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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3/24 사순절 마지막주 * 고난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3. 21. 12:56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이사야 50:4 ~ 9a

      응송 | 시편 31:9 ~ 16

    2독서 | 빌립보서 2:5 ~ 11

    3독서 | 마가복음 14:1 ~ 15:47 혹은 15:1 ~ 39 (40 ~ 47) * 15:33 - 47

     

    # 설교음원

    http://naver.me/5NAtLX58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uUVNDkx7_A0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가야파의 집에서 수난을 당하시다”,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13488

     

    고난받는 노래

     

    # 01

    오늘은 사순절 마지막주 ‘고난주일’입니다 어슴푸레 보이기만 하던 ‘십자가’가 어느새 눈 앞에 분명하고 똑똑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순절의 여정은 여기까지 입니다 그러니 이제 ‘십자가’를 향하여 곧장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돌아서고 말 것인지, 이제 둘 중 하나의 선택만 남았습니다 더 이상 ‘언젠가는’이라는 느긋한 자리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오늘 성서일과 본문은 외면하지 않고 ‘십자가’를 하나님이 제게 주신 길로 받아들이고 나아기로 결단한 이들에게 허락하시는 위로의 말씀으로 주어졌습니다 

     

    1독서 구약본문은 ‘고난 받는 종의 노래’로 알려진 이사야 50장의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안에는 ‘종의 노래’가 네군데 있습니다. 첫번째는 42:1-4절이고, 49:1-7절, 50:1- 11, 그리고 마지막으로 52:13 - 53:12 입니다. ‘종의 노래’들은 모두 바벨론 포로 시대를 배경으로 불리워졌습니다. ‘노래’라고 하니까 낭만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실제의 형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포로기는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서럽고 고통스러운 시절이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 이사야 50:4a

     

    눈 앞에 펼쳐진 포로기 동포들의 현실에 선지자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고달프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영혼을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비참한 현실 앞에서 어떤 말을 꺼내야 할른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학자들의 혀’를 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겁니다. 상대의 처지와 아픔을 남의 이야기로 흘려보내지 않는 선지자의 이런 마음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향해 오늘의 교회가 해야할 역할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말로서 ‘위로’를 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제 일이 아닌 한 ‘빈말’에 그치거나, 상투적인 말 때문에 도리어 상대의 마음을 힘겹게 만드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하나님은 ‘혀’를 구하던 그를 깨우쳐 학자처럼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어주셨습니다. 학자의 영성을 담은 ‘귀’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이유를 묻고, 근원을 살피는 마음을 갖고 싶다는 그의 간절함의 응답인 셈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피상적으로 지나치지 않고, 그의 처지와 상황, 그의 이야기안으로 깊이 들어가 함께 하겠다는 공감의 마음을 하나님이 귀하게 보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저하고 싶은 대로, 제 목적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설득력있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고 들을 수 있는 사람의 말이 좋은 말, 잘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 02

    그의 소박한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해 주셨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셨으므로, 나는 주님께 거역하지도 않았고,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 50:5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응답의 사건을 경험했으니, 이제 그는 말씀에 사로잡혀 누구라도 찾아가서 담대하게 ‘위로’의 말을 전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이어진 6절의 말씀은 우리의 예측에서 벗어난 길로 이어집니다.

     

    나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여도 내가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 50:6

     

    하나님이 위로의 말과 듣는 귀를 허락해주셨으니 이스라엘을 위로하기 위한 그의 길은 하나님이 보내신 길이 틀림 없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그는 지금 사람들로부터 폭력을 당하고, 수염이 뽑히고 침뱉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매우 모욕적인 상황입니다. 게다가 주변에 누구 하나 자신의 편을 들어 옹호해 주지 않습니다.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 공개적으로 핍박하는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떨어진 겁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유대인들을 포로로 끌고 갔던 ‘바벨론’은 포로민들에게 유화 정책을 썼습니다. 재산도 확보할 수 있고, 거주 이전의 자유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관직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바벨론’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던 ‘다니엘’ 같은 이들이 그런 부류입니다.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얼마든지 제국 ‘바벨론’에서 남부럽지 않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종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 인물이 전했던 ‘위로’라는 것은 사실 ‘바벨론’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믿으라는 외침이었습니다. 바벨론에게 순응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길이라고 믿었던 탓에 그는 제국의 요구를 거절했고 그 때문에 불이익을 받게 된 겁니다. 게다가 그를 비난하는 것은 바벨론만이 아닙니다. ‘왜 너만 그러냐?’고 같은 동포들에게도 미운털이 박히고 맙니다. 그리고 결국은 폭력을 당하고, 수염이 뽑히고 침뱉음을 당하는 모욕을 당하는 고초를 겪게 되었던 겁니다.

     

    # 03

    하지만 하나님의 종인 그는 자신을 때리는 이들에게 등을 맡기고, 수염을 뽑는 이들에게 뺨을 내어주고, 침뱉는 이들에게서 얼굴을 피하질 않은 채,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자신의 자리를 지켜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기 때문입니다. 대체 그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이유는 한가지 뿐입니다.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이 길이 하나님이 보내신 길이고, 이런 상황을 피하지 않고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거스르지 않고 받아들인 그에게 감당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 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 50:7

     

    9절에도 언급되고 있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숱하게 우리가 들어왔고 고백해 왔던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기도 많이 하면 무조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는 미신적 신앙으로 치우칩니다. 이런 신앙에 대한 반감 때문에 오히려 그런 일은 없다는 불신에 떨어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마치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제 힘으로 살아가는 일에만 바쁜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탓에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신다’는 이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와닿지 않는 듣기는 들었지만 들리지 않는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 04

    그러나 이 종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런 억울함과 모욕에서 하나님께서 건져 주실 것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자신이 걷고 있는 이 길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으면서도, 지금 내가 처해있는 상황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때문에 억울해 하고 섭섭해 하고 괴로워하는 우리들로서는 그의 믿음이 놀랍기만 합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이들을 도우시는 분이어야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모욕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는 삶을 보고 있노라면 하나님은 그저 방관한 채 도무지 아무것도 하시지 않는 것처럼만 보입니다. 그러니 이런 말씀을 들어도 결국 나만 홀로 비참하고 불우하게 살고, 희생하라는 식으로 들리니 괴로울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대체 하나님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돕고 계시는 걸까요? 

    우리는 또다시 이런 것, 저런 것을 찾으며 주위를 둘러보게 될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개입해서 핍박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벌주거나, 처한 상황이나 문제를 해결해주고, 억울함과 수치를 뒤 바꾸어주는 그런 일들은 보이질 않습니다.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곧 지나가고, 또다시 억울함과 서러운 일들이 삶을 채우게 되됩니다. 인생이란 실제로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실감하는 일들보다는 그렇지 않는 상황과 시간이 훨씬 많고 또 그 만큼 가혹합니다. 이런 우리들이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처럼 잔인하고 폭력적인 삶 앞에서도 오롯한 믿음의 길을 걷기 위해서 필요한 하나님의 도우심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발견한 한 가지 사실 뿐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고 용납받은 삶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겁니다. 

    ‘십자가’는 아무리 보아도 망했고, 다시 보아도 절망인 삶의 처지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 비웃고 조롱한 그곳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당신의 아들로 받아주신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 받는 종의 길에 자신이 없고, 십자가를 따를 용기가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본성안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 보다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더 좋다는 쪽으로 마음이 흘러갑니다. 하나님은 멀고 사람은 가깝고,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지만 세상은 실제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용납받고 싶고, 이 땅에서 그럴 듯하게 살고 싶다는 자기 성취를 향한 욕구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코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 05

    물론 이런 말씀이 여전히 실감나거나 믿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 손으로 붙잡고, 발로 딛고, 눈으로 보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결국은 우리의 손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 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때가 되면 아무리 붙잡고 싶어도 붙잡을 수 없고, 아무리 의지해도 그런것들이 우리의 내일을 지켜줄 수는 없습니다. 이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고 해도 도덕, 윤리 훈련이나, 자기 강화로는 이런 욕망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건 전적으로 그분을 믿는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상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믿음안에서만 가능한 겁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 50:8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이라는 고백은 그런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만 가능합니다. 이 종이 현실의 모욕과 수치를 이겨낼 수 있던 능력,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도우신다’는 이 모든 고백을 가능케 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가까이에 계셨기 때문이었던 겁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전하셨던 ‘하나님 나라 복음’의 전부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도덕이나 윤리적 업적이나, 교양이나 지식이 아니라, 삶을 바꾸어 내고 살려내는 하나님 경험인 겁니다.

     

    복음서 말씀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안에 담겨있는 고난 받는 ‘종’이 가야할 길을 성취하고, 실재의 사건으로 걸어낸 한 인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길인 ‘십자가’로 향하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입니다. 골고다에 세워진 ‘십자가’는 주님이 홀로 짊어지신 곳입니다. 누구도 그와 함께 하지 않고, 세상이 모두로부터 버려진 곳입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모욕과 조롱을 받고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허무로 끝나버린 현장입니다. 성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던 주님은 마침내 오후 3시에 하늘을 향해 피를 토하듯 한 말씀을 쏟아내셨습니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라는 아람어입니다. 번역하면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말입니다. 마치 꾹꾹 참고 있던 서러움이 폭박하듯, 마지막까지 지켜내던 모든 믿음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안타까운 장면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아버지’를 부르는 이 외침이야 말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쏟아낼 수 있는 마지막 말씀은 아니었을까요?

     

    # 06

    ‘고난 받는 종’의 노래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처지’는 그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너나 할 것없이 우리는 모두 모욕당하고 수치를 당하는 똑같은 순간에 이르게 될 겁니다. ‘죽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부러워하고, 저 정도만 되면 살 것 같다고 여겼던 이들도 결국은 운명이 똑같다면, 누구나 똑같이 망하는 운명이라면, 실감이 나질 않든, 받아들일 수 있든 없든 우리가 살 길은, 하나님께로부터 용납받는 그 길외에는 없는 겁니다. 우리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시실에 운명을 걸고 사시다가 십자가 죽음에 내몰리셨습니다. 모두가 그런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고, 하나님이 너를 버렸다고 조롱하던 그 때, 그곳에서 주님은 하나님안에서 죽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의 운명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그리고 하나님이 가까이에 계시며 우리를 돕고 계신다는 사실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능자가 아니라 무능력자입니다. 승리자가 아니라 실패자입니다. 세상에서 칭찬받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하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분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마지막은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 모두는 홀로 절망하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죽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로 떨어지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죽음의 절망을 버텨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선택한 믿음의 삶이 여기에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겁니다. 마침내 그 순간에 이르러,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믿으며 걸어온 우리 운명을 확인받게 될 겁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사라지는 사람의 일이 아닌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신 예수님과 또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하나님에 의해 다시 사신 주님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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