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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02/21 사순절 1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1. 2. 17. 15:22

    성서일과

           1독서 | 창세기 9:8 ~ 17

             응송 | 시편 25:1 ~ 10

           2독서 | 베드로전서 3:18 ~ 22

           3독서 | 마가복음 1:9 ~ 15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U7bitxtku40Ov6YJ8MW7-R86e-nGbe3R/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FSHrrk0mw6c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사순절'의 길 안내자,  '무지개'

     

    1

    사순절 첫주가 시작되었습니다. 해마다 사순절이 시작될 즈음이면 마치 지금까지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삶에 채여 부산하던 걸음이 갑자기 멈추어지는 억지스러움이 불편했었는데, 아마도 사순절이 가지는 교회력상의 의미와 무게가 가져다 주는 엄숙함이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했던 같습니다. 집안에서 편한 복장으로 있을 때와 외출할 때의 꾸밈이 서로 다를 오는 생경함을 벗어버리고 싶었기 때문일까요? 일상의 모습과 달라진 경건과 거룩에 대한 부담은 부활절에 이르는 순간 신기루처럼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았고, 만큼 손쉽게 우리는 다시 십자가와 거리를 부산한 삶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애당초 부활의 날을 향한 꿈만으로 사순절기의 기간을 견뎌낸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가혹한 시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튼 변화산이 아닌 어둠에 덮인 골고다를 향하면서부터 주님은 툭하면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음을 향하고 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게다가 날이 지나도 세상은 아무것도 나아지는 없이 오히려 자꾸만 엉망이 되어가는 것처럼 보이니 가뜩이나 자신없는 길이었던 제자들안에 불안이 자꾸만 두려움으로 강화되어가고 있었을 겁니다. 삶이 가져다 주는 불안과 근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같은 세상이지만 아무런 별일 없이, 아니 오히려 하고 싶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이런 세상 차라리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끌어안고 있는 이들도 있지요.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하나님에 잇대어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없는 세상에 절망할 밖에는 없습니다. 매일이 숨쉬어야 공기가 없는 같은 답답함에 괴롭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구약 1독서 창세기를 기록했던 성서기자는 자신이 보았던 세상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 창세기 6:11

     

    짧은 한마디 안에, 망하는 외에 다른 길이 없을 만큼 엉망이 되어버린 세상에 절망했을 성서기자의 절절한 아픔이 담겨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바라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환경오염으로 생태계가 파괴되고 코로나처럼 치명적인 질병이 자꾸만 우리를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북극의 빙하는 녹고 해수면이 오름에 따라, 온갖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있으며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뒤를 따라올 이들의 몫이 되고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발전과 성장을 향한 무분별한 걸음을 멈추지 않는 지구의 종말이 멀지 않았다고 경고하고 있음에도 탐욕에 취해 누구하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렇게 가면 모두 망하고 것이 뻔합니다. 홍수시대도 그러했겠지요. 그러고보니 하나님을 등진 인간 역사가 선택했던 패망의 운명이 홍수사건이었던 것인데, 우리는 언제나 홍수로 인한 몰살의 책임을 몽땅 하나님께 떠넘기려고만 합니다. 

     

    2

    갑작스레 찾아온 강진 때문에 바다 건너 일본은 10년전 쓰나미에 대한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무력했던 그날의 기억은 참담했었겠지요. 그러니홍수 고대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잔혹하고 절망스러운 운명이었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있습니다. 그대로 홍수가 일어나면 모든 것이 끝장입니다. 용케 살아남는다고 해도 트라우마가 소망을 몽땅 빼앗아가버린 비참한 뿐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삶을 파괴하는 이런혼돈 힘이 인류의 역사보다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 가르쳐줍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 1:2a 

     

    하지만 모두가 절망에 떨어지던 참혹한 환경속에서 성서기자는 땅을 침범한 혼돈의 신을 무찌르고 사람이 살아갈 있는코스모스’(세상) 이루어내시는 하나님을 주목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해주고 있는 창조의 이야기입니다. 슬며시 인간 삶을 파괴하려 다시금 찾아온 홍수로부터 노아의 가족(*사람)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을 구해내시려 하나님은 다시금 무기를 집어드셨고, 마침내 종국적인 영원한 승리를 이루어내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하나님이 계시는 , 혼돈은 결코 우리 생명을 빼앗을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삶에 대한 소망을 빼앗기지 않을 있는 이유를 찾아낸 겁니다.

     

    3

    하나님이 사용하시던 불패의 무기는입니다. 성서기자는 이제 모든 전쟁을 끝마치신 하나님께 더이상 쓸데가 없어 하늘에 걸어두었는데 그것이무지개였다고 말합니다. ‘무지개 뜻하는 히브리어케세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이 재미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깜짝 놀란 사람들은 그때마다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테고, 잠시 개인 틈으로 걸려있는 무지개를 확인하고는 또 안심했을 겁니다. 하늘에 무지개가 걸려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다시 활을 잡으실이 없다는 , 하나님에 의한 혼돈의 최종적 패배가 번복될 없다는 분명한 증거이며지금 너희는 안전하다 하나님의 든든한 음성이었을 겁니다. 이미 하나님은 이런 사실을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 9:11a

     

    다시는 홍수에 의해 망하지 않도록 지켜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성경은 자주 하나님을 인간과의 사이에 약속 언약을 체결하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약속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하늘의 복을 얻고, 반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 당신의 말씀을 따르며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율법의 내용안에는, 우리가 당신과 언약을 체결할 상대로서 걸맞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기대하시는 하나님이 요구와 바램이 담겨있습니다. 언약을 충실하게 지켜내면우리 삶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수준으로 고양되는 것이니, 결국은 우리 자신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오늘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조건이 아무것도 보이질 않습니다. 하다 못해 당신을 믿으라거나, 주신 율법을 지켜내라는 조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공평한 계약, 대가에 구애받지 않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 덕분에 수지 맞는 것은 우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서는 그러실 밖에는 없습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체결된 약속이 유효하려면 상대는 생명에 걸맞는 값을 치뤄야하는데, 애당초 우리에게는 생명을 대신할 대가도,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우리 것은 하나도 없으니 도움을 구할 자격도 없는 겁니다. 자꾸만 하나님의 구원에 비교할 없는 자신의 노력이나 수고함, 혹은 요행을 값으로 치르고 다른 구원이라도 얻어보려고 기웃거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

    약속의 대가로 무엇을 요구하는지 보면, 사람이 가치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이라면사랑 요구할 것이고, 돈을 가치로 삼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해도 결국 대가로 요구하는 것은 것이 뻔합니다. 마찬가지로 언약의 대가로 우리에게 요구된 율법을 보면 하나님의 성품을 엿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의로움이나 자비를 요구하신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또한 의롭고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것을 믿을 있게 하는 겁니다.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시지 않은 오늘 본문의 일방적인 무지개 언약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당신의 자녀들의 생명을 구원함에는 두팔 걷어부치고 달려가는 용사, 대가를 지불할 없는 이들을 위해 언제나 모든 것을 주고, 어떠한 값을 치르더라도너 살리고 보자 하나님이 보이시는지요? 적어도 우리 삶에 가장 본질적인 , 생명을 살리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이해나, 참여, 대가,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은 일방적인 구원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이런 성품 때문에 우리가 있는 겁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무지한 우리의 이해와 설득이 필요하고, 무능한 우리의 참여가 필요하다면, 무력한 우리의 대가가 있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결코 구원받을 없습니다. 죽어가는 환자 앞에서도 대가를 요구하고, 하다못해 자녀를 키우면서도 훗날의 노후를 조건으로 삼는 얄팍한 마음을 가진 우리로서는 닿을 없는 숭고한 마음입니다. 하나님 마음을 잃고 자신에게만 천착하는 옹졸함으로 살다보니 세상이 점점 각박해질 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닮으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질문하지 않을 없습니다. 하나님은 ? 조건없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일까요?

     

    이탈리아에폼페이라는 고대의 도시가 있었습니다. 기원후 79 베수비오 화산폭발로 2000명이 순간에 매장되어 버렸던 둘도 없이 비참한 곳입니다. 그런데폼페이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면서 화산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죽음도 함께 발굴되었습니다. 향락과 번영속에 살다가 한순간 죽음을 고스란히 간직한 굳어진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한켠에서 어린 자녀를 끌어안고 굳어진 어머니의 모습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몸을 죽음에 내어줄 지언정 새끼를 살려내보겠다는 어머니의 처절함이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 우리의 마음을 흔듭니다. 태안에서 10개월간 자신의 살을 내주고, 피를 나누어 몸이 되어주었던 기억이, 나누어질 없는 하나로 여기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절망으로 몰아세우는 죽음을 거스르고 저항하며 이길 있는 힘이 여기에 있습니다. 처음 자식이 어머니와 하나로 있던 곳이 바로 어머니의자궁이지요. 생명을 잉태하고 보듬고 키워내는 어머니의 자궁을 뜻하는 히브리어라캄 바로자비로움 뜻을 가지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다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은 어머니의 자궁 같은 분, 우리를 당신과, 당신을 우리와 하나로 여겨주시는 분이라는 말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위태로움 앞에 때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모든 기도와 간구 바로 사실에서부터 비롯하게 됩니다. 당신과 하나로 여겨주신 우리를 기억해달라는 간절함에 기대는 겁니다. 하나님만을 의존하는 믿음, ’은혜 갈망하는 신앙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향한 무한한 신뢰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5

    이제야 오늘 성서일과 독서들이 모두 가지 사실, ‘구원하시는 하나님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서신서인 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십자가위에서 이루신 단한번의 죽으심으로 모든 시대와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유효하게 하신 주님께서, 죽음 뒤에 영으로 옥에 찾아가시고 죽음안에 갇혀있는 이들 그리고 그들을 붙들고 있는 권세인 죽음을 향해 비로서 자신의 생명으로 값을 치루셨음을 선포하셨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는죽음이라 할지라도 구원을 향한 그리스도의 걸음을 멈추게 없음을 있습니다. 죽음의 서슬퍼런 힘앞에서도 영혼깊은 곳에서부터 참된 평안을 얻을 있는 유일한 이유도 반드시 구원해내시는 주님때문입니다.

     

    3독서 마가복음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 ‘광야 향하신 그리스도께 주목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주님은 광야로 가셨을까요? 광야는 죽음이 실세로 도사리는 , 결코 낭만적일 없는 현실의 땅입니다. 광야는 삼킬자를 찾는 음험하고 사악한 이들의 땅입니다. 그리고 한발 삐끗하면 누구든 죽음에 내몰리게 되는 곳이 광야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이런 위태로움에 내몰려 살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본래 땅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입니다. ? 이런 척박하고 버려진 땅이 되었을까요? 마귀가 도사리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 사람이 없는 죽음의 땅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이라도 당장 은혜가 사라지고 마귀가 도사리는 순간 거칠기 짝이 없는 광야가 되고 맙니다. 앞에서 우리의 믿음은 곤두박질치고, 신앙은 깨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잇댄 믿음을 가지고 광야를 향해 걸어가시는 주님의 힘찬 걸음안에서, 마귀의 사특한 음모와 계략을 깨트려 당신 백성을 구원해 내시는 일방적이고 주저함이 없는 구원을 만나게 됩니다.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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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절 첫주, 기간만 되면 자신을 비우고, 절제하고, 희생하며,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결심에 분주했고, 그런 부담을 경건이라 여기며 만족해 왔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부인하고 비워내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구원은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역사일 뿐입니다. 오늘 성서일과 독서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주고 있습니까? 죄인을 당신과 하나로 여겨주시는 주님의 전적인 은혜와 구원에 응답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무엇해야합니까? 자비로우신 주님의 전적인 은혜와 일방적인 구원을 깊이 실감하고 감사하는 것이 먼저이고, 그것이 최선입니다. 

     

    우리를 당신과 하나로 여겨주셨음을 기억해달라 간구했다면, 하나님의 구원에 응답하는 우리 삶은 반드시 주님과 몸이 되고, 하나가 되기 위한 걸음이어야 합니다. 선하신 의지로 능히 죄와 죽음, 모든 환란으로부터 능히 구원해내시는 하나님을 믿는 , 또한 주의 구원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할 있는 복된 존재되었음을 기억하는 것이야 말로 사순절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만을 믿으며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하늘에 걸린 무지개가 아닌, 우리 안에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만을 믿으며 사순절의 기간을 걸어갑니다. 막연하게 우울해지고, 무거워지는 기간이 아닌, 능하신 손으로 우리를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 그분의 자비로우심을 깊이 생각하고, 그런 하나님께 감사와 기쁨으로 응답하는 복된 순례의 계절이 있기를 빕니다. 주님은 구원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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