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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5/05 부활절 여섯번째 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5. 1. 18:28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도행전 10:44~48

      응송 | 시편 98

    2독서 | 요한1 5:1~6

    3독서 | 요한복음 15:9~17

     

    # 설교음원

    http://naver.me/5K5xxLkT = '클릭' 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_JtiOab_VeI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바렌트 파브리티우스(Barent Fabritius, 1624-1673)  "Peter in the House of Cornelius "

    '사랑함'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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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1독서 본문은 지난 주일 함께 읽었던 사도행전 8장의 말씀에서 읽었던 ‘빌립’과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가 사도 ‘베드로’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로 바뀌었을 뿐, 서로가 무척 닮아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내시’나 ‘고넬료’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보면 전형적인 ‘이방인’들임에도 주된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시다시피 성서기자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물론 주님도 유대인이셨지요. 유대인들은 할례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방인들을 매우 꺼려했습니다. 밥상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부정하다는 생각했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그들이 살아온 역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방인들에 의해 이스라엘은 죽임을 당했고, 성전은 무너지고, 나라가 망했던 기억이 쉽게 지워질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도행전을 기록한 성서기자가 유독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는 것은, 그 만큼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이 매우 이례적이고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본래 사람들은 누구나 ‘낯설음’을 꺼려합니다. 낯설은 장소에 가는 것도 불편하고, 자신의 영역안으로 낯설은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싫어합니다. ‘낯설음’은 자신이 확보하고 있는 평안을 깨트릴 위험이 될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채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해야만 안정감을 가지곤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사도행전이 기록되던 이 당시에 교회는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유대 전통을 따라 살던 그들에게는 이방인을 대한다는 것은 여전히 어색하고 낯설고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전해지면서 교회안으로 ‘이방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겁니다. 내심 외면하고 싶은 꺼리낌을 지울 수 없지만, 복음을 전해야만 한다는 교회로서의 정체성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속으로는 혐오하고 꺼려하고 미워하면서 겉으로 태연하게 복음을 전할 수는 없으니 미칠 노릇입니다. 그런데 이게 이천년전 초기교회만의 문제는 아니더라구요. 오늘 한국 교회도 이런 식의 치열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동성애’를 예로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교회는 조건없는 주님의 ‘사랑’을 ‘복음’으로 전하는 공동체 입니다. 하지만 동성애자들에게 만큼은 먼저 동성애를 포기하고 돌이키는 것을 조건으로만 사랑을 말합니다. 먼저 우리 편의 요구사항을 강요하는 방식을 ‘사랑’이라고 포장하는 것은 아닐까요? 만일 이 시간 교회 문을 열고 예배를 드리겠다고 ‘동성애자’가 들어온다면, 과연 우리는 친절한 웃음을 띄면서 대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일그러지는 마음을 감추지는 못할겁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누구에게, 또 누구를 위한 ‘복음’일까요? ‘복음’은 들어야 하는 이들에게 복된 소식이 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전하는 우리 마음에 흡족하고 좋은 소식이길 바라는 걸까요? 어쩌면 한국교회가 유독 동성애자들을 향해 날을 세우는 까닭은, 사랑하고 싶지 않은 낯설은 이들이 경계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조건 없이는 사랑할 수 없는 비겁한 우리의 민낯을 감추고 싶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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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인 선교를 통해 곳곳마다 교회가 세워졌고, ‘복음’은 주님의 말씀처럼 땅끝까지 전해지면서 자연스레 붉어진 이런 현실의 문제 앞에서 적어도 이천년전 교회는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방인’에게 복음전하는 일이나 그들을 교회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꺼리는 사람들이 교회안에는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사도행전의 기자가 명분으로 제시한 것은, 바로 이방인 선교를 주도하신 분이 바로 ‘성령’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성령’의 역사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누구라도 ‘성령’이 하신 일이라고 수긍할 만한 근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누가’는 두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들은, 이방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때에 베드로가 말하였다.’ | 사도행전 10:46

     

    첫번째는 ‘방언’이고, 두번째는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으셨다’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과연 이 두가지 현상만으로 내 자신의 믿음이나, 믿음을 통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충분히 확인하고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 ‘방언’에 대해 생각해 보시죠. 우리는 대개의 경우 ‘방언’이라고 하면 입신에 들거나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신령한 현상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성경에 그렇게 볼 수 밖에 없는 표현들이 많이 나오기는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아닌 성서를 기록했던 당시의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는지를 유념해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방언’이 눈에 드러난 어떤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매우 특별한 관계성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표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소리가 나니,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각각 자기네 지방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어리둥절하였다. 그들은 놀라, 신기하게 여기면서 말하였다. "보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 사도행전 2:6-8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시고 제자들의 무리가 방언을 하게 되었을 때, 바람과 같은 소리와 불의 혀처럼 갈라진 어떤 것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마음을 뺏기지 않으셔야 합니다. 사실 이 장면은 눈으로 볼 수 없고,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성령’을 설명하기 위한 성서기자의 최선의 표현이었을 뿐입니다. 정작 ‘누가’가 ‘방언’을 통해 말하고 싶어했던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성령’을 통해 제자들(교회)과 다락방 너머의 사람들이 비로서 ‘소통’했다는 사실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결코 곁을 내어줄 수 없고, 다가갈 수 없던 ‘낯설은 이들’과 조건없이, 차별함 없이 마음을 여는 소통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성령’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분명한 조건일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빕니다. 나는 할 수 없고,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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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번째는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매일 ccm이나 찬송가를 부르고 있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는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이건 우리가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가벼이 알고 있는 탓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높여 드릴 수 있을까요? 찬송을 부르고, 예배의 자리에서 ‘아멘’으로 응답하는 걸까요? 아니면 두 손을 들고 하나님을 높인다고 고백하는 걸까요? 

    먼저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크시다’는 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인지를 실감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만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싶은 감동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우주 끝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지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 뿐입니다. 그건 바로 ‘나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자신을 낮추어야 하나님을 실감할 수 있는 걸까요? 사실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 그러니까 찬송하거나 예배하는 것은, 우리와는 전혀 맞지 않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고, 높임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으셔도 이건 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높인다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하면서도 자신을 높이는 일에 쉽게 떨어지기도 합니다. 거대한 교회 건물, 대규모 성가대의 장엄한 찬양, 성공한 목회 안에서 ‘영광’을 찾으려고 하고, 땀흘려 기도하고, 밤낮으로 기도하는 자신에게서 만족감을 얻습니다. 전도 많이 하고, 예배에 열심인 자신의 신앙에만 온통 관심을 쏟고 그 안에서 의미와 기쁨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높이는 일을 향하는 겁니다.

    뿐만 아닙니다. 적어도 나 자신은 언제나 ‘하나님을 높이는 자’, ‘하나님을 믿는 자’라는 신념에 기대어, 우리는 너무 쉽게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꾸짖고 혐오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옳으신 것이 아니라, ‘나’는 옳다는 그릇되고 왜곡된 믿음탓입니다. 타자를 비난하는 혐오는 언제나 자신을 높이고 싶어하는 욕망, 하나님의 높으심을 부인하는 불신이 될 뿐임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높으신 분이시라면, 그 분앞에서 우리는 모두 그리고 언제나 무능할 뿐입니다. 그분의 판단, 그분의 선택만 있을 뿐, 아무것도 할 말이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뭐라할 처지가 아니라는 겁니다.

    정작 ‘하나님이 높임 받으시는 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만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늘상 세상안에서 세상을 두려워하고 염려하며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말로는 하나님께서 세상보다 크시다고 고백하지만 정작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은, ‘믿음’이 하나님을 높이 올려드리는 삶으로 이어지지 못한 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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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볼까요. ‘고넬료’의 집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베드로를 여기까지 이끄셨던 것도 ‘성령’이었습니다. 다시한번 부탁드리지만, 이 사건을 이방인이 회심하고 기독교로 개종했다거나, 그래서 기독교의 우위성을 드러내는 자랑할 만한 사건 정도로 읽으시면 곤란합니다. ‘고넬료’를 주목해 보십시오. 그는 오늘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세우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살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기며 거기에 의존해 살던 ‘백부장’으로서의 그의 삶은 이제 망하게 된 겁니다. 왜냐면,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 사람을 높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건 애쓰고, 수고하고, 노력하고, 결단해서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을 통해 지금 여기에 계신 하나님,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하게 된 이후, 자연스럽고 마땅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게 되면, 죄인이라도 용납해주시는 그분의 넉넉한 품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마땅하고 자연스럽게 기쁨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염려와 근심에 매몰될 일도 없습니다. 인색하거나 궁색해질 수도 없습니다. 

     

    성령은 증언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곧 진리입니다.’ | 요한1서 5:6b

     

    성령께서 그의 삶 가운데, 그의 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승리케 하신 높으신 하나님, 조건이나 차별함없이 ‘죄인’인 우리를 기꺼이 ‘자녀’삼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방식이 아닌, 성령을 통해 만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성령’께서 바람처럼 오고 가시듯, 주님은 오늘도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뜻입니다. 여전히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를 찾으시는 이유는 한가지 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 요한복음 15:11

    주님을 눈으로 뵙게 될 그날까지 세상안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야 우리에게, 주님 안에 있는 세상을 덮고도 남을 충만한 기쁨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있어야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주어진 현실의 문제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 주님보다 크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잘 들리지 않고, 제 자신을 높여야 한다는 조급함에 내몰릴 수도 있습니다. 그때 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 | 요한복음 15:16

     

    초기 교회 성도들은 삶이 아무리 힘겹고, 믿음이 흔들리고 주저앉고 싶더라도 이 말씀 하나만은 굳게 붙들고 살았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 뿐입니다. 그런 이들이었기에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성령’을 통해 주님께서 여전히 자신들과 함께 계심을 믿을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애쓰지 않고, 스스로를 드러내고 입증해내지 못해도, 믿음 조차 비틀거리고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쓸모 없는 인생처럼 전락해 버릴지라도, 여러분은 아무것도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믿음을 북돋우고, 우리의 눈을 열고, 우리의 귀를 열어주실 때까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신 놀라운 구원과, 그 구원의 소식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

     

    성령을 통해 언제나 먼저 손내밀어 주시고, 언제나 먼저 찾아내시며, 언제라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빕니다. 그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위로안에서, 그분의 사랑안에서 비로서 우리는 우리 안에서 낯설은 이들을 내몰던 벽이 무너지고, 사랑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던 불신의 담이 무너지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죽음을 깨트리고 부활하신 주님만이 우리의 능력이며, 우리의 희망입니다.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여러분안에 이 믿음을 더해주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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