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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3/31 부활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3. 27. 18:07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도행전 10:34 ~ 43 혹은 이사야 25:6 ~ 9

      응송 | 시편 118:1~2, 14 ~ 24

    2독서 | 고린도전서 15:1 ~ 11 혹은 사도행전 10:34 ~ 43 

    3독서 | 요한복음 20:1~ 18 혹은 마가복음 16:1 ~ 8

     

    # 설교음원

    http://naver.me/xkIGJYgk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uYojHk6QAzw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Francesco Hayez,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죽음'을 멸하신, 하나님

     

    # 01

    1독서 본문인 구약본문은 자기 백성들에게 고통과 슬픔으로 지나왔던 시간에서 건져내어 풍성한 잔치로 초대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을 영원히 멸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이제 다시는 이민족들에 의한 ‘죽음’의 공포로 내몰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부활절 아침에 어울릴 만큼 놀라움과 기쁨으로 가득찬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미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민족인 ‘앗수르’에 의해 망하였고, ‘유다’ 역시 ‘바벨론’에 의해 초토화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주셨던 약속대로라면, 이 땅을 빼앗기거나 망할 일 따위는 애당초 있어서는 않됩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모든 서러움과 죽음의 공포는 끝났다’는 예언자의 말이 유다 백성들에게 들릴리가 없습니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하나님이 이 백성에게 하셨던 약속은 거짓이었던 걸까요? 혹시 철썩 같이 믿고 있던 그 하나님께서 어디로 훌쩍 떠나 버리셨거나, 그도 아니면 주무시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마치 이런 현실을 방관하시는 듯한 하나님께 해명을 요구하는 우리와는 달리, 오히려 한결같이 하나님의 무죄?를 변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실을 꿰뚤어 보았던 선지자들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신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책임은 고스란히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에게로 돌아갈 수 밖에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언자들의 책임 추궁에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믿지 않았느냐?’고 항변합니다. 맞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적은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하나님만’ 믿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만 믿는 믿음에서 실족한 것은, ‘하나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나안’에 들어선 이후로는 상황이 급반전 하게 됩니다. ‘바알’과 ‘아세라’, ‘몰렉’ 같은 우상을 믿고 있던 이민족들은 날로 강성해 가고 있지만, 자신들의 모습은 초라해 보이기 그지 없습니다. 스멀스멀 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들고, ‘오늘’은 온통 불안으로 가득차기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내일’을 약속하고 계실 뿐, 정작 살아내야 하는 ‘오늘’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내일’은 장담할 수가 없다는 불안감이 밀려들고,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언가 더 분명하고 자극적인 것들을 필요로 하게 될 수 밖에는 없던 겁니다. 그때 그들의 눈을 사로잡았던 것이 이민족들의 풍성한 오늘을 채워주고 있는 ‘풍요의 신들’들이었던 겁니다. 결국 그들은 우상숭배의 유혹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도’ 믿었습니다. 예언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 02

    예언자들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은 절망 뿐이었습니다. ‘하나님만’ 믿는 일에 실패한 이스라엘은 생명을 지키고, 평화를 지켜내는 일에 끊임없이 실패할 것이 뻔합니다. 하지만 이건 비단, 이스라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로, 인류는 늘상 하나님을 배신하는 악을 반복해 왔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다 함께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생명의 말씀을 근거 삼아 살아가지 않는 한, 지금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고 벗어난다고 해도 결국 이런 세상이라면 망하고 말 겁니다. 이민족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짓밟히는 것을 두눈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던 예언자들의 눈에 세상은 온통 그런 식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회개와 회복을 요구하던 그들의 예언이 점차 하나님께서 부패하고 악한 이런 세상을 두고 보실리가 없다는 심판과 파멸의 이야기로 치닫게 되었던 겁니다. 과연, 예언자들의 통찰이 지나쳤다거나 편협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역사와 현실을 꿰뚫어보았던 예언자들의 ‘묵시’가 차마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소망은 보이질 않습니다. 사람에게서도, 나라에게서도, 그리고 그것은 인류 전체를 아울러 보아도 마찬가지 입니다. 더 나은 날, 더 나은 세상은 오지 않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독’을 쏟아내듯 ‘차라리 이런 세상이라면 망해 버려라’는 말로 억울한 마음을 쏟아내는 이들도 많습니다.

    거짓이 진실이 되고, 불법한 이들이 정의의 사도로 둔갑하였고, 탐욕을 채우기 위해 부를 쌓아 올리며 살아온 이들이 세상을 걱정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길로부터 돌이켜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하는 목사들이 권력과 이권, 그럴듯한 위세 앞에서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비굴한 꼭두각시로 전락해 버린 모습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부자들의 부가 쌓여 갈수록 한 끼의 식사 때문에 죽음에 내몰리는 가난한 이들의 의미없는 죽음은 외면받고 있습니다. 평화를 말하는 이들이 살인 무기들을 만들어 내고, 지구촌 곳곳마다 전쟁은 끊이질 않습니다. 지구 생태계가 극심한 위험앞에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이윤을 얻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는 기업들이나 편리함을 포기할 수 없는 개인들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 일말의 도덕적 아픔도 느끼지 않은 채 함께 살아가야 하는 땅을 파괴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의 날이 얼마나 더 오래 갈 수 있을까요? 이런 우리들의 세상이 망하지 않아야 할 타당한 이유나 근거를 찾아 낼 수 있겠습니까?

     

    # 03

    그러나 비록 폭력과 불법으로 얼룩진 암울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보복이라고 하는 ‘묵시’를 전해야만 했지만 예언자들은 결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두가 절망하는 그 때, 우리 차원에서의 모든 기대와 소망이 무너진 그곳에서 그들은 훨씬 근원적인 차원에서의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만 가져다 주실 수 있는 구원입니다. 바로 거기에 이스라엘의 소망과, 인류의 내일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 궁금합니다. 보통의 경우에 이런 극심한 고난이나 절망에 떨어지게 되면 모든 것을 포기하기 마련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 계속되면, ‘신앙’도 무기력해 집니다. 그 동안 우리가 믿던 ‘하나님’이 예언자들이 전하고 있는 ‘하나님’과 다른 분이 아닐 텐데, 대체 그들은 무엇을 보았던 걸까요? 

     

    구약 본문의 핵심 구절은 8절입니다. 

    주님께서 죽음을 영원히 멸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말끔히 닦아 주신다. 그의 백성이 온 세상에서 당한 수치를 없애 주신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 8절

     

    비록 극심한 고난이나 역경, 처절한 가난 속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결국 ‘모든 죽음의 힘'을 무너트리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말씀이 실감이 나시나요? 예배의 자리가 아닌, 지금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는 삶에서, 우리가 함께 직면하고 있는 오늘에 말입니다. 이런 말씀을 막연하게 아는 것은 ‘삶’에 아무런 도움도 되질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신앙에 익숙해지게 되면 그저 언젠가 죽은 이후에나 ‘천국’에 가게 될 것이라는 내세적 신앙으로 스스로를 자위하거나, 아니면 맹목적인 사이비 신앙에 떨어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런 신앙은 ‘죽음’의 힘에서 벗어난 ‘오늘’을 살아가게 해줄 수 없습니다.

     

    # 04

    이스라엘의 현실은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달리 ‘죽음’의 힘이 여전합니다. 무너질 것 같은 조짐조차 보이질 않습니다. 지금도 ‘죽음’은 막강한 힘을 과시하며 인류를 두려움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굳이 바다 건너 전쟁의 포화속에서, 혹은 가난과 질병에 의해 생과 사의 갈림에 내몰린 이들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오늘도 이 땅에는 여전히 죽음 때문에 서럽고, 억울함과 절망 때문에 흐르는 눈물이 마르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제 아무리 대단한 것들을 이루고 얻었다고 해도, 누구도 예외 없이 우리는 모두 무방비 상태로 찾아오는 죽음앞에 서게 되고, 번개처럼 허무와 두려움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죽음의 세력은 여전히 세상을 움켜쥐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 설교를 들을 때, 예배의 자리에서는 ‘아멘’이 되었는데, 마주하게 되는 현실에서는 선지자가 전했던 묵시는 ‘헛된 망상’이나,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심리적 위안 따위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을 향한 세상 사람들의 조롱 앞에서 정직한 답변이 궁색해 집니다. 죽은 자는 살아돌아올 수 없고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면, 혹시 우리가 헛된 꿈과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는 오늘 이 아침, 마치 예언자의 상상 정도로만 보이던 ‘묵시’가 신화나 환상에서가 아닌, 인류의 구체적인 역사안에서 실현되었던 한 사건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부활’입니다. 예, ‘부활’ 자체가 터무니 없게 들리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경험이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헛것을 본 것이 아닐까 의심했고, 부활하신 주님을 당연히 동산지기일 것이라고 여길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일이, 어느 한 여인에게, 몇몇 제자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여러 제자들에게 경험되었다는 겁니다. 공생에 기간 예수님을 직접 뵌 적이 없던 사도 ‘바울’도 주님의 부활을 경험했고,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했던 수 많은 성도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어떤 이들에게는 들리고 경험되는 ‘사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깨닫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은 하나님께서만 가져다 주실 수 있는 일, ‘죽음’을 멸하시는 그 일을 바로 지금 이 시간에도 하고 계십니다.

     

    # 05

    초기 교회 안에서 전해진 예수 부활에 관한 ‘빈 무덤’ 이야기는 결코 광신이나 미신이 아닙니다. 예수 부활의 이야기를 듣고, 말하고, 기억하고, 그 이야기에 참여한다는 것이 반대로 지적 살인이나 자기 강화에 머무는 일도 아닙니다. ‘부활’을 전하는 증인들의 증언은 죽음이 이길 수 없는 ‘생명’이 있다는 사실과, 우리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내신 생명 사건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트여야만 한다고 가르쳐줍니다. 어떤 형태로든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부활 경험이 그들에게 진실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죽음’을 완전히 멸하셨다는 ‘이사야’의 묵시 또한 적어도 그들의 증언안에서 이미 이루어졌음은 분명합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오늘의 현실에서는 여전히 죽음은 그대로인 것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더 기승을 부리는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천년 전 예수의 부활이라는 것이 결국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 아니냐?’는 조롱에 주눅든 채 회의에 떨어지겠습니까? 아니면 무턱대고 그래도 예수는 부활하셨다고 외치시겠습니까?

     

    주께서 부활하셨던 그날의 날 아침, 여전히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죽음처럼 잠들어 있던 이들처럼,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은 믿을 수 없다고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그날 새벽, 한 여인과 제자들은 이 놀라운 사건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그리고 언제나 어떤 이는 보고 어떤 이는 보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듣고 또한 어떤 이들은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늘상 이런 식입니다. ‘부활’은 그런 식으로 밖에는 경험할 수 없는 일인 겁니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 요한복음 20: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마라고 금하신 까닭이 이 때문입니다. ‘아버지께로 올라가신다는 것’은 만유 가운데 ‘그리스도’로 세움을 받으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부활’의 사실이나 ‘주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온전히 드러날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겁니다. 오직 그 날, 약속하셨던 ‘종말’의 때가 되어야 비로서 만천하에 드러나고 모두가 알게 되는 일인 겁니다.

     

    # 06

    ‘부활’이 신화로 전락해 버리고, ‘죽음’을 멸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에 익숙해진 탓에, ‘부활’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죽음을 이기고 살아가는 길이 열렸다’는  환희가 아니라, 얼마나 믿을 만하고 객관적이고 입증할 수 있는 가라는 의심에서 좀처럼 벗어나질 못하고 맙니다. 여전히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증거를 찾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증인’들의 ‘증언’외에 ‘부활’에 관한 증거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부활’이 객관적인 증거가 부족하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이들에게만 경험된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제 ‘부활’에 대한 증언을 들은 우리에게는, 누구에게나 들리고 보이게 될 종말의 날까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부인하며 살던가, 기독교 신앙으로 살아냈던 증인들이 예수의 ‘부활’을 통해 경험했던 고유한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든가 두가지 중에 하나의 선택만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생명을 엿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이런식의 믿음과 통찰이 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다 못해 습관 하나를 고치거나 외국어나 악기를 연주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도 숱한 시간, 마음을 담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것은 ‘하나님’입니다. ‘부활’이나 ‘영생’은 우리의 열심이나 노력으로는 얻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에 온 마음을 집중하십시오. 죽음을 물리치는 ‘부활’의 능력을 살아내기 위한 다른 길은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서 걸어간 증인들은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예수 ‘부활’의 경험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여러분도 오직 그 일에 힘을 다해 ‘구도 정진’하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은 ‘살아 있는 자’로 불러내시는 하나님께 잇대어 죽은 자들의 세상을 가로지르며 살아가는 그런 이들을 찾아가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전히 ‘죽음’이 위세를 떨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허상일 뿐입니다. 겨울 바람이 제 아무리 매섭다고 해도, 드리워지는 봄볕에 녹아내리기 시작한 개울물을 막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에게는 겨울 바람에 내몰린 이들에게 전해진 봄 바람처럼, 하나님께서 ‘죽음’을 멸하셨다는 ‘부활’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죽음’은 이미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는 다시 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내셨으니, 이제 죽음의 세력은 영원히 무너졌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통해, 이미 우리 안에서 ‘영원한 생명 사건’, 죽음을 멸하신 하나님의 승리는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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