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거울 앞에

2016/ 12/ 25 (52주) 성탄절

ViaNegaTiva 2016. 12. 25. 19:37

2016/12/25/ 성탄절


본문 - 요한복음 1:1 ~ 14                

https://youtu.be/v4pee3TFLQc  -> 클릭하시면 예배 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영광의 왕, 그가 오셨다'





1

성탄의 아침! 평화의 왕으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은총이 이 땅의 모든 살아있음안에 임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의 얼굴을 함께 마주보며 예배할 수 있게 된 것이 꿈만 같습니다 2016년 마지막 주에 맞이하는 이 아침이 이처럼 달콤한 것은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 주어졌던 시간이 돌아보니 그처럼 아득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빽빽한 공기의 긴장감이 어느 한순간 터져나가는 것처럼, 꽉 채워진 어둠을 뚫고 한줄기 빛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이천년전 유대땅 베들레헴에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 사내아이의 탄생입니다 바로 갈릴리의 예수입니다


지금도 이 땅에서는 높은 권력자들의 부모나, 혹은 그들 자신의 생일을 탄신일이라 이름짓고 신격화하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놓고 보면 이천년전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도 지레 반감이 올라올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탄생은 꽤 드라마틱해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참 아득한 태어남이고, 슬픈 생일일 뿐입니다


빼앗긴 조국 이스라엘, 야웨 하나님의 구원에 생을 걸고 있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 병들고, 지친 그 오랜 시간이 짓누르는 이스라엘의 분위기는 암울한 짙은 회색빛입니다

그 이스라엘안에서도 변방의 한 동네에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태어났습니다 가난에 찌들은 작은 마을, 그곳에는 소망이라는 말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게다가 그는 출생 자체도 드러내어 축하받지 못할 태생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이미 그를 회임했으니 말입니다 수근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사람 좋은 아버지 요셉이 아니었더라면 사생아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운좋게 태어났더라도 그의 태어남은 생을 저주로 여기는 그 어떤 인생으로 자리매김했을지도 모릅니다


2

막상 예수의 탄생 그 날은 환영받지 못하는 날이었으며, 사람 태어남을 축하해줄 만큼의 여유조차 없는 사람들 틈에서 그는 태어났습니다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아이처럼, 저주스러운 삶에 허덕이는 부부에게서 태어난 아이처럼, 축복 받아 마땅한 순간이 덧없어 보이는 그 때 예수는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살아감의 자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예수는 그닥 눈에 띄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그가 볼품없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마음이, 그들의 삶이 사람을 눈여겨볼 여유도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전쟁 같은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에 옆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사람이 볼품없는 사람 연약한 사람,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작은 아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권력을 좇고 돈을 좇고 어떻게 해서든 살아내보려는 그 악착같은 삶의 터위에서 생명을 눈여겨 바라보는 시선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의 태어남은 그런 자리였습니다


3

작은 마을 나사렛,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이에게나, 갈릴리 촌동네에 살고 있는 천한 신분의 젊은이에게 세상은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출신 좋은 사람, 그럴듯한 사람, 힘이 있거나 재력이 있는 사람, 하다못해 매력있는 사람 곁에 몰려들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 반대편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사 53:1-12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어쩌면 오늘 우리들 보다 못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답답하고, 대체 이런 삶이라면 굳이 왜 태어났을까 싶은 인생말입니다


게다가 이후의 예수의 삶은 더 없이 허무하기까지 합니다 서른 셋, 그 짧은 나이에 로마에 대한 반역의 형벌을 짊어지고 같은 동족의 손에 떠밀려 죽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그의 탄생이나 인생 전체는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는 언저리의 볼품없는 인생입니다


4

그러나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그 예수를, 그 예수의 태어남을 전혀 다른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요한의 눈에 이 땅에 태어난 예수 그는 ‘생명의 빛’이셨습니다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작은 아이가 말입니다


요한이 보기에 이천년전 오늘 맞이한 그의 태어남은, 전쟁의 한 복판에 피어있는 들꽃처럼… 그의 탄생은 밤 사이 소리 없이 내려 세상을 온통 하얗게 뒤 덮는 눈처럼, 어둠의 세상을 깨트리고, 세상의 소음을 한 걸음에 떼어내버린 하나님의 큰 걸음이었습니다

고요한 호수에 돌 하나 떨어져 일으키는 이랑처럼 예수를 둘러싼 파문, 갈릴리로부터 시작해 온 유대와 팔레스타인과 로마, 그리고 세상 곳곳마다 퍼져가는 그 파급력은 바로 오늘, 그의 탄생으로부터 비롯하였습니다 


5

요한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의 탄생을 철학적 수사를 동원해서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그는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난 사건을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하시매라는 말의 * 헬라어 원어 뜻은 ‘우리 가운데 천막을 설치하셨다’라고 합니다

그러니 요한의 눈에 예수의 태어남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일상, 우리의 매일, 우리의 일그러진 삶의 자리에 함께 하시고 계심을 보는 거울인 셈입니다

깊은 겨울밤을 지나 창문을 열고 보니 만나게 되는 눈 덮인 하얀 세상을 보듯 요한의 눈에 예수의 탄생은 그렇게 보였습니다


요한에게 있어 예수의 탄생은,


가난한 이들의 한 숨속에,    연약한 이들의 아픔속에,    내일에 대한 소망 없는 이들,

불법앞에 신음하는 이들의 자리에 찾아와 천막을 치고 함께 동거동락하는 하나님의 이야기의 시작이었습니다


6

성탄의 그 아침이 소망이 되었던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

예수의 태어남이, 예수의 생명이 단순한 한 아이의 태어남이 아니라, 

이처럼 어둡고, 이처럼 처절하고, 이처럼 답답하고, 불의와 불법에 짓눌린 세상에서도 생명을 잉태시키시며 함께 살아내시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


과연 오늘을 누리며 호가호위하는 사람들이나, 권력과 결탁하여 수천억의 재산을 모으며 살고 있는 이들, 혹은 진실을 뒤 덮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울 수 있다고 큰 소리치는 이들의 눈에 말구유에 태어난 아기 예수와 함께 찾아오신 하나님이 보이기나 할까요? 하나님은 그 소중한 생명에 거하고 계심이 보이기나 할까요 ?

누가복음 2:14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예수의 탄생을 하나님께 영광된 사건이라고,


오늘 본문 14에서 요한은 예수가 바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광이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신 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눈 앞에 홍해와 뒷편의 바로의 군대의 사이라고 하는 절체절명의 죽음 앞에서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미리암의 찬가가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수 없고, 해낼 수 없는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으신 구원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임하는 것이 바로 ‘영광’입니다 그러니 성탄의 아침, 예수의 탄생을 바라보며 ‘영광’을 노래하는 이들이 서 있는 곳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않되는 비천한 삶의 자리입니다


그러니 만원짜리 한장의 가치가 호텔식 만찬을 즐기는 부자와 한끼의 식사에 생명을 걸어야하는 이에게 다른 것처럼, 오늘 이 아침에도 예수의 탄생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은 서로에게 다르게 경험될 수 밖에는 없습니다


7

예수는 자유 없는 이들에게 자유를, 불평등에 눌린 이들에게 평등을, 부정의와 불법속에 신음하는 이들에게 정의의 길이 되셨습니다

그 예수는 눈먼 이들을 보게 하려고, 저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려고, 포로된 자들을 자유케 하시려고 이 땅에 찾아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은 오늘 이 아침을,

이 땅에 태어난 예수의 그 태어남의 날을,

우리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 성탄의 아침은, 누구나, 동일한 기쁨으로 경험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 힘으로 살아내는 어떤 사람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은 볼품없는, 아니 눈에도 차지 않는 사람일 뿐입니다 오직 이 성탄의 기쁨은, 소망이 필요한 이들에게만 기쁨의 날입니다


동녘교회 개척후 3년을 보내며 친구 삼은 '방문자' 친구가 있습니다 어제 성탄 예배와 당회 준비를 하느라 정신 없는 시간 점심 즈음 교회문을 열고 이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여름 내내 보지 못하던 친구가 불쑥 찾아온 것입니다

날이 추워질 때마다 은근히 걱정거리가 되었던 차에 건강한 모습으로 찾아준 얼굴이 반갑기만 했습니다

당회 준비하느라 점심도 못먹고 일하던 차라 끼니는 채워주지도 못하고 생각 없이 불쑥 주머니로 손이 갔습니다 점심이나 먹으라고 쥐어주려고 했던 겁니다 


"목사님 점심 먹으러 가요 낙지 덮밥 먹으러 가요"

"나 시간 없다 혼자 가서 먹고 와라"

그런데 뜬금없이 말 한마디가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목사님 오늘은 내가 사드릴께요"...

그 동안 전단지 나눠줘서 돈이 있답니다 

목사인 나는 돈 쥐어 보내려고 했는데, 이 친구는 나를 사람으로 바라보며 서 있던 것입니다


몸에서 나는 냄새 게의치 않고, 떼 묻은 행색 자연스레 친구삼아 식당가서 사준 밥이 그리도 고마웠는가 봅니다 


누군가에게 돈 만원은 푼돈 이상도 아니겠지만, 또 누군가에게 돈 만원은 한끼를 살아낼 수 있는 생명그릇이 되기도 합니다


8

요한은 4절에 세상의 어둠이 빛으로 오신 예수를 깨닫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깨닫다라고 하는 헬라어 ‘카텔라벤’은 ‘깨달아 이해하다’의 뜻과 ‘이기다’의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즉 무력하고 작은 생명, 볼품없고 연약한 아기 예수에게서 죽음보다 강한 생명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어둠을 밝히는 하나님의 빛을, 우리와 함께 하시기 이해 찾아오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이며, 그것이 바로 세상을 이기는 이김인 것입니다

아니, 애당초 그들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오늘 말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의 맑은 눈망울속에서, 새끈한 호흡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있음이 죽음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현실의 삶의 모습이 어떠한지에 관계 없이, 예수를 믿는 것, 영접하는 것,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인류의 소망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 생명을 어둠이 이길 수도 덮을 수도 없으며, 반대로 그 생명이 어둠을 무너트리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바로 세상을 이기는 것과 같습니다 


9

지금 예수의 태어남이 소망인 사람들이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 어둠 보다 더 짙은 절망속에 있는 이들에게, 예수의 탄생은 소망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천년전 오늘 그 어둠속에, 그 짙은 외면과 편견과 질시속에서 태어났던 예수는,

오늘도 동일한 어둠의 자리에, 슬픔의 자리에서 태어나고 계십니다

예수는 오늘 저 서울역광장 한켠에, 쪽방촌 냉골에, 바람 피할 곳 없는 한 곳에서 태어나 저주 받은 삶과 싸우고 있는 이들속에서, 삶의 터전을 잃고 좇겨난 사람들, 해고된 노동자들과, 부속품처럼 사용되고 마는 비정규직 사원들, 우리들의 죗값으로 학살되어버린 세월호 304명의 죽음의 자리에서, 곳곳마다 상실하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절망하고 살아가야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의 가슴속에서, 정의와 자유를 갈망하며 광화문 광장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오늘 이 아침 짙은 어둠 같은 각자의 삶에서 일어나, 예수의 탄생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으로 바라보며 예배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서 태어나시는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