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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4/07 부활절 둘째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4. 4. 20:34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도행전 4:32 ~ 35

      응 | 시편 133

    2독서 | 요한일서 1:1 ~ 2:2

    3독서 | 요한복음 20:19 ~ 31

     

    # 설교음원

    http://naver.me/GWJQmrxN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9DMl2m4uPI8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락방에 나타나시다”, James Tissot

    '부활'이 필요한, 사람들

     

    # 01

    부활절 이후 맞이하는 두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한주간 예수님의 ‘부활’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습니까? 주님의 ‘부활’을 어떤 방식으로 실감하셨는지요? ‘다시 살아나신 그분이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죽은 자들의 세상을 향해 여러분은 어떤 답변을 가지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분명하다면 그분을 만나야 하고, 볼 수 있어야 하고, 경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분명한데, 왜 우리는 이 물음에 쭈볏거릴 수 밖에 없던 걸까요? 

    주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증인들의 이 증언에 문제가 없다면 ‘살아나신 주님’을 만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어야 합니다. 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만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주님은 부활하셨는가’라는 이 물음은 ‘과연 우리는 살아있는가?’라고 바뀌어야만 합니다. 오늘은 이 물음을 쫓아가보겠습니다.

     

    # 02

    부활주간 동안에 읽게 되는 1독서는 구약본문 대신에 ‘사도행전’을 읽게 됩니다. 오늘 1독서로 읽게 된 사도행전 4장에는 놀라운 장면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특히 34절 이후의 본문은 우리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 사도행전 4:34 - 35

     

    제 입을 채워야만 한다는 욕망에서 벗어나 ‘함께’ 살아가야하는 소중한 대상으로 타자를 대할 수만 있어도, 오늘 지구촌 곳곳을 멍들게 하는 갈등과 폭력, 전쟁은 멈추어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누가’가 소개하고 있는 초기 교회 공동체의 이런 모습은 꿈만 같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런 멋진 신앙의 선배들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신앙인들은 곧장 이들을 본받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수 있는 것은 우리들 뿐이라는 생각에 쉽게 떨어지곤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의 밑바닥에는 ‘세상은 악하고 우리는 선하다’는 오만함이 깔려 있을 뿐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그치면 결국 ‘탐욕을 버리고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자’거나, '이런 교회 공동체를 이뤄보자’는 식으로 말씀을 읽을 수 밖에는 없습니다. 기특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에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결단만으로 과연 세상이 천국으로 바뀔 수 있을까요? 아니, 애당초 우리 안에 그렇게 살아갈 능력이 있을까요?

    실제로 역사안에는 이런 식의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시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그랬고, ‘자본주의’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철학, 교육, 종교, 제도들의 목적도 결국은 다 똑같습니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이상에 그칠 뿐, 우리의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언제나 세상은 권력과 특권을 움켜쥔 이들의 전유물이 될 뿐입니다. 모두가 함께 평등하게 나누며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루어보려던 소박한 시민운동도 다를 바 없습니다. 어느 순간에 이르면 섭섭해서, 억울해서, 자신만 손해보는 것 같아서, 애당초의 선한 목적은 기억조차 하지 못할 만큼 소원해진 관계로 인해 날선 상처만 남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안에서 ‘이런 식으로 살아내보자’고 요구하거나 ‘그렇게 살겠다’는 식의 결단들이 반갑지가 않습니다. 나눔과 섬김, 내것을 내어주는 도움이라는 것도 늘상 우리끼리, 교회안에서라고 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덜 귀하고 덜 사용하고 덜 쓸모있는 것을 나누고, 더 좋은 것 더 귀한 것으로 섬김을 받고 싶어하는 우리는, 결국 타자를 향해서는 언제나 슬그머니 ‘조건’을 붙이고 맙니다. 뿐만 아닙니다. 채우고 남을 만큼 가지고 있어도 여전히 더 가지려고 들고 더 소유하려는 탐욕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어쩌면 ‘누가’가 기록한 오늘의 본문도 사실은 초기 교회가 이런 공동체적 삶을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런 바람을 남긴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느 편이 되었든, 이 질문은 꼭 해야겠습니다. 본문안에 있는 이런 삶은 과연 가능할까요?

     

    # 03

    1독서 본문에서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는 32절부터 35절까지의 사이에 끼어있는 33절에 있습니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 사도행전 4:34

     

    이 모든 상황을 가능케 해주는 것은, 바로 성도들 모두가 받았다는 ‘은혜’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뭔가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이루거나 얻는 것을 생각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은혜’는 ‘하나님 경험’을 뜻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상대화됩니다. 죽고 사는 문제처럼 여기던 것들도 그때부터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었도 그만일 만큼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그러니 ‘은혜’를 받으면 넉넉하고 풍성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저 쓰는데 부족함이 없고, 붙잡고 있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한 마음을 가지게 되면, 그때부터는 억지스럽게 힘을 쓰지 않아도 남에게 나누고 베푸는 것이 훨씬 여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아름다운 나눔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된 것은 사도들이 예수의 부활을 증언한 이후부터였습니다. ‘부활’이 사도들에게 건네들은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이며 사건으로 경험되자 사람들이 욕망과 본성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런 자유를 누립니다. ‘부활’은 듣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 예수를 부활시킨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는, '하나님 경험’ 즉 ‘은혜’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제자들을 찾아가셨던 예수님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이 사실을 더 분명히 알 수가 있게 됩니다.

     

    복음서 19절은 ‘그날 곧 주간의 첫날 저녁에 …’ 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던 바로 그날 저녁에 있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문을 걸어잠그고 골방에 숨어 들어가있던 있던 제자들은 이미 이날 이른 새벽에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 제자들의 모습은 마치 깨어 무덤으로 달려가 예수 부활을 경험했던 여인들과 달리, 여전히 깊은 잠에 떨어져있던 세상과 무척 닮아있습니다. 주님의 빈자리는 늘 그렇습니다. 제 아무리 대단한 것들이 있어도 주님이 계시지 않은 곳에는 ‘두려움’만 가득합니다. 제자들이라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 주님이 그들 사이에 나타나셨습니다. 먼저 적막을 깨트렸던 것은 두번이나 같은 인사를 건네셨던 주님입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이 한마디 말씀이 떨어지자 마치 암전이 끝나고 새로운 막이 오른 연극 무대처럼, 이제 방안의 분위기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함께 있었지만 주님이 계시지 않아 냉랭하게 얼어붙었던 그들 사이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 04

    저는 본문을 읽을 때마다 ‘평화’의 반댓말은 ‘평화 없음’이 아니라 ‘두려움’ 이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두려움에 떨어진 사람은 늘상 자기 안으로만 구부러질 수 밖에는 없고, 불안한 자신만 들여다보니 더욱 어둠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두려움’의 망령에 사로잡히게 되면 상대가 나를 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호의를 베푸는 상대에게도 가시를 들이밀기 일쑤입니다. 그런 떨어진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경계의 문을 열라고 해도 윽박지름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통해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평화’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시는 ‘평화’는 무엇일까요? 요한은 ‘평화를 전한다’는 주님의 말씀에서 유대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샬롬’이 아니라, 헬라어 ‘에이레네’를 사용합니다. ‘에이레네’도 ‘평화’라는 뜻을 담고 있지만, ‘샬롬’을 사용할 때와는 전달되는 의미가 남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본래 ‘에이레네’의 뜻은 ‘결합’, ‘하나됨’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주님께서 전하신 ‘평화’는 당신과의 사이가 깨어져버린 제자들과 기꺼이 하나가 되어주시겠다는 마음인 겁니다. 두려움에 길을 잃어버린 제자들이 있어야 할 곳, 주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는 것이 바로 주님이 전해주시는 ‘평화’인 겁니다. 

    십자가 죽음앞에 내몰린 자신을 버리고 저 하나 살겠다고 꽁무니를 뺀 비겁한 이들을 주님은 결코 책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등지고 또다시 디베랴 바닷가로 떠나버린 사도 베드로를 찾아내셨을 때에도 주님은 꾸짖음 대신에 그의 아픔과 부끄러움, 상처를 부드럽게 끌어안아주셨습니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며 내미셨던 주님의 손이 제자들을 덮고 있던 두려움을 몰아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평화’를 통해 배우십시오. ‘평화’는 언제나 먼저 손내미는 용기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제자들과 한몸 되어주고 싶어 당신과의 관계안으로 불러주신 주님의 따듯한 초대를 통해, 비로서 제자들안에서 기쁨이 시작되었습니다. 1독서 사도행전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의 모습도 여기로부터 시작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이처럼 ‘부활’을 경험한 이들에게 주님은 부탁을 남기셨습니다. 23절입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 요한복음 20:23

     

    ‘부활’하신 주님이 하시는 일도,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하고 그분을 따르는 이들에게 주어진 일도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손내밀어 ‘평화’를 회복시켜주셨던 것처럼, 제자들도 먼저 손내밀어 ‘용서’해주는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일 이후에 제자들이 삶을 걸고 부활하신 주님의 복음을 전하며 나아갔던 전도의 모든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과의 사이의 평화를 이룸으로, 서로가 평화하는 세상, 자기 자신과도 평화한 인생을 살도록 해주기 위함입니다. 

     

    # 05

    본문은 여기에서 끝이 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후에 덧붙여진 ‘도마’의 이야기는 어찌보면 불필요해 보입니다. 성서학자들은 ‘도마’ 이야기가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덧붙여진 대목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 ‘도마’는 사실 교회와 성도인 ‘우리’ 자신을 뜻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하고 읽어야 합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 요한복음 20:29b

     

    주님은 도마에게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부활’에 관한 복음을 듣고 신앙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지도,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런 터 위에서 주님을 따라야만 하는 우리를 위해 손 내밀어 주시는 주님의 ‘위로’와 ‘격려’인 셈입니다.

    ▲헨드릭 테르브루그헨(Hendrick ter Brugghen), 1622.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 요한복음 20:31b

     

    요한은 예수 부활의 소식을 전하려는 목적을 덧붙이면서 서둘러 본문을 마칩니다. 이제 함께 생각해 봅시다. 과연, 예수 부활 사건은 무엇을 위해 일어난 사건입니까? 예수 부활 사건은 누구를 위한 일입니까? 예수 부활 사건의 핵심은, 어떤 사람들의 논쟁처럼 주님이 이천년전 십자가에 달리셨던 모습 그대로의 육체를 입고 살아났는지 아닌지에 있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심지어는 ‘주님이 다시 사셨다'는 사실 마져도 핵심은 아닙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 고린도전서 15:13 

     

    사도 바울은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도 다시 사시지 못하셨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죽은 것처럼 살던 이들만 있었더라면 예수 부활의 소식은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도 여러분, 정직하게 답변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부활하셨어도, 그 부활의 생명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복음을 전하고도 정작 나 자신이 내침을 당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입니까? 바로 그 점에서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겁니다. 사도 요한도 2독서인 서신서에서 똑같은 말로 결론을 맺습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니, 우리 죄만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 요한일서 2:2 

     

    ‘복음’은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시작은 ‘나’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않됩니다. 내가 다시 사는 ‘부활’ 생명을 얻지 못했다면, 내가 ‘죽음’을 이기는 ‘부활’을 능력으로 실감하며 살아갈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성경은 그런 ‘부활’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주님’과의 사이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부활’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셨던 것처럼, 그의 자녀된 우리 또한 다시 살려내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살아간다면, 예수는 부활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는 우리가 그 믿음으로 죽음의 위협을 거스르며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 죽으셨고, 또한 다시 사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우리의 믿음안에 이미 부활하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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