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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1/ 26 왕국절성서의 거울 앞에 2017. 11. 26. 13:57
본문 - 에스겔 34:11 ~ 24
https://youtu.be/eQ0JOClh2zg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
1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오늘은 어떻습니까 ? 늘상 걱정이 끊이질 않습니다 온갖 위험과 불안, 초조, 걱정이 우리들의 삶의 언어가 되어있습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책임과 사명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지도자와 리더쉽들이 드뭅니다 그저 자신의 부와 명예를 위한 수단과 도구로 여기며 으스대고 거들먹거리는 모습들이 더욱 익숙한 세상입니다
서민을 위하고, 국민을 위한다고는 말하지만 자신들의 이익에 조금이라도 부합하지 않으면, 아무리 울부짖는 억울함 가운데 있어도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양심을 거스르는 일도 서슴지 않는 속물같은 모습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보통의 사람들은 늘 좌절과 슬픔을 맛보며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비단 정치나 세속적 공동체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지요 종교안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섬김’을 금과옥조처럼 흔하게 말은 하지만 실상은 모두들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명예의 제단위에 서기를 즐겨하는 것만 같습니다
진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직하지도 못합니다 더욱이 자신이 감당하고 돌보고 섬겨야 할 이들을 향한 최소한의 도덕적 책무감도 없는 듯 싶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도를 자신의 성공의 지표로 여기고, 교회를 자기의 소유물로 여기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것을 보면 이런 생각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아 더 서글퍼옵니다
2
그렇다고 일반 개개인의 면면도 다를 바는 없습니다 거대한 권력과 힘을 향한 불평과 불만의 자리에서는 선하고 억울한 피해자로 보이지만, 또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마주치는 환경은 이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집단과 사회 앞에서 개인은 피해자, 혹은 선한 존재처럼 자신을 드러내지만 개개인의 삶에서의 모습은 투쟁적이고 기만적입니다
집단에 대해, 공동체에 대해, 혹은 국가와 같은 거대한 권력 앞에서는 불평등하고 공평하지 않다고, 정의와 평등을 요구하는 우리이지만, 정작 나보다 힘이 없고, 연약한 이들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또 그렇게 폭력적이고 거칠고 사나운 존재들이지 않습니까
이런 모습은 ‘내로남불’이라는 신조어로 우리의 모습을 꼬집어 볼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 ‘내가하면 로멘스이지만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입니다 규모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대로, 힘이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어디서고 우리는 그렇게 서로 이기적인 폭력성에 길들여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3
에스겔은 유다의 제사장 출신입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의 삶의 자리를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중재자입니다 그는 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왔습니다 성전에서 제의를 통해, 제사를 통해 하나님앞에서 발견되어 왔던 이였습니다
그러던 그는 BC 598년 2차 포도이송 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유다의 포로들이 집단 거주하였던 그발 강가에서 그가 목격했던 유다의 실존은 충격과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수 많은 동족이 학살 당하고 이민족의 땅에 포로로 끌려온 자신들의 처지는 그들이 믿고 섬기던 하나님 야웨의 무능함, 혹은 그의 실존을 의심케 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적어도 그들의 자리에서 하나니은 계시지 않습니다
제사장이었던 그로서는 두 가지 신학적 갈등과 싸워야 했습니다
애당초 하나님은 계시지 않거나 무능하신 것인가 ? 하지만 그의 삶 자체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은 전제로 할 때만 의미가 있기에 제사장이었던 그로서는 이 부분은 문제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끌어안고 씨름해야만 하는 남은 문제는 왜 우리에게 이런 오늘이 존재하는가 ? 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유다는 여전히 하나님 야웨의 언약안에 있는 백성이었고, 그들은 여전히 제사를 드렸으며, 그들의 땅에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다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이 무력해서 이방신에 의해 파괴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그의 성전의 파괴를 허용하신 것입니다
4
이제 포로된 백성들을 향한 유배지의 선지자가 된 그의 눈에 이스라엘의 죄가 보이길 시작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전현 오해하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전과 더불어 살고는 있었지만, 하나님과 그들의 사이는 너무나 멀었습니다
그들은 늘 상 그러하듯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키는 것들을 통해 할 바를 다 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에스겔은 유다의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않고 자신들 만을 배부르게 하는 이들이었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목자들은 누구였을까요 ? 하나님을 대신해서 백성들을 돌보고 지켜야 하는 왕을 비롯해, 제사장과 수 많은 지도자들입니다 신앙공동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백성위에 군림하는 이들일 수 없습니다 사람위에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양을 먹이고 입히시고 살리시는 하나님의 역할을 수행해야만하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어진 직무를 기화로 어느새인가 백성들위에 군림하기 시작합니다
섬기는 자가 아닌 지배자가 되려고 하고, 도와주는 손이 아닌 착취하는 손이 됩니다 양을 먹이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양을 잡아 자신의 배를 채우려고 합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이 이미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그 날이 아닌, 이미 오래전 이방인들의 손이 아닌,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손에 의해 하나님은 좇겨났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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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되면 예의 우리의 버릇이 드러납니다 그러면 그렇지, 나쁜 사람들이라며 손가락질을 시작 합니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권력자들이나 나보다 높아보이는 이들을 향한 우리의 불만과 분노가 하나님의 엄한 판결에 힘을 얻는 것 같지 않습니까 ?
그런데 본문 17절 느닷없는 당혹스러운 부르심이 들립니다 ‘나의 양 떼 너희여 … ‘ 백성의 지도자들의 잘 못을 함께 손가락질 하며 탓하고 있던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뒤를 읽어보지 않아도 무언가 좋지 않은 말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양과 양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를 심판하시겠다고 합니다 가진자들의 폭력성과 탐욕을 비난하던 우리이지만, 하나님의 우뢰와 같은 음성은 우리들 모두를 동일한 피고로 몰아세우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하나님의 추궁은 검사의 심문처럼 날카롭습니다 좋은 꼴을 먹는 것,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지 않고 남의 꼴과 물을 밟로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은 ‘만족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고, 망가트리는 악한 행동입니다
끝이 아닙니다 21절로 이어진 말씀은 우리가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를 밖으로 흩어지게 하였다고 진술합니다 병든 자는 연약한 이들입니다 그들의 서있는 자리를 빼앗아 무리 가운데에서 좇아 내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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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내가, 우리가 언제 이렇게 행하였단 말입니까 ?
아무리 생각해도 사회가, 국가가, 돈 많고 힘있는 이들이 그렇게 살아온 것은 맞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런적이 없다고 생각되니 억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장이 맞고 무죄라면 하나님의 고발은 무고에 해당하고 부당합니다
마태복음 25장 31 ~ 45절이 기억나십니까 ? 양과 염소를 가르시겠다던 주님의 기준이 제시된 말씀입니다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고보니, 하나님의 고발이 비수처럼 날카롭기 그지 없어 더 이상 항변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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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패망하기에 이른 유다의 목자들이나 백성들 모두의 잘 못은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목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왕이라고 하고, 늘상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사장들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이 누구를 위해 손을 내미시는 분이시며, 누구에게 마음을 쏟는 분이시고, 어떤 예배를 받기를 원하시는 분이신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유다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배를 채우는 일과 길을 찾아 열심을 내며 달려갔던 이들입니다
유다를 고발하던 하나님이 마침내 외치십니다 ‘11절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15절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유리하는 양들을 향한 하나님의 손은 포기되어질 수 없습니다 목자들의 탐욕과 무책임한 방관으로 흩어져버린 양떼를 당신의 손으로 다시금 찾아내시고 돌아가게 하신다는 결연한 의지가 선포됩니다
이제 에스겔의 눈에 바벨론 포로로 떨어진 유다의 오늘은 더 이상 절망과 저주의 자리로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이 포로의 땅에서야 비로서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그리고 이제 ! 목자들에 의해 배신당하고, 힘있는 이들 때문에 무리에서 내몰리는 그들에게 강하고 선하고 좋으신 하나님이 직접 목자가 되시겠다고 힘있게 다가오셨으니 말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세상은 변화될 수 없습니다 본질적 탐욕과 죄의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일하시면, 하나님이 목자가 되시는 삶은 반드시 변화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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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또 다른 메시지가 16절의 후반절에 담겨있습니다 ‘… 잃어버린자, 쫓기는 자, 상한 자, 병든 자들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
오늘 우리 사회, 우리의 교회는 이 후반절을 두려운 마음으로 반드시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의 양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양을 해하는 심판의 대상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살찌우기 위해 내 배를 채우기만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를, 약한 자위에 강한 자로 세워지기를 위해 몸부림 치는 우리와 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양을 해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은 결코 간과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 구원의 하나님이 심판의 주이시며, 심판의 주가 또한 구원이심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오해하면 않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공동체적인 결단이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결단이야말로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고 잘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자리에서 주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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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왕국절입니다 세상에 많은 왕국이 있습니다 물질과 자본의 왕국, 권력과 욕망의 왕국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왕국에서 우리는 결코 본질적 기쁨과 구원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삶을 통해 우리를 둘러싼 이 왕국들이 얼마나 거짓된 땅인지 경험해 왔습니다 다른 소망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 !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고 진리로 우리를 이끄시는 그의 나라만이 불의와 불법함이 없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입니다
그가 평화의 왕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그리고 여러분의 각자의 삶의 터 위에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만민에게 찾아오신 성령께서 세상의 성공을 좇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고 그의 말씀과 율례와 명령을 양식으로 살아가는 백성이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영혼과 연약한 삶의 자리를 지키시고 도우실 것입니다
이제 내가 목자가 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그의 왕국을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오늘 말씀속에서 만나시기를,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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