 따라, 내 뜻을 무너트리는 곳에는 ‘생명’이 살아나는 ‘구원’의 소망이 샘솟게 됩니다
하나님 뜻에 순종하고 자신의 뜻을 무너트린 요셉을 통해 예수께서 태어나신 것처럼,
십자가 죽음앞에서 자신의 뜻을 무너트린 예수를 통해 온 인류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구원을 얻게 된 것처럼,
오늘 우리들이 스스로 무너지고, 하나님과 소통함으로 나아가는 곳에 소망이 있습니다
15
주중에 모 방송에서 세월호 실종자 수색에 나선 민간 잠수사의 증언에 피눈물이 났습니다
두꺼운 쇠문을 살기 위해 맨손을 부수었다는 증언에 말입니다 생명의 마지막 불꽃이 꺼지는 순간까지 공포와 두려움, 절망속에서 살려달라고 몸부림쳤을 그 아이들, 그쇠문을 부수기 위해 여리디 여린 손은 얼마나 뭉게졌을까 …
하나님의 뜻에 소통하는 것은 죽어가는 생명의 곁에, 그 생명을 살리는 사람들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권력과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거짓을 일삼는 이들을 지지하고 편드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을 위로해주시는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16
오늘도 우리는 내 뜻을 무너트리는 한걸음 뒤에 비로서 진정한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소망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아직도 우리 시대에는 발견되어야할 소망의 빛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