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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4 주현후 2주성서의 거울 앞에 2018. 1. 14. 13:57
본문 - 로마서 10:1 ~ 15
https://youtu.be/kyusSJTy1ew = '클릭' 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내 '말'이, 내 '믿음'입니다
1
사람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십시오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거나, 그 사람앞에 섰을 때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의 사람됨은 무엇으로 경험하는 것일까요 ? 가장 결정적인 것은 대부분의 경우 그가 사용하는 ‘말’이 기준이 될 것입니다
말을 허투루 하는 이들을 신뢰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 사람의 겉모습이 아무리 번지르르 하더라도 그의 입에서 뱉어지는 말이 천박할 때 그 말은 사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입을 떠난 말이 사람들앞에서 ‘나’라는 사람 됨됨이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은 참 어렵습니다 말은 듣는 것도 어렵지만, 하는 것도 어렵기만 합니다
타인의 말을 그 속뜻을 잘 헤아리지 못해 오해하고 갈등하는 경우가 비일 비재합니다 또한 내 본의와는 관계 없이 내가 한 말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거나 관계를 파괴할 때도 있으니 말입니다 말은 그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권한이 크고, 영향력이 클 수록 유의사항이 복잡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말은 실상은 그 사용법이 어려우니 우리는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2
보통 남자들은 하루에 만 오천 단어의 말을 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여성은 두배 정도되는 삼만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렇게 많은 말들이 우리 입에서 내 뱉어지지만 말 그대로 내 뱉어지는 말이 있는가 하면 귀한 가치를 담아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하루 동안 쏟아낸 말들 중에 기억에 남는 말은 무엇입니까 ?
내가 어떤 말을 하였는지도 모른 채 쏟아내는 말이 쉴새 없이 뱉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말함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창조의 도구라는 것을 기억해보아야 합니다 창조, 즉 무엇인가를 ‘없음’에서 ‘있음’으로, ‘무의미’에서 ‘의미’로 만들어내는 힘 말입니다 우리의 말이 그런 것입니다
물론 말에는 소리로 들리는 말도 있고, 들리지 않는 말도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수 없이 많은 대화가 오고감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시장이나 번잡한 도로를 지날 때 사람들이 주고 받는 수 없이 많은 말의 소리들이 있지만 그것은 모두 소리일 뿐, 아무런 의미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반면에 힘들고 지쳐있는, 혹은 상처받고 눈물 흘리는 친구의 곁에 아무런 말 없이 다가가 꼬옥 안아주는 이들 속에는 소리는 들리우지 않지만 따듯한 위로와 사랑의 말이 흐르고 있음은 분명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말’은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잘’해야하는 것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3
구약의 시작인 창세기는 천지의 시작과 창조를 없음의 자리, 혼돈의 자리에서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비롯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약성경도 요한은 복음의 시작을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진술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결국 성경이 주목하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의 방식 즉, 하나님의 계심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시며, 또한 하나님은 ‘말씀’으로 역사하시고, ‘말씀’하심으로 우리 가운데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인쇄되어 있는 이 성경이라고 하는 텍스트로 한정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대체 ‘말씀’이란 무엇일까요 ?
다석 유영모 선생은 일찍이 ‘말씀’을 ‘말’과 ‘숨’으로 이해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이 우리에게 찾아와 ‘숨’ 즉 ‘생명’이 되었다는 셈입니다 언뜻 이해될 것 같지만 역시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우리의 생명, 즉 만물이 죽음의 지배 가운데에서도 죽지 않도록 하는 이 생명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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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말’에 대하여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말씀으로 존재하시는 생명되신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말씀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창 2:19 ~ 20을 보면 하나님은 최초의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에덴의 피조물들의 이름을 지을 수 있는 특권을 주셨고, 아담이 부르는 대로 이름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말하고 부르기 이전에는 그냥 그것일 뿐이었던 것이, 아담이 부르기 시작하자 드디어 무엇인가가 된 것입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닮은 모습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행하는 ‘말’의 무게입니다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담이 부르기 이전까지는 단순히 그것일 뿐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삶을,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수 많은 일들과 사건, 가능성들로 가득합니다 아니 그저 우리네 개개인의 하루안을 들여다 보아도 그 복잡성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입니다 그리고 그 지난한 삶속에서 우리가 경험해야하는 이야기들도 다양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살아갑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들 제각각의 문제와 직면하며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실상은 무엇이 걱정해야하고, 두려워해야할 대상인지도 모른채 힘들어하고 어려워 할때가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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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건강에 이상이 생겼을 때, 우리는 크나 큰 절망에 휩쌓이게 됩니다 가난의 문제가 찾아올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지내오던 일상속에 갑작스레 찾아오는 낯설은 환경앞에서 우리는 절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건강 자체나 가난 자체 때문에 힘들고,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건강에 대한, 가난에 대한, 상황에 대한 우리의 마음과 반응에 있습니다
사람의 인생이 각자 상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앞에 찾아온 건강이 문제라면 오늘 불치의 병앞에 있는 이들은 모두 생의 투쟁을 멈추어야만 합니다 가난이 정말 문제라면, 절대적으로 빈곤하고 가난한 나라와 사람들의 삶은 어떤 것이며, 그에 비해 우리의 상황은 어떤 것입니까 ? 적어도 우리의 상황이 그들에게는 그토록 원하는 구원의 대상이지는 않습니까 ? 나는 죽게 생겼다고 신음하는 상황이 누군가에게는 사치일 수 있다는 것을 보면, 정작 문제는 외부적인 것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저 ‘그것’이었을 뿐인 것들인데, 어느새 우리는 그것을 ‘문제’, ‘고통’, ‘절망’으로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부르심과 말씀은 선한 것을 빚어내시는데, 유독 우리는 자꾸만 그냥 그것을 나의 삶을 파괴하고, 타인의 삶도 파괴할 무엇을 만들어 버린채 매달리고 있으니, 우리의 말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불완전한 것들일 뿐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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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하이데거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말(언어)’은 ‘존재의 집’이라고 말입니다 말이 없다면, 언어가 없다면 그것은 불리우기는 하지만 ‘내게는’ 실재하지 않습니다 의미가 없고, 영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냥 그것으로 사라질 것 때문에 우리의 감사와 행복과 꿈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와 생명이 파괴되어가는 것은, 우리 말의 힘을 선용하지 못하는 죄로 파괴된 결과일 뿐입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의 요지는 매우 간단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교회와 교우들에게 외칩니다 ‘너희의 입으로 시인하면 ~ 구원을 받는다’ 라는 메시지입니다 입으로 시인해야하는 대상은 무엇입니까 ? 9절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입니다 바울의 이 메시지를 쉽게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마치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주문처럼 외우는 것처럼 ‘믿음’이라는 것이 입으로 ‘예수 믿습니다’라는 소리에 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지금 소리를 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숨(생명)을 담은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로마교회의 교인들에게 있어 예수를 ‘주’로 시인하라는 바울의 요구는 대단히 도발적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 세상의 불의와 불법함에 의해 죽임을 당한 예수를 너의 ‘주인’으로 말하라는 강력한 요구입니다
로마의 교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삶에 있어서 분명한 주인이 있습니다 바로 로마의 황제입니다 생사의 여탈권을 움켜쥐고 있는 살아있는 신입니다 단순히 권력과 위세 때문만은 아닙니다 로마의 황제야 말로 신처럼 화려하고 신처럼 그럴듯 합니다 그에 반해 예수는 아무런 의미없는 소리처럼 보입니다 볼 품이 없습니다 삶을 바꾸어낼 만큼 강력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황제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세상속에서 로마의 교인들이 황제를 주인이 될 수 없다고 시인하는 말하는 행위는 황제가 허락해주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니, 서슬퍼런 황제의 칼날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릴 수 있는 상황입니다 당장에 눈 앞에 보이는 것은 황제이며, 예수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황제는 그냥 그것일 뿐이며, 예수는 주인이시라고 말하라고 요구하였고, 로마의 교인들은 그의 권면대로 예수는 나의 주인이라고 부르고, 그렇게 주인된 예수와 함께 죽음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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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순교로 내몰렸던 그들이 얻은 구원은 무엇이었습니까 ? 예수는 그냥 그것일 수 없다고, 그분이야 말로 내 생명의 주인이시며, 그의 걸음이 내 영혼의 생명의 길이라고 외쳤던 그들이 누린 구원 말입니다
그들이 입으로 예수를 시인하는 그 순간, 비로서 세상 모두가 순응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그 권세 앞에서 박탈당하고, 차별당하고, 비교당하고, 내몰리게 되는 ‘황제’의 권세와 위용이 ‘그냥 그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황제는 현실이고 사실이지만, 그것이 예수의 사람들을 억누르고, 그들의 자유를 빼앗고, 그들의 평강과 주님안에서 누리는 풍성함을 가로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은 ‘긍정의 힘’같은 류가 아닙니다 내가 바라는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다스리고 있는 이 처절한 삶의 자리에 가득한 거짓된 권세들의 실체를 벗겨내는 것입니다 그들의 거짓된 권세와 힘을 무장해제시켜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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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자녀로 회복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리는 것입니다
권세입니다 권세는 힘입니다 눌리지 않고 빼앗기지 않고 휘둘리지 않는 힘입니다 그 권세는 어떻게 사용할 수 있습니까 ?
공허한 어둠 가운데 ‘빛이 있으라’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우리들 각자의 자리에 찾아온 문제들, 건강, 재력, 관계, 성공, 미래와 장래의 걱정등 주인행세하려는 모든 것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님이시다 ! 라고 외치십시오 ! 그 순간 우리 눈앞에 가득했던 그 소란함과 분주함은 모두 ‘그냥 그것’으로 씻겨 내려갈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말하는 것이 우리의 주인이며, 우리가 말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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