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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4/28 부활절 다섯째 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4. 25. 16:50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도행전 8:26~40

      응송 | 시편 22:25~31

    2독서 | 요한1 4:7~21

    3독서 | 요한복음 15:1~8

     

    # 설교음원

    http://naver.me/5oXgLXKf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vMP-ndyf8Mo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Gerrit Claesz Bleker (circa 1593 –1656), Philip Baptizes the Moor, The Yorck Project (2002)

     

    우리가 '복음'을 들었다

     

    # 01

    사람은 늘상 ‘행복’한 꿈을 꾸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행복을 갈망하는 것을 보면, 오히려 지금의 우리는 그 만큼 행복하지 않다는 말일지도 모르겠군요. 과연 우리는 언제 ‘행복’을 경험하거나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요? 대체로 사람들은 무언가 결핍되고 부족하다는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리게 될 때, 또는 그런 상황에 떨어지게 도면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부족함이 없는 충만을 경험할 수만 있다면, 적어도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게 될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어있는 속 사람을 만족시킬 방법을 찾느라 너나 할 것 없이 그리고 언제나 열심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멈추어지지 않는 우리의 모든 수고가 결국 나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일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애당초 이 땅에서 ‘충만’을 경험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전히 세상 뿐만 아니라 우리의 바쁜 걸음도 멈추어지지 않고 있으니, 자신을 채우기 위해 힘겹게 달려왔던 걸음이 실패했다는 이보다 분명한 증거는 없을 겁니다. 우리는 끝이 없을 만큼 가질 수도 없거니와 아무리 가져도 부족하다는 허무와 결핍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닙니다. 비록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지만, 대신에 만족감을 키우는 방식으로 충만을 경험할 수는 있습니다. 실제로 억만금을 쌓아 두고도 불안과 염려로 떨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끼의 식사만으로도 사람은 얼마든지 행복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남들이 가지고 있지만 지금 나는 가지고 있지 않고 누리지 못하는 것들을 향한 욕망을 줄이고, 그런 욕망을 부추기는 것들로부터 벗어나면 되는 겁니다. 하지만, ‘비교’와 ‘경쟁’으로 작동하는 이 시대를 거스른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겠지요.

     

    # 02

    남들보다 더 많이 ‘채워야만 한다’는 ‘강박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마치 지구가 끌어당기는 인력을 벗어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는 ‘죽음’에 삼키워지고 말 것이라는 극심한 공포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고, 무언가 잘 될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쉽게 사로잡히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물에 빠진 사람이 자꾸만 살아보겠다고 허우적거리듯, 무언가라도 해야한다는 강박과 조급함에 내몰리게 됩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겠다는 생각, 망하지 않고 살아있음을 확인받고 싶은 생각만 가득이 우리 삶을 이끌고 가게 됩니다. 학생은 최선을 다해 좋은 성적을 받고 바라는 대학에 들어갈 때 만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겁니다. 운동선수들의 경우는 목표를 이루고 승리를 얻을 때, 기업들은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식으로, 정치인들이라면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살아있음을 확인받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곧장 다시금 살아있어야 한다는 강박에 내몰릴 뿐입니다. 자꾸만 더 큰 성공, 더 자극적이고 강렬한 성취를 추구하게 되고 그게 뜻대로 되지 않게되면, 이전까지 매달렸던 것들이 송두리째 무의미하고 거추장스러운 실패로 여겨질 겁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이 망하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하는 조급함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내일을 염려할 필요가 없는 만족과 기쁨을 경험하고, 아무리 채워도 채울 수 없던 것들에 매달리던 수고를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길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풀어주시는 ‘영생’을 얻는 것 뿐입니다. 왜냐하면 허무와 결핍, 염려와 근심, 막연함과 두려움 같은 것들이 사실 ‘죽음’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죽음’이 침범할 수 없는 ‘영생’만이 답이 될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우리는 모든 비어있는 것을 채우고도 남을 충만한 ‘생명’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어주셨다는 복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아무리 채우려 들어도 늘 비어지는 허무한 수고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믿음으로 살아가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영생을 얻는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이 길이 맞다면, 믿음으로 살아가는 길만이 충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영생’의 충만을 가져다 주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말씀을 통해 우리는 기쁨과 평안, 행복을 경험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 03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말씀과 율법, 그리고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 조차도, ‘죽지 않으려면 무언가를 해내야만 한다’는 이전의 방식으로 들으려고만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기쁨이 있고 희망이 솟아오른 것 같은데, 말씀을 따르며 산다는 것이 자꾸만 버겁고, 말씀에 무관심하고 무덤하게 살아가는 일을 반복할 뿐입니다. 말씀과 무관하게 다시금 제 힘으로 자신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삶으로 돌아가버리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 먼저 하나님께서 ‘복음’을 주신 목적과 본질로 돌아가봅시다. 오늘 1독서 사도행전 8장의 말씀은 예루살렘 교회의 집사였던 ‘빌립’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가 ‘세례’를 베풀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교회의 직분인 ‘집사’가 아니라 사도들 만큼의 권위를 가진 지도자였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서 복음을 전하다 남쪽으로 내려가던 길이었고, 그 와중에 예루살렘에 올랐다가 돌아가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재정을 관리하는 내시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가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다는 것을 보면, 아마도 ‘유대교’인이었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여튼 이 길에서 마주치기전까지 그들은 서로의 존재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곳에서 ‘빌립’ 집사와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내시는 세례를 받고 기독교 역사안에서 첫번째 이방인 신자로 기록되게 됩니다. 이런 놀라운 결실을 보면서, ‘누가’는 이 두 사람의 우연처럼 보이는 만남이야 말로 ‘주의 천사’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느냐고 쓴 겁니다. 그러니까 성서기자들의 이런 말씀이 사실적으로 받아들이라고 쓴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바라보는 합리적이고 타당한 신앙적 근거를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읽어야 하는 겁니다. 여튼 이 본문에서 핵심은 성령이 직접 말씀하신다는 것인지 아니면 ‘빌립’집사가 성령충만한 사람이었는지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은 앞으로 펼쳐질 사도행전 전체의 방향을 보여주는 단서가 됩니다. 그것은 바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겁니다. 이후로 베드로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건이 이어지고, 바울을 통해 곳곳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전해지는 사건이 이어질 겁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빌립은 입을 열어서, 이 성경 말씀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 35절

     

    빌립은 내시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고,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니, 주님의 영이 빌립을 데리고 갔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기쁨에 차서 가던 길을 갔다.’ | 39절

     

    ‘복음’을 전해 들은 내시는 ‘기쁨’에 차서 길을 나섰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으로 비롯하는 일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하는 이에게도, 전해 듣는 이에게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쁨’이며, 기뻐할 수 없는 삶, 기뻐할 수 없는 시대에 갇혀 있는 모든 이들의 삶을 건져올리는 하나님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으시나요?

     

    # 04

    이 말씀을 토대로 2독서 사도 요한이 써보낸 첫번째 편지를 읽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던 지난 주일 읽은 내용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오늘도 본문을 읽는 우리 마음은 ‘감히 실천할 수는 있을까?’ 잔뜩 주눅이 들고 맙니다. 하지만, 섣불리 낙담하지 마시고 천천히 말씀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계시고, 그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 요한1서 4:15

     

    사도 요한은 먼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말로 신자의 ‘믿음’을 ‘사랑’과 연결시켜줍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 19

     

    나와 너, 우리 모두가 사실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동일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다는 사실은, 그 사랑안에서 어떠한 차별함 없이 우리는 모두 동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해줍니다. 같은 믿음안에 있는 이들만이 같은 주님을 고백할 수 있듯, 같은 주님의 사랑안에 거하는 이들 안에서 동일한 사랑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은 마땅하고 자연스러울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 요한1서 4:20

     

    무엇이든 그 사람안에서 흘러 넘치는 것이란, 그 안에 담겨져있던 것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말’도 말하고 있는 그 사람의 평상시 생각을 뛰어넘을 수 없고, 드러나는 행동이나 방식이라는 것도 평상시 그 사람의 가치관을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이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안에 있는 사람안에서 결코 ‘미움’이 흘러나올 수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형제 자매를 향해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미움이 흘러가고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이 생각에 미치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다시금 믿음에서 파산할지도 모른다는 위태로움에 내몰릴지도 모릅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모든 것이 무너지고 다시금 원점으로 떨어진 기분입니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안에 있는 사람들일까요? 하지만 요한이 전한 말씀안에서 주는 ‘하나님 사랑의 충만함’이고 그에 따른 결과는 ‘미움’이 없는 삶입니다. 

     

    # 05

    이제 복음서 말씀을 읽어봅시다. ‘포도나무’ 비유로 유명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 15:8

     

    이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시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열매맺는 것일까요, 제자가 되는 것일까요,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일까요?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주시기 위해 이 비유의 말씀을 시작하셨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시선은 늘상 ‘열매’맺는 열심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정작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받으시는 ‘열매’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열매많이 맺는 성도가 되어야한다는 조급함과 강요로만 내몰리고 맙니다. 과연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이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 요한복음 17:1

     

    예수님은 앞서 하나님께서 오직 아들이신 주님을 통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것만을 ‘영광’으로 받으신다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당연합니다. 세상을 다 가지고온다 해도 하나님은 그런 것들로 만족하시거나 영광을 받지 않으십니다. 세상 보다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이든 주님의 이름안에 머물러야만 하는 이유,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주님이 가르쳐주시려는 내용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요한복음 15:5

     

    우리는, 주님안에 있을 때만 주님을 통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 그의 구원을 알고, 그의 구원안에 동참하는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으시는 ‘영광’이고 우리에게 주어진 ‘열매’인 겁니다.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전도 많이 하고, 교회생활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방식으로 우리도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위와 생명과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열매’인 겁니다. 오직 복음이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06

    바울은 우리 각자의 삶이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이 아닐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선물은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와 무관하게, 우리 마음을 기쁘고 흥겹고 설레이게 해줍니다. 문제는 각자에게 주어진 삶과 인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불안해 하고 염려하며 살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것도, 그 생명을 선물로 받았다는 사실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당연한 결과들입니다. 어쩌면 지금도 이런 말씀이 뜬구름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안에 거한다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믿으며 산다는 말이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장 하나님으로부터 선물처럼 받은 생명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감격하며 살아가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그분의 운명안에서, 아무리 참혹한 운명에 떨어진 사람이라도 값없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비록 결핍과 비어있음과, 박해나 곤고함, 가난이나 어떤 상황에 내몰려 있어도 충만한 선물을 받은 이처럼 만족하는 기쁨으로 살 수 있었던 겁니다. 무엇이 더 큰 기쁨이고, 무엇이 본질적인 기쁨인지를 헤아릴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안에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수지 맞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겁니다.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고도 백 데나리온의 빚을 추궁하던 어리석은 사람은, 윤리 도덕적으로 배은망덕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죽음을 가로막은 은혜가 주어졌는데도 여전히 내일의 먹을 것 때문에 염려하는 어리석은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를 하나님께서 잘라버리시겠다’(2절)고 하시지 않았느냐고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열매는 보이지 않고, 앞으로 맺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 사실만 기억하십시오.

    당신안에 거하면 맺게 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결실이라는 것이, 결코 전도 많이 하는 것이나 헌신하는 것,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온전해지고 흠없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오직 형제 자매를 서로 사랑하는 한가지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릴 수 있는 열매라는 겁니다. 다르게 말씀드리면 우리가 주 안에서, 주님을 통해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뜻하시고 바라시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물론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란 본래 사람안에서 나오지 않고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없지만, 사랑이신 주님안에 거하면 그분이 우리를 세상을 평화하게 하는 사랑의 사도들로 빚어주실 겁니다. 이게 바로 비유의 말씀을 통해 주신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교우 여려분,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 때문에 절망하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러므로 우리안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십시오. 자신이 아닌 주님이 하실 일을 지켜보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사람은 이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 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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