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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 09/ 20 성령강림후 16주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2020. 9. 16. 14:30

    성서일과

          1 독서 | 출애굽기 16:2 ~ 15 혹은 요나 3:10 ~ 4:11

            응 송 | 시편 105: 1 ~ 6, 37 ~ 45 혹은 시편 145:1 ~ 8

         2 독서 | 빌립보서 1:21 ~ 30

         3 독서 | 마태복음 20:1 ~ 16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WS3p9Xjge3_ADwpekIBvAHQ5eGWnPeFh/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Pz0SW03cXs4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Vincent van Gogh, 붉은 포도밭 ( The Red Vineyard ), 1888년 11월 러시아 푸쉬킨 박물관 소장

     

    찾아 내시는, 하나님께 사로잡히다

     

    1

    코로나로 인한 강도높은 거리두기 조치가 시행되고 있는 요즈음 아직도 대면예배를 고집하고 강행하는 교회들이 많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와중에예배 자체에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닌 이웃의 목숨을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신앙이라고 말했던 목사님이 테러를 당하는 끔찍한 사고가 있었습니다. 남녀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왔다가 휘두른 것은 교회 앞마당에 놓여있던고무망치였다고 합니다. 자칫 돌이킬 없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던 아찔한 순간입니다. ‘? 애국목사들을 비난하느냐?’라고 것을 보면 그들도신자들임이 분명한데, 어쩌다가 우리 신앙이 이렇게까지 곤두박질치고 것인지 통탄할 노릇입니다. 오늘 우리가 대체 어떤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일까?하는 마음입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구원받아야만 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고 그런 사람으로 변화되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평생을 예수를 믿으며 살았다고해도 이렇게 어느 한순간 드러나고 마는 우리네 민낯을 볼때마다구원 참으로 요원한 것이 아닐까 하는 아득함이 밀려옵니다. 복음은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키고 마는 능력인데, 우리는 이토록 변화되지 않는 것일까요?

    사실 시간이 지나면, 조금 여유가 생기거나,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게 되면, 구원에의 변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없는 기대감이 알게 모르게 우리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교회생활이 익숙해지고, 신앙년수가 쌓이거나 조금 교양있게 산다고 해서 구원이 체화되어 가는 것이 아님을 우리 스스로에게서 확인하게 됩니다. 신앙을 갖게 되어도 우리는 여전히이전의 길들여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그런 삶의 방식을 벗어내는 것이 어렵습니다. 탐욕은 탐욕대로, 두려움은 두려움대로 우리를 사로잡고있으며, 눈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몸은 여전히 땅에 붙들려 있는 셈입니다. 

     

    2

    하나님의 구원을 목격하거나 경험했다고 해도, 여전히 삶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1독서 출애굽기 16 말씀에서도 있습니다. 애굽의 막강한 손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이끌로 나오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홍해를 가르며 구원의 손을 그들에게 펼쳐주셨습니다. 매일 아침 떠올라 그들 앞에 펼쳐져있는 구름기둥을 때마다 놀라운 은총이 자신들을 붙들고 있음을 목격합니다. 매일의 아침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놀라움과 환희에 사로잡힌 시간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이날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들안에 원망과 불평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앞서 홍해를 건너자마자 광야의 초입마라 이르렀을 마실 물이 없다는 사실에 불평했었는데, 이번에는 먹을 때문에 불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배불리 먹을 없다 것이 그들의 하소연(3)입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할 없었던 이유는, 내일을 먹이실 하나님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루를 있다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습니다. 불안과 불만은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책임질 있다는 확신이 들때만 멈추어질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생존 직결되는 것들인데, 지금 직면하고 있는 광야에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것들이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내일은, 그리고 다음 날은…’ 꼬리를 무는 염려가 곧장 두려움으로 이어지고 맙니다. ‘내일도 먹고 마시며 있을까?’라는 원초적인 질문에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문제를 두려워합니다. 사실 우리도 매일 이런 질문을 하고 있고, 오늘의 수고로움과 염려도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이고 보면, 지금 그들의 불평이 터무니 없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라고 모두가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지도자라는 위치때문이 아니라, 출애굽 이후 홍해를 가르며 지나온 길에서 목격했던 모든 것들이 생명을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이곳 광야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실 분이라 믿었기에, 모세는 다른 이들이 광야의비어있음 바라볼 때에도 그곳에서 채우실 하나님을 주목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의지했지만 모세에게 인도자는 하나님 뿐입니다. 그러니 진중에서 터져나오는 모든 불평과 불만이 결국은 하나님을 향하는 것으로 보일 밖에는 없습니다. 모세는 두려운 마음으로 외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 출 16:8b

     

    3

    성령강림절기 이후 교회력을 따라 읽어온 성서일과의 내용은 주로 사랑, 용서, 그리고 용납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이번주일 3독서 마태복음 20 말씀에서도 같은 교훈을 쉽게 발견할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할 사람들을 자신의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있습니다. 삼시, 그러니까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에 추가로 사람을 들여보냈으니, 아마도 처음 포도원에 들어온 사람들은 유대의 낮시간의 시작인 오전 6시부터 일을 시작했을 겁니다. 여하튼 일손이 부족하다 여겼던 것인지 이후로도 주인은 밖에 나갔다가 12, 오후 3 그리고 마지막으로 5시에도 품꾼들을 구하여 자신의 포도원으로 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시작한 시간이 달라도 오늘의 작업이 마쳐지는 시간은 모두 오후 6시라는 것과, 오후 6 일이 모두 마쳐진 이후 주인이 치룬 때문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모두에게 (마지막 오후 5시에 들어와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품꾼까지 모두! ) 하루치 삯인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일한 만큼 셈을 치루어도 깎아야 이익이 한푼이라도 남게 되는 법인데 주인의 처사는 아무런 이익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눈에 그는 어리석어 보일 뿐입니다. 게다가 그런 처신은 많은 시간을 일한 사람들에게 공평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낯설은 모습입니다.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선 19장의 이야기를 살펴봐야합니다. 주님이 이야기를 하신 발단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청년이 영생을 구하러 왔다가재물을 다팔고 자신을 좇으라 주님 말씀에 실족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시던 주님께서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 말씀하셨고, 말을 들은 제자들은 대체 그러면누가 구원을 얻을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아무도 없겠다는 하소연입니다. 오늘 본문의 포도원주인에 대한 비유는 바로 질문에 대한 주님의 답변입니다. 핵심은 19 26절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 19:26

    지금 주님의 말씀은하나님이 하실 있으신 대체 어떤 것들인지를 가르쳐주고 계신겁니다. 그러므로 본문속에서 포도원 주인이 그러했듯차별함 없이 타인에게 호의와 선의를 베풀며 살자! 식으로 읽고 마는 것은 핵심을 놓치고 마는 셈입니다. 주님은 포도원 주인의 정체가 바로천국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대상은 포도원 주인입니다. 그러나 다른 시간에 와서, 일한 양이나 능력이 같지 않은 이들을 모두 동일하게 처우하는 포도원 주인은 여전히 우리에게 낯설기만하고, 주인의 처사에 반발하는 품꾼들의 항의가 합당하다 여겨집니다. 실재로 우리는 아무리 인자하고, 너그럽게 보이고, 그런 척하면서 사람들을 대한다고 해도 속마음까지 흡족할리가 없습니다.

     

    4.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른 품꾼들은 오후 5 마지막에 사람의 몫이 많은 때문에 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 일한 사람이 받은 몫에 비해, 자신의 몫이 작다고 여겨지니 견딜 수가 없던 겁니다. 그리고 몫이 작다고 여겨지는 것은 나는 다했음에도 인정받지 못했다고 상실감에서 비롯하는 겁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 20:12

     

    주인에게 불만을 토하고 있는우리에는 오후 다섯시에 사람을 제외한 오전 여섯시, 아홉시, 열두시, 오후 세시부터 일했던 이들 모두가 포함됩니다. 당시 황폐해진 유대사회는 삶이 깨어져 다른 사람의 노예로 전락하게 사람들이 즐비했었습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곳이 없고, 하루 하루가 생존의 투쟁이 되었던 때입니다. 그런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고 보면, 오늘은 포도원 주인의 초대를 받은 사람들 모두 행복한 날입니다. 적어도 어떻게 오늘밤을, 내일 하루를 살아내야하는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그렇습니다. 모두들 만족하며 기꺼이 자신들에게 일자리를 허락해준 주인께 감사했을 겁니다. 어쩌면 오전 6시에 사람을 제외하고는 저마다 조금만 일해도 된다는 생각에 횡재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후 5시가  되어서 포도원에 들어온 품꾼들이 똑같이 자신들처럼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게 되는 순간, 그런 마음들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원망스럽고, 매우 불공정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주인에게 자신들이수고 시간이 인정받지 못했음을 따져묻습니다. ‘수고함이라고 씌여진 헬라어는바로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압박, 부담이라는 뜻입니다. 정당한 몫을 빼앗겼다 생각되는 순간 방금전까지의 고마움은 분노로 바뀌어버렸고, 은혜로 주어졌던 기쁘고 감사했던 시간들이 그저 ‘짐’이나, ‘수고’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사실 이들 중에 누구도 제 몫중에 손해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의, 자기 성취의 욕구가 꿈틀대는 순간부터 우리 마음은 결국 이렇게 ‘지옥’이 되고 맙니다. 사실 이들중에 누구도  몫중에 손해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의, 자기 성취의 욕구가 꿈틀대는 순간부터 우리 마음은 결국 이렇게지옥 되고 맙니다. 

     

    5

    이들은 모두 은총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시간에 일하게 되었다면 오전 6시부터 일을 해야합니다. 그런데 삼시 그러니까 오전 9시부터 이후부터는 모두 뒤늦게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게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늦게 일을 시작하게 된것일까요? 3절을 보면 삼시에 부름을 받은 이들이 주인을 만났을 놀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번역이 적절하지 않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야하는 형편에 놀고 있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놀고 싶어 아무일도 않하는 것과, 일을 하고 싶어도 선택을 받지 못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마지막 오후 다섯시에 주인에게 부름을 받은 이들이 주인에게 전하는 푸념이 그런 생각을 뒷받침해 줍니다.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 20:7a

     

    일을 해야만 하지만! 품꾼으로 선택을 받지 못했던 뿐입니다. 저는 대학생 시절에 일용근로자 알바를 해본 기억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인력시장에서 인부를 선택할 때는 우선은 경력이 많은 사람을 뽑습니다. 젊어도 경력이 없으면 뒤쳐집니다. 다음은 힘이 좋고, 젊은 사람들이 우대를 받습니다. 반대로 나이가 많거나 병들고 연약한 사람들은 선택에서 뒤쳐지기 마련입니다. 사람을 부리는 입장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작업량이 뻔해 보이니 그렇습니다. 씁쓸하지만 작업량, 그에 대한 품삯으로 사람이 평가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공을 칠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책임져야하는 식구들 얼굴을 낯이 없으니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포도원 주인은 자신의 포도원으로 들여보내준 겁니다. 일할 있는 시간은 짧고, 그런 사람들이 있는 일이란 사실상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일을 망칠지도 모를 노릇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그들을 부름에는 사실상 아무런 조건도 없는 겁니다. 뒤늦게 부름을 받은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었을 겁니다. 주인이 분명상당한(합당한) 주겠다고 했으니 하루치를 제대로 채우지 못한 온전하지 못한 품삯을 받을 것이 뻔한 일니다. 일을 하게된 것이야 감사하지만 여전히 식구들이 눈에 밟히고, 어찌 집으로 돌아가야할지 마음이 타들어갔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기대와 달리 일이 마쳐진 뒤에 그들은 모두 온전한 하루치 삯을 받았습니다. 주인이 말했던 상당한 몫은 그들의 일한 양에 비례한 상당함이 아니라, 오늘 거리로 내몰렸던 사람들의 하루의 생명에 상당한 몫이었던 셈입니다. 미국의 경제학자인 휴버먼은자본론이란 책에서 사회주의는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하고일한 만큼받는 것이고, 공산주의는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하고필요한 만큼받는다고 정의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 눈에는 공평하고, 인도주의적이고, 이상적으로도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해주시는 천국은 모든 것을 뒤엎는 나라입니다. 몫을 인정받을 없어 내몰린 사람들이, 필요한 몫을 받을 있는 나라입니다. ‘은혜 주어지는 나라입니다. 비로서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해주시는천국’,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만나게 됩니다. 

     

    6

    우리는 모두 조건없이 주인의 포도원으로 부름을 받은 품꾼들처럼, 오전 아홉시, 열두 , 오후 세시, 오후 다섯 , 아니 사실은 일이 마감되기 바로 직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일할 없어 버림 받았던 이들을 찾아나섰던 것은 바로 주인이었다는 사실은, 천국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내주시는 사건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이처럼 주어진 모든 삶이 실은 하나님의 부름과 초대라는 은총에서 비롯한 것임을, 그리고 그것들이 조건없이 주어져있음을 깨닫게 수록 우리의 삶은 놀라움과 기쁨과 은혜로 충만해질 있습니다. 재물을 팔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나, 바울처럼 죽는 것도 유익하다 여기며 사도로서 맡겨진 이들의 곁을 지켜내는 것들 모두, 능력이나 결단이 아닌 은총이 원동력이 되는 삶에서만 가능한 겁니다. 주님이 사람으로는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애굽에서 벗어나고, 홍해를 건너로, 광야에서 단물을 먹을 있음을 똑같이 경험했지만, 은혜가 보이지 않고 손에 들리워진 것만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위에서 터져나오는 물과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부름과 초대를 받았지만 몫이 합당하지 않다고 불평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말할 없는 감격에 사로잡혀 삶을은혜 가득 채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광야를 뒤덮은 만나처럼 낯설은 하나님의 환대와 은총으로 우리 곁을 찾아오는 법입니다. 나라는 광야 빈들에서 만나를 만났을 때처럼 이해와 납득이 아닌, 오직 은혜를 은혜로 감동할 있는 사람들에게만 능력이 됩니다. 하루의 일당, 하루치의 만나, 일용할 양식에도 감격할 있다면,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생명의 되시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찾아오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놀랍고 넘치는 기쁨에 초대를 받은 것입니까? 애굽에서는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노예입니다. 생명의 떡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매일의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 이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사실을 깊이 묵상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기쁨에 참여하십시오. 그것이 천국을 살아가는 , 죽음을 깨트리고 생명을 이루는 능력의 길로 삼으며 사는 삶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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