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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 06/ 28/ 성령강림후 4주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2020. 6. 24. 11:32

    200628 최종.pdf
    0.17MB

    성서일과

    • 창세기 22:1~14 혹은 예레미야 28:5~9
    • 시편 13혹은 시편 89:1~4, 15~18
    • 로마서 6:12~23
    • 마태복음 10:40~42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CMwH1PCu_CljAFkShtVsjtr30_OuEWMG/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VS2JMsqBWrE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나눌실 수 있습니다

     

    예배 Full 영상

    https://youtu.be/QkCZ5Q2aHzg = '클릭'하시면 예배 영상 전체를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그날, '아브라함'이 죽었다 !

    1

    요새 들어 계모와 계부가 아이들을 짐승처럼 학대하고 심지어 유기치사했다는 반인륜적인 범죄 소식이 뉴스에  부쩍 자주 소개되고 있습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 모두 망가져버리고 만것 같은 세상이 여간 심상치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만약 오늘자 신문에 기사로 실렸다면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목사, 자녀 살해 미수에 그쳐…’ 정도의 제목이 달렸을 법한 사건입니다. 어떻습니까, 듣기에도 섬칫하시지요? 어떤 사건인지 짐작이 가시나요? 맞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바치려던 그 사건입니다. 쉽지 않은 본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이라 그렇지, 만일 우리 시대에 누군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저런 일을 벌였다면 여러분은 그의 행동을 종교적 신념과 믿음에 의한 것이라 옹호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 성경은 매우 담백하게도 아브라함의 순종을 ‘믿음’의 기준으로 소개하고 있으니, 어느 순간 신앙이 말하고 있는 ‘믿음’은 다시 아득해 보입니다. 또 한편으로 정작 그런 수준의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신앙 열등감도 우리 안에는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사실 모두가 신앙적 열정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도리어 신앙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냉담하게 되면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뿐, 이런 문제에 고민할리가 없습니다.

     

    2

    성경안에 머리가 지끈 거리는 본문은 이것만은 아닙니다. 불행?히도 오늘 성서일과 3독서 마태복음 10장 본문도 우리 마음을 어렵게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이삭 제물 사건처럼 끔찍한 상황이 벌어진 것도 아니고, 이해하지 못할 만큼 어려운 내용도 없는데, 말씀을 읽다보면 목에 가시라도 걸린 것 처럼 알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마태복음 10장 본문의 바로 앞단락은 제자들을 세우신 이후에 그들에게 당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제자로 살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만 합니다. 갈등도 생길 것이고, 어려움이나 환란도 찾아올 것입니다. 스스로를 부인하고 ‘나는 죽었다’는 표징으로서의 제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는 예수님을 따라 올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40절~ 42절까지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로 이 길을 따라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에게 주어질 ‘상급’에 관한 내용입니다.

     

    제자들에게 찾아오는 고난은 우리에게도 그닥 낯설지는 않습니다. 실재로 지구촌 곳곳에는 아직도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박해가 자행되는 곳이 있고, 그렇지는 않아도 신앙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그때나 지금이나 치열하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제자의 삶에 ‘상급’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유는 비교적 분명합니다. 지나온 모든 것이 은혜였다거나 주님이 베푸신 기쁨이라고 고백을 하기는 하지만 실재로 마음속으로는 자신은 ‘상급’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고난이나 환란, 남들은 겪지 않는 손해를 자초하는 힘들고 아픈 길이라는 생각이 우리안에는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상급’이라고 하면 그저 이 땅을 떠나 천국에 가면 이 모든 것을 갚아줄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속에 꾸욱 꾸욱 눌러놓고, 에둘러 스스로를 자위하고 있을 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상급’은 눈에 보이지 않고 늘 모호하게만 들립니다. 본문에 기록된 ‘상급’은 정확히 표현 그대로는 ‘선지자가 받을 상’, ‘의인이 받을 상’입니다. 솔직히 이런 상급이 무엇인지도 잘 와닿지도 않고, 이해하고나면 도리어 실망스럽기까지 합니다. 선지자들이 부자가 되었다거나, 높은 지위에 올랐다는 이야기, 하다못해 사람들로부터 그의 외침이 옳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말도 성경에서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인정받은 의인이 된다고 해서 삶이 더 윤택해지거나 부유해질리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주님이 말씀하시는 ‘상급’에도 별반 기대가 생기질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받는다고 뭐가 대수일까?’라는 볼멘 소리가 솔직한 우리 마음입니다. 정말 선지자나, 의인이 받을 상이면 만족하시겠습니까 ? 

     

    3

    ‘너희에게 이런 것들이 주어질 거란다. 어때? 멋지지 않니?’ 아마도 주님의 표정은 기쁨과 기대감으로 가득했을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 마음은 좀 채로 흡족하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상급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돈’을 상급으로 생각하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신앙생활이라고는 해도 많은 경우는 ‘돈’, 또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상급으로 구하는 목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내세의 천국을 빼고 남은 우리의 모든 기대와 관심이 여기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상장보다는 금일봉을 더 선호하는 우리들에게 선지자들이나, 의인들이 받는 상은 빚좋은 게살구처럼 거추장스럽기만 한 것이 솔직한 속내입니다.

     

    ‘작은 자들에게 냉수 한그릇이라도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상급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도 이것만 해도 된다는 뉘앙스가 우리의 부담을 가볍게 해준다는 의미에서는 반갑지만, 겨우 그 정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뭐 대단한 것이겠냐?’는 냉랭한 생각이 어느새 기대감을 빼앗아 가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의 진보가 없고, 예수를 믿기에 마땅히 누려야할 자유와 해방의 기쁨이 실종되고 메마르고 힘겨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냉수 한그릇’의 가치를 바라볼 수 있어야만 비로서 보이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

     

    4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장면을 다시 생각해 볼까요? 이 사건이 우리 마음을 힘들고 불편하게 만들었던 본질적인 이유는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의 생명을 제물로 요구하실 수가 있는가?’라는 불만과 한편으로 ‘나는 아브라함처럼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좌절감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니까 가능했겠지’라거나, 이미 알고 있는 결론처럼 숫양을 준비시키셨던 ‘여호와 이레’의 해피엔딩을 머릿속에 남긴채 우리는 서둘러 이 사건에서 눈을 돌리고 맙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은 모든 것이었습니다. 백세에 얻었다는 것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 자식은 누구에게라도 생명 보다 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가타부타 설명 하나 없이 그 아들을 재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겁니다. 참으로 아찔 했을 겁니다. 정말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이었을까요? 만일 우리가 그때 그런 자리에 있게 된다면 정말 이런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을까요 ? 정상적인 부모라면, 누구도 그럴 수는 없을 겁니다. 그리 해서도 않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렇게 했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절대적’인 순종인 겁니다. 이것이 이 뜨악한 사건 자체 보다 앞서는 본질입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순종하세요’라는 강요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그의 순종이 어떻게 ‘절대적’일 수 있었느냐?는 질문의 답을 얻어야만 합니다.

     

    대체 아브라함과 우리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는 무엇 때문에 그리 할 수 있었고, 또 우리에게는 무엇이 없기에 할 수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 경험’이 본질적인 차이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절대적 순종의 한걸음을 가능하게 할 만큼 아브라함이 경험한 하나님이 압도적이었다는 겁니다. 절대적으로 순종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곧장 모든 가능성이 깨어진 무능한 존재로서의 나 자신을 인정하고 직면하는 것, 자기부정이나 십자가를 짊어지는 죽음의 경험과 동의어입니다. 단 1%라도 자기 성취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면, 그 가능성에 기대고 몸부림 칠 뿐 절대로 하나님을 믿을 수도 순종할 수도 없는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염려나 근심, 바라는 것들과 소망까지도, 그리고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를 만큼의 압도적인 하나님 경험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겁니다. 사실 역사속에서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고, 아무것도 없는 깨어진 터위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었던 아브라함처럼, 자신들의 운명을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일치시키는 것 말고는 다른 희망은 없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내어드릴 수 있게 했던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 나는 죽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남게 되는 자기죽음의 터위에서 그들은 마침내 하나님이 깨어진 이 민족과 함께 하신다는 신앙 경험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날 숫양을 준비시키셨던 ‘여호와 이레’이신 하나님의 손길이 모리아 산에 올랐던 걸음 중 누구도 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그 산에서 죽어 하나님께 드려진 재물은 숫양만은 아니었습니다. 느닷없이 들린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순종하기 위해 걸어야만 했던 아브라함의 삼일길은, 어떻게 해서든 살고자 하는 자신을 죽여야만 했던 피눈물이 새겨진 흔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들 이삭을 제단 나무위에 올려 놓고 시퍼런 칼을 치켜들었던 그 순간, 아브라함은 마침내 하나님 앞에서 죽었습니다. 

     

    실은 오늘도 우리는 매일같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수 많은 선택들 속에서 번민하고 고민할 때 마다 시끄럽게 들리는 음성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지, 세상의 방식을 선택할 것인지, 불법과 불의함 앞에서 침묵할 것인지 용기를 낼 것이지, 탐욕이 꿈틀거릴 때 타협할 것인지 마땅히 거부할 것인지, 세상이 강요하는 성공의 길을 선택할 것인지 제자로서 살아가는 걸음을 선택할 것인지 말입니다. 그러나 그때 마다 우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일리가 없어 …’ 

     

    5

    하나님 경험은 반드시 ‘자기 부인’으로 이어질 수 밖에는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삶이 온통 뒤바뀔 만큼의 압도적인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한번 사람을 찾아오시면 적당히 바꾸시는 법이 없습니다. 당연히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와 기준도 말씀과 주님의 뜻에 따라 바뀌어야만 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 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러고 보면, 주님의 말씀에 ‘그런 것이 뭐가 대수냐’고 했던 우리의 반문들은, 아직도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짊어지지 못한, 하나님 경험에 사로잡혀 있지 못했다는 반증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돈이 상급이 되는 세상에 사로잡혀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도 돈벌이 좋은 것이 기준입니다. 건강하고 복된 신앙의 기준도 소위 물질의 풍성함을 얻었느냐로 따져묻습니다. 목사들의 목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드러내놓고 ‘돈’을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커다란 교회건물이나 많은 성도수를 성공한 목회나 목회자의 기준으로 여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늘 다른 이들과 비교하게 되고, 부족함을 채우려는 일상의 과잉에 자신을 몰아세우게 됩니다. 초조하고, 불안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달라질 수 없는, 죄가 지배하는 불쌍한 존재일 뿐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자유를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구원을 능력으로 실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 | 롬 6:12

     

    죄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바울의 외침이 가벼이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니 늘 똑같습니다. 죄로부터의 해방, 즉 구원을 경험하지 못한 노예와 같은 처지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그 길,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 경험의 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 롬 6:23

     

    6

    구속당하지 않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은 세상 모든 권세보다 크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뿐입니다. 무엇을 이루어낸다고 해도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외에 다른 답이 없다고 성경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세상이 ‘그까짓 것이 뭐가 대수냐?’고 했던 ‘예수의 제자’가 되었고, 모든 절망과 죽음에서 우리를 건져내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을 쏟을 수록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상급’이라는 사실이 더 실감이 나게 되는 겁니다. 마음을 쏟는다는 것은 그것에 압도당해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행복해지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니까 행복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행복해지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인간 선언에 귀 기울일 것을 요청합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냉수 한그릇이 말라 죽어가는 꽃을 살려낼 수도 있습니다. 그까짓 꽃 하나가 아닙니다. 때로는 갈함으로 쓰러져가는 사람을 일으켜 세울수도 있는 가치가 그 안에 담겨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시나요. 만일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돈벌이로 연주를 해야만 하는 피아니스트가 있다면 그는 만족하고 행복해할까요 ? 피아니스트는 베토벤의 월광에 심취하거나,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에 빠져들어있을 때, 비로서 피아니스트로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압도당한 선지자나, 하나님께 인정받은 의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상급이라는 예수님 말씀이 이와 같은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 아직도 별것 아니라 생각하시나요?

     

    줄줄 새는 바가지라도 그안에 담긴 생수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는 겁니다. 깨진 그릇이 아닌, 담겨있는 보화에 집중하며 사십시오. 비록 냉수 한 그릇 만큼도 못 담아내는 볼품없어 보이는 ‘나’이지만 주님을 믿을 때에 우리안에 거하시는 주님께서 영생하는 열매를 맺게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에 하나님이 이미 이 상급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오직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런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당할 수 있기만을 소망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 고후 4: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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