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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0 성령강림후 22주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2019. 11. 9. 15:20

    성서일과

          1독서 | 학개 1:15 ~ 2:9

          2독서 | 데살로니가후서 2:1 ~ 5, 13 ~ 17

          3독서 | 누가복음 20:27 ~ 38

          응  송 | 시편 145:1 ~ 5, 17 ~ 21

     

    설교 음원

    https://drive.google.com/open?id=1o3eF3PnTTomwUcABfxaZ8W26sACSq7a8 = '클릭' 하시면 설교를 청취할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Jd0ijMtoaiI = '클릭' 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영원한 오늘' 위에 서십시오

     

    1

    예수님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고, 다른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다른 목적지를 향해 살아간다는 말일 것입니다. 삶의 주인이 바뀌었고, 삶의 결이 달라졌으니 그러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게 된 이후부터 우리들의 삶의 모습은 자꾸만 달라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과 부딪친 사람은 기도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는 소망의 불꽃을 살려낼 재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전까지 어찌할 수 없다고 체념하고 순응하던 삶에 찾아오셔서 거룩한 저항으로 우리 마음에 불을 지르기도 하시고, 유혹과 시험이 찾아오는 순간에도 의연하게 떨치고 일어설 용기를 북돋우기도 하십니다. 비록 ‘꿈이 없다’ 말하는 세상에서 절망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오늘도 하늘에서 부어지는 은혜가 있음을 기억해낼 수 있게 된 것도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돌아보면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의 지나온 걸음이 늘상 곧고 바르게만 놓여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비뚤비뚤하고, 멈추어져있기도 한 것이 여간 실망스러울 때가 많지 않습니다. 지나온 것이야 어찌할 수 없다지만, ‘지금’도, 앞으로도 그닥 자신이 생기질 않으니 그것이 서글플 뿐입니다. 과연 우리는 온전히 이 믿음의 걸음을 걸어낼 수가 있을까요 ?

     

     

    2

    그런면에서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향한 바울의 애틋한 편지를 읽으면 참으로 부럽기만합니다. 곁을 지켜주지 못함에도 신앙의 걸음을 지켜나가는 모습을 기특해하는 바울의 마음에 감동을 받다가도, 슬며시 ‘과연 저들은 우리와 달랐을까?’ 생각이 올라올 때 부끄럽습니다. 정말 바울이 믿음을 칭찬하고 있는 저들은 두렵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고, 흠없이 온전한 걸음을 걸어내었던 것일까요 ?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 괜시리 주눅이 듭니다. 성경안에서 만나게 되는 수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고, 우리 시대에도 믿음을 지켜내며 귀감을 이루고 있는 이들에게도 그렇습니다. 세월이 그렇게 흘러도 여물어지지 못하는 자신의 초라한 걸음과 자꾸만 비교가 되니, 나와는 다른, 우리와는 다른 무언가 특별한 사람들처럼 부럽게만 보이는 그 때, 반복해서 읽다보니 이런 마음에 조금은 위안이 되는 것들이 눈에 보입니다.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 _ 데살로니가후서 2:2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_ 2:3

     

    무언가를 ‘하지 마라’ 혹은 ‘하라’는 말은 계속한다는 것은 하지 말아야할 것을 하고 있고, 해야할 것을 하지 않는 상황이 전제된 말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감사해하고, 칭찬하고 있는 데살로니가교회에도 우리와 같은 연약함의 모습이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타인의 연약함에 위안을 받는다는 것이 부끄럽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바울의 편지속에는 미혹하는 이들, 거짓 증인들, 스스로 신이라 말하는 우상숭배자들의 기만과 유혹이 끊이질 않았던 데살로니가교회 현실이 담겨 있습니다. 믿음으로 인한 구원의 표징이나 징표들이 나타나고 있는 교회였지만, 그들도 주님의 영광이나, 하나님 나라의 성취, 부활의 생명을 온전하고 완전히 경험하고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여전히 우리와 같은 비틀거리며 걷는 신앙의 걸음을 걷고 있었던 셈이니다. 제 아무리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고 하여도, 불안하고 늘상 두려운 것이 우리입니다. 평지를 거니는 것 같았는데 구비구비 비탈길을 만나고, 어느새 내리막에 내몰리기도 합니다. 그러니 과연 이 믿음의 길을 잘 걸어갈 수 있을까 ? 라고 하는 질문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우리네 심정에 관계 없이, 교회를 향한 매우 단호하고 확신에 찬 격려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_ 살후2:15

     

    서슬퍼런 로마 제국의 시대에 예수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선택은 없었던 때입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를 기다리다 세상을 향해 돌아섰고, 교회 안에도 그릇된 길을 제시하는 거짓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때입니다. 믿음을 지키며 끝까지 달려간다는 것이 불가능은 아닐까 되물으며 아슬아슬하게 지탱하는 걸음입니다. 그런 상황에 ‘굳건히 서라’는 바울의 권고는 성도들을 몰아부치는 현실 감각 없는 채근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왜? 어떻게 ? 무엇을 근거로, 데살로니가교우들을 향한 이런 확신에 찬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

     

     

    3

    누가복음 20장 27절부터의 본문을 보면 우리는 또 다시 논쟁에 휩쌓여 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두개인들이 예수님 앞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압제당하는 이 치욕스러움을 하나님께서 갈아 엎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던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이런 세상에서도 별 아쉬움 없이 살 수 있던 사람들이 사두개인들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디찬 광장을 찾아, 첨탑이나 크레인 위로 오르는 이들은 모두 오늘을 만족할 수 없는 억울한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소위 배부른 사람들은 세상이 뒤집어지기를 원치 않는 법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던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찾아와 던진 질문은 신명기 25:5 의 내용을 근거로 하는 것들입니다.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형이 죽자, 그의 아내를 남은 동생들이 차례로 아내로 맞아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차례로 죽게 되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이제 모두가 다 한 여인을 아내로 취한 셈이니 부활이 있어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난다면, 이 여인이 과연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형사취수’(兄死娶嫂) 라고 하는 제도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여러분도 이런 비슷한 고민을 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 다음에 부활하면 ‘우리 식구들을 다시 만나서 천국에서도 가족이 될 수 있을까 ?’ 혹은 ‘천국에서 어떤 모습으로 부활할까 ?’ ‘어린 시절의 모습일까 ? 죽기 직전의 모습일까 ?’ 궁금하시지 않으셨나요 ?

     

    사두개인 덕분에 드디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이 풀리게 된 순간입니다. 주님의 답변이 기대가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답변은 35 ~ 6절 ‘천국에서는 즉, 부활하는 이들에게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고, 다시 죽는 일도 없다’ 라는 것이 전부입니다. 천국에서는 혼인관계가 모두 소멸되고 없어진다는 것인지,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인지 분명치가 않아보입니다. 게다가 덧붙이시는 37 ~ 8절까지의 말씀은 더욱 뜬금이 없이 들립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_38

     

    여러분은 이 말씀을 따라가실 수 있으십니까 ? 하나님은 죽음 이후에는 관심이 없으시다는 말일까요 ? 대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좇아가야할까요 ?

     

     

    4

    사실 따지고 보면 사람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란,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고, 이런 모습, 저런 모습,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은 모두 ‘결혼을 하는 것이나, 자식을 낳고 사는 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들 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부활의 삶, 천국에는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부활 이후의 삶에는 우리가 경험하고, 바라고, 추구하는 이 세상의 것들이나 방식들이, 그대로 적용되거나 작동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도 부활이후의 삶에는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런 것을 구하고 얻으려는 것을 목적으로 작동하는 세상과 부활이후에 우리가 만나게 될 세상은 전혀 다를 것입니다. 이 말씀이 너무 어렵게 들리시나요 ?

     

    예를 들어 밀림 오지에 사는 어떤 부락민들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세상과 고립된 채 살아오는 그들은 내것 네것이 없이 서로가 한 가족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가진다거나, 누구보다 더 높아진다는 개념도 없습니다. 그런데 조난 당했던 사람들이 구사일생으로 이 마을에 도착했고, 지치고 굶주리던 그들이 가지고 있던 다이아몬드나, 금덩이와 먹을 것을 바꾸자고 한다면 어떨까요 ? 밀림 밖의 세상에서는 이것 때문에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이것을 얻기 위해 인생을 소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그저 반짝이는 돌맹이일 뿐입니다.

    천국이 금덩이가 깔려있고, 온갖 보물이 가득하며, 또 이 땅에서 주를 위해 공덕을 많이 쌓은 사람은 고급 빌라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볼품없는 곳에 살게 될것이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이 세상의 가치와 삶을 죽음이후의 천국으로 연장하려는 생각들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이런 것은 우리가 마주하게 될 천국이나 부활이 아닙니다 !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본문의 이야기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38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예수님의 말씀은 한마디로 ‘죽느냐, 사느냐’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살아 있는 것일까요 ? 죽어 있는 것일까요 ? 우리는 삶과 죽음을 으레 ‘육체적’인 것으로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생명이 육체안에 거하는 것이지, 육체가 생명인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지금은 살아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우리는 100년 안에 다 죽습니다. 1년후가 되든, 10년 후가 되든, 기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가 죽음아래에 있는 것은 동일합니다. 살았다고 하지만, 살았다고 말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저 죽음 이전까지만 경험하게 되는 ‘현실’일 뿐입니다. 일전에 주님은 죽은 오라비 때문에 슬퍼하던 마르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_요한복음 11:25 ~ 26

     

    어떻습니까 ? 여러분은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 다시 살아났던 나사로는 결국 다시 죽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있지만 곧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 그런 생명은 무엇일까요 ? 무엇이 죽지 않는 것입니까 ?

     

     

    5

    누가는 평행본문인 마태나 마가에는 나타나지 않는 말씀 한 부분을 덧붙였습니다. 38절 후반절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이 말씀이 우리를 돕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땅의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죽음 이후도 지금의 모습, 지금의 가치를 통해 헤아리고, 보상받으려고 합니다. 생명도 그렇게만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런 것만 보아왔고, 그속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언제가 죽어질 이 육체가 영원히 살 것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을 연장해서 말입니다. ‘부활’의 초점을 ‘나는 살아야 한다’는 조급증과 강박증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삼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의 한계 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활’의 이야기의 핵심도 ‘하나님’이고, ‘부활’ 자체의 핵심도 ‘하나님’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거나, 영원히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수명을 100년에서 200년, 500년을 늘려도 결국은 죽게 됩니다. 이런 것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살았다!’ 라는 예수님의 선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주목해야만 합니다. ‘모든 것을 살려내시는 분, 하나님이야 말로 생명이시다 !’ 라는 말씀이 가슴에 뜨겁게 새겨져야만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말씀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뜬구름 같은 것이 아니라, 실제라는 것을 경험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10년, 100년을 살아가는 것은,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와 관계 없이 죽어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연결되는 것만이 우리가 영생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연결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믿는 것 뿐입니다 ! 육체가 소멸되는 순간 ‘죽음’에 삼키워지는 우리이지만, 모든 것을 살리시는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다면 죽음도 죽음일 수 없습니다 ! ‘살아 있다’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만 경험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인타임’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을 재산처럼 소유할 수 있고, 돈처럼 거래할 수 있게 된 미래 사회의 모습을 다룬 영화입니다. 그 시대에는 시간을 많이 소유한 자가 부자입니다. 그런데 영화속에서 참 인상깊던 장면이 있습니다. 시간이 없는 빈민 출신의 주인공이 부유한 시간을 소유한 이들의 도시에 갔을 때, 여자 주인공이 던지는 말입니다. . ‘명문가 출신 맞아요?’ ‘왜 의심하죠?’ ‘뛰는 것을 봤어요’…. 서두르고, 조급하고, 과도하게 열정적으로 산다는 것, 초조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모두 죽음이후의 허무의 깊이가 그 만큼 깊고 강하다는 것과 나 자신은 실은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다는 증거인 셈입니다.
    하지만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영생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은, 그때서야 비로서 ‘얼마나 많이 가질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살 것인가 ?’ 라는 질문에 답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6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대체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삶에서도, 여전히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찬양하며, 고통과 아픔에 지배당하고, 어둠과 죽음에 삼키워지지 않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식을 죽음에 묻은 부모에게 세상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죽음같은 하루 하루를 건너, ‘죽음’을 뿌리치고 오늘도 또 살아내고 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100년을 살아도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생하게 살아있음의 향기를 드러내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생명이신 하나님 없이 살던 삶에서, 하나님을 향해 깨어난 순간이 다시 사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전혀 알지 못하던 세상의 허무를 깨닫게 되었고, 죄의 잔혹성과 파괴성을 보게 되었고, 주 안에서, 주님 은혜 안에서 살고 있음을, 그래서 감사할 수 밖에 없는 삶을 보고, 듣고, 맛보며 살게 되는 것이 ‘살아 있음’을 경험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외치고 있습니다. ‘굳건히 서십시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바울은 우리가 굳건히 설 수 있고, 또한 굳건히 서야하는 이유는 모두 ‘하나님’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택하셨고, 거룩하게 하시고, 구원받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내십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대체 왜 ? 이럴까 ?’ ‘왜 ? 내 삶이나, 내 신앙은 나아지지 않을까 ? 왜 늘 그 자리일까 ?’ 연약한 내 모습에 고통스러우십니까 ? 믿음이 흔들리는 것같고, 구원의 날이 자꾸만 불안하십니까 ? 죽은 세포는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니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은 살아 있다는 말이지 않겠습니까 ?

     

    그러니 여러분, 굳건하게 서십시오. 하나님앞에서 살아있는 여러분은 굳건하게 서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는 자유할 수 있는 힘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려 할때 마다, 굳건함을 선택하십시오. 그 서 있는 자리를 지켜내십시오. 죽음을 거부하며 우리를 살아있게 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굳건히 선다는 것은, 하나님 없슴의 세계안에서 하나님 안에 살고 있다는 관점을 바꾸는 힘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기도하고, 그러기 위해 말씀을 읽습니다. 그러기 위해 예배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습니다.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할 때 비로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모든 것을 살아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있음의 길을 선택하는 이들에게, 바울은 말합니다.

     

    사랑으로 다가오셔서 끊임없는 도움과 확신을 선물로 주시며 여러분을 놀라게 하신 예수와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친히 여러분 안에 새로운 마음을 주시고, 여러분의 일을 격려하시며, 여러분의 말에 생기를 더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_ 데살로니가후서 2:16 ~ 17 (메시지 성경)

     

    주님을 향해 머리를 드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살아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유혹과 기만, 속임과 두려움, 흔들거리는 절망속에서도 그렇게 땅을 박차고 주님을 붙들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다 이 땅 모든 백성들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_학개 2:4

     

    굳건히 서는 것은 ‘이 신앙을 여러분의 삶에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내몰려 있는 유한한 살아있음이 아닌, 생명되시는 하나님께 잇대어 있는 ‘영원한 오늘’을 살아가십시오. 내 영생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십시오. 그것이 살아있음을 소비하게 만드는 세상에서, ‘굳세게 서는 것’입니다.

     

    고백은 ‘지금’ 하는 것입니다. 꺼질 것만 같고, 무의미해보이고, 두렵고, 움츠려들고, 비굴해지게 만드는 절망스러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바로 ‘지금’ 우리는 주안에 살아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모든 죽은 것들을 살아있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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