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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7 성탄후 1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12. 23. 16:09
성서일과
1독서 | 이사야 61:1 ~ 10 ~ 62:3
응송 | 시편 148
2독서 | 갈라디아서 4:4 ~ 7
3독서 | 누가복음 2:22 ~ 40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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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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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nah and Simeon in the Temple”, Rembrandt Harmensz. van Rijn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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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탄 이후 첫번째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그리고 이천년이 흐른 오늘 우리는 성탄을 지나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하나님 구원의 사건을 완성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의 안타까움을 반증해 주는 셈입니다. 세상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데 우리끼리만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허망한 생각에 사로잡힐 때도 있습니다. 자꾸만 이런 생각이 우리 신앙에 장애물이 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구원으로 세우신 예수님이 불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자로서 권세와 재물을 권력 삼아 신 노릇하는 세상을 거스르시고 저항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 참된 신은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으며 살아온 역사 전체를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믿는 예수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얻으려고 하는 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세상이 복과 성공의 기준 삼는 것들을 채우고 얻으려고 하는 우리의 경배와 신앙의 대상은 사실 많은 경우에 예수라는 이름을 덧입은 세속의 신이었습니다. 아직 우리는 예수를 구원자로 세우신 하나님을 모르고, 정작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모르고 있는 겁니다. 고난받는 종, 십자가에 달려 저주 가운데 죽임 당한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왕이 되신다는 이 역설의 기쁨에 닿아보지 못했기에 돈이 없고, 삶이 힘들 때 불행이라 여기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예수의 ‘부활’ 조차 제국주의적 승리개념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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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이 지향하는 곳, 그러니까 우리 신앙의 목적지는 예수께서 바라보며 걸으셨던 길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질서와 가치를 거슬러야만 합니다. 그러면 손해보고, 망하고,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떨쳐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신다는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불의함, 폭력, 기만, 술수로 인해 끊임없이 배신당하고, 버려지고, 상처받아야만 하는 사람들, 그런 세상에 고개 숙이고 타협하면 그만이지만 그리할 수 없기에 억울한 사람들, 하지만 그런 세상을 거스를 힘 조차 없어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의 곁에서 만나게 되는 시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인’들, 하나님의 은총에서 버려진 불쌍한 영혼들이 예수님이 만나는 벗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시선이 늘 이곳을 향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수의 몸이 된 교회의 시선도 마땅히 성공한 헤롯의 궁전이나, 로마 황제의 권좌가 아닌 이런 곳을 향해야 합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과 출세가 부러움이 되고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힘의 원리가 작동하는 곳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실재가 되어야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머리되시는 예수께서 그리 사셨고 그 길만을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내용은 바로 ‘성전’, 그러니까 교회에서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복음서 2장에서 성전을 찾으시는 예수님의 두번의 방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번째 방문은 모든 첫새끼는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계명과 출산후의 마리아의 정결례를 치르는 것이 목적입니다. 민수기 18:15 ~ 17에 따르면 모든 첫새끼는 하나님께 드려야하되 사람의 경우는 다섯 세겔을 속전으로 드림으로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성인 남성 육개월치의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하지만 이것조차 드릴 형편이 않되었던 요셉과 마리아에게 안겨 예수님은 성전에 올라야했습니다. 그리고 41절 열 두 살이 되었을 때 예수님은 성년식을 위해 다시금 성전에 오르셨습니다. 율법의 규정을 따르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사람으로 태어난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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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낯설은 하나님의 구원자의 면모를 보게 됩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분이 여자의 몸을 입고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예수님이 ‘온전한 사람’이라는 사실로부터 궁극적으로 무엇을 겨냥하려던 걸까요?
율법에 따라 정결예식의 날이 차 성전에 오르게 된 예수를 기다리고 있는 역사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본문에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소개된 ‘시므온’과 여선지자 ‘안나’와의 만남입니다. 예수를 발견한 시므온은 자리를 들고 마리아에게 다가가 아기 예수를 건네 받습니다. 한참을 아기 예수를 말없이 바라보던 시므온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그의 입에서 마침내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터져나옵니다. 잠시 눈을 감고 이 장면을 그려봅시다. 시므온과 아기 예수의 성전에서의 만남은 단순히 한명의 노인과 갓 태어난 아기의 만남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사건입니다. ‘시므온’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자’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대체 그는 어떤 말씀을 듣고자 그렇게 애타게 기다려 왔던 걸까요.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구원의 날이 선포되는 ‘이스라엘의 위로’ 를 평생토록 기다려온 것일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이스라엘 구원의 말씀이 성취되어 나타나게 될 것을 기다려 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과의 만남은 절망에 속해 살아온 이들의 시간과 하나님이 열어가시는 소망의 만남이고, 지나온 과거의 시간과 이제부터 펼쳐질 미래의 시간의 부딪침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손길과 그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닿은 순간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놀랍고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그런데 무언가 그림이 어색합니다. 첫번째는 구원하는 자가 구원을 바라는 자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요셉 부부와 시므온 그리고 뒤이어 등장할 여 선지자 ‘안나’ 외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주목하고 있는 이들이 없다는 겁니다. 아기 예수를 받아들고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시므온은 내심 ‘맙소사 하나님, 이 아이라구요?’ 라는 물음을 멈출 수 없었을 겁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아가 천지를 호령하고, 제국을 뒤엎을 만한 능력이나 기품이 엿보이는 늠름한 이가 아니라 오히려 도움이 없이는 스스로를 건사할 수도 없는 갓난 아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이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겁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자신의 내면을 때리는 단호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바로 이 아이 입니다.
우리도 이런 물음앞에 섭니다. 되는 일도 없고 상처투성이에 아무런 소망도 보이지 않는 무력한 삶앞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신다는 말씀이 미덥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이런 식으로 살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늘 주안에서 복된 삶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늘 이 질문앞에서 넘어지는데, 시므온은 이 의문의 자리를 뛰어넘습니다. ‘내가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대체 어떻게 시므온과 안나는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있는 무력한 아기 예수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발견할 수 있던 걸까요? 그들의 영적인 식견이 부럽기만 합니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사실 많은 예언자들과 제왕들도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 누가 10:23-24
과연 우리도 시므온 처럼 사람들 틈바구니에 숨어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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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는 예수님안에서 빛을 발견하였던 ‘시므온’과 ‘안나’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 25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 37
그 둘은 하나님을 바라는 이들이었습니다. 따지고보면 이스라엘 백성치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았던 이가 없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의 이름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알아본 사람은 흔치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에 다니고 신앙생활하는 사람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없고, 다시 오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도 분명히 시므온과 안나처럼 삶에 드리워진 주님의 영광에 하나님을 찬미하며 사는 이들이 있음에도, 대부분의 경우에는 일상에서, 함께 하는 이들속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는 것’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있습니다. 먹고 살만하고, 세상에서의 성공과 구원에 붙잡히거나 매달리는 일에 천착하는 사람들, 우리가 그렇게 부러워하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을 없습니다. 이미 세상이, 그리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있으니 갓난 아이처럼 연약한 모습으로 오시는 하나님이 눈에 들어올리가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거나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세상에서는 더이상 다른 기대와 방법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아프고, 억울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가난한 사람들, 하나님이 없으면 살 수 없어 주님만을 삶의 구원으로 믿는 성도들의 삶이 이런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의 삶은 모든 면에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 우리가 추구했던 가치, 세상이 이야기해주는 성공과 구원의 개념을 모두 전복시키고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질문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무언가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고귀하다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세상에 마리아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 인간의 생명이란 성령에 의해 잉태된 고귀한 것임을 가르쳐 주셨고, 세상이 눈여겨 보지 않는 곳에 구원을, 깨어지고 상한 이들, 세상이 손가락질 하고 내치는 죄인들일지라도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업적을 쌓고 명성을 얻어야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상의 방식을 거슬러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으로 살아가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넓은 길을 저 혼자 소유하려는 세상에서 좁은 길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도, 섬김을 받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자가 큰 자라는 것도 주님이 가르쳐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뿐인가요. 구원하는 길이 세상을 뒤엎고 정복함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세상에 의해 죽임당하는 십자가위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길 끝에 성취하신 ‘부활’을 통해 이제부터는 죽음에서 자유하게 되는 전혀 다른 세상을 하나님께서 시작하셨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그렇게 작고 여린 갓난 아이로 이 땅을 찾으셨던 겁니다. 참으로 그분의 삶은 ‘믿음’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하늘의 신비로 가득차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제국을 무너트리고 내가 바라는 왕국을 건설해줄 메시아를 찾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맹인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음도 보지 못한 채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굳어져있는 우리의 ‘생각’을 깨트리고 무너트리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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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세상은 생명과 소망보다는 절망과 죽음으로 가득차 보입니다. 어떻습니까. 세상이 바뀌지 않고, 내 삶도 바뀌지 않으니 그것 때문에 답답하고, 그것 때문에 매일이 낙담이 되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그렇다면 성전안에 사람들처럼 지나치지 마시고, 시므온 처럼 자신의 손에 들리워진 아기 예수를 주목해 보셔야 합니다.
아기 예수의 맑은 눈과 뽀얀 얼굴, 버둥거리는 작은 몸, 이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 사실로부터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이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우리 안에 찾아와 있음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주의 구원을 볼 수 있다면 그 순간 우리의 삶은 어둠에서 한 줄기 빛을 찾은 것과 같은 기쁨과 환희에 휩쌓이게 될 것이며, 그 빛이 우리를 하나님 구원의 능력에 사로잡히게 해 줄 것입니다.
성탄후 첫주입니다. 그리스도로 주현하시기 이전까지는 아직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은 어두운 땅에 비밀처럼 감추어져있습니다. 그러니 하늘의 구원을 엿보시려면 시므온과 안나처럼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의 구원에 집중하십시오. 어느 낯설은 순간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익숙한 일상속에서 주의 구원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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