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1/03 성탄후 2주 ( 신년 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0. 12. 30. 13:42
성서일과
1독서 | 예레미야 31:7~14
응송 | 시편 147:12~20
2독서 | 에베소서 1:3~14
3독서 | 요한복음 1:(1~9), 10~18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CvG1ia6CvqLqPZLzxlRQYtcjk3wwI8yN/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r717yKWJZJE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좋은 것' 주시는 '주님'
1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느 해에도 그러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어느 때보다 힘겨웠던 지난 해를 보내고 맞이하게 된 새해 첫주 우리의 기대는 어떻게 하면 ‘복’받는 생을 살 것인가입니다. 신앙의 유무를 떠나 모두가 그렇게 힘을 다해 애타게 원하고 찾고 있음에도, 자신은 ‘복’을 손에 잡았다 말하는 이들은 여전히 흔하지가 않습니다. 마치 애당초에 세상에 뿌려진 ‘복’이란 것은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복’에 대한 인상 깊은 정의를 우리말 사전에서 본적 있습니다.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이나 또는 거기서 얻는 행복’이야 말로 ‘복’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복’이란 것이 누구나 일상안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애당초 어떤 이들에게만 발견되고 허락되어지는 불공평한 하늘의 선물을 받아쥐게 되는 우리네 삶이란 것이 너무 안쓰럽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 동안 지천에 펼쳐져있는 ‘복’이란 것이 없다 여기며 스스로를 비천함으로 내몰며 살아왔던 겁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이 아니라, ‘복’을 지나치지 않고 찾아낼 수 있는 ‘눈’입니다.
골동품 감별사, 보석 감별사등 ‘감별사’라는 직함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감별사들이 시력이 더 좋은 것도 아닙니다. 특별한 사람으로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다만 볼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보지 않아도 될 것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뿐입니다. 결국은 복이라는 것도 발견해내는 ‘눈’이 있는 이들에게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복이 와있음에도 보지 못하고, 그것을 잃어버린 이후에야 아쉬워합니다. 복을 발견하는 방식이 아닌 복을 보지 못하게 하는 방식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현실, 그 일상에 감사하지 못한다면 ‘복’은 영원히 발견할 수 없습니다. 생의 기쁨이 되는 ‘복’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2
1독서 본문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100년 즈음후 남유다에서 말씀을 선포했던 예레미야의 예언입니다. 암담한 현실 너머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내일이 있다는 말씀이 힘이 됩니다. 그런데 ‘예언’을 접할 때마다 곧장 알 수 없는 답답함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우리의 의문은 이것입니다. ‘대체 이 예언이 언제나 성취된다는 겁니까?’이미 백년 전에 앗수르에 의해 망하여 흩어진 백성들이 돌아오게 될 것이라던 이 예언은 적어도 역사 안에서는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나 그의 예언을 들었던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예언은 시대적 절망 앞에서도 기뻐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안에서 어떤 이유를 발견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복이라고 하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가 눈에 들어오시나요, 아니면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돌아오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것들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좋은 것들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일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런식의 기쁨이나 복이란 것은 하나님이 아닌 제국안에도 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언의 말씀은 우리가 찾고 있는 기쁨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모든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합니다.
3
초기 교회 공동체는 예레미야의 예언 안에서 우리가 발견해 냈던 것들에 마음을 담아두지 않았습니다. 당시 교회의 삶에는 그런 식의 기쁨은 흔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오히려 불가능했습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아류로 천대받았고, 거기에 더해 에베소 교회는 이방인 공동체로 차별받았습니다. 세상을 호령하던 로마의 권세는 영원할 것만 같습니다. 그렇지만 성도들은 예수님안에서 그런 세상이 요구하는 ‘복’이 아닌, 전혀 다른 복을 발견했습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입니다. ‘하늘에 속해 있다’는 것은 땅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땅에서는 감추어져 있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땅이 아닌 하늘에서 복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경험할 때만 얻을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 동안 말씀을 들어왔고, 하나님을 배워왔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강요해온 틀 안에서 하나님은 늘 현실안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그저 무능한 먼 미래의 구원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늘에 속해 있는 신령한 복’이라는 말은 듣기에는 좋지만 여전히 그것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 무감각한 기쁨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막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가르칩니다. ‘복’은 ‘엔 크리스토’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러고보니 예수야 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복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찾아오셨다는 성육신의 사건도, 대림의 기다림도, 성탄의 기쁨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이야기일 뿐, 내게 임한 하늘의 복이라고 여기질 못합니다.
4
바울 뿐만이 아닙니다. 3독서 요한복음에서 사도 요한 역시 하늘에 속한 복이 우리에게 임하였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자신의 땅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의 말씀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신령한 복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이 복이 되실 수 있는 이유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셨기 때문이라고 소개합니다(12).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는 것, 그렇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실존적으로 경험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은 문자에 갇혀 있는 하나님이 아닌, 삶 가운데 동행하시는 생생한 하나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 경험은 우리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절망하게 하는 세상에서도 ‘하나님으로서는 못하실 일이 없다’는 것, 하나님 말씀이란 땅에 떨어져 사라지지 않고 반드시 이루고 성취해내고야 마는 ‘능력’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해줍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긍정되는 하나님의 세계를 만나게 되는 겁니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찾아오셨으며, 또한 지금 우리와 거하신다’ (14절)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육신은 헬라어로 ‘사르크스’라는 단어입니다. 말 그대로 우리의 육체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이 땅에는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고 오신 겁니다. 다만 육체를 입고 계신 그분안에는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영’은 신령하지만 ‘육체’는 상대적으로 열등한 것,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라 여겨졌던 모든 모함이 예수님 때문에 비로서 벗겨집니다. 이 땅이나 이 땅에 속한 삶이란 무가치하고 더러우니 하늘에 올라야 한다는 이분법적 신앙관이 깨어지면, 예수 그리스도 인해서 실패하고, 불행한 것이라고 말하는 우리의 버려지고 상처받은 삶도 예수님이 몸으로 삼으신 복된 인생, 거룩한 땅이 됩니다. 우리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져다 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버려졌던 인생이 이제는 하나님이 찾아와 함께 하시는 세상을 향한 하늘의 복이 되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지탱해주었던 믿음의 지평과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5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라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천착하자는 말씀이 여전히 당장 눈앞에 놓여있는 문제들이나 바쁜 삶속에서는 막연하고 한가한 소리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세상이 구속하는 틀 속에 갇힌 채로 일상의 과잉에 내몰며 살아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져다 주는 삶의 능력과 신비를 일평생 맛볼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일하시는 분이신지를 오해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은 없다는 불신으로 떨어지거나,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세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다른 어떤 수준으로 여기곤 합니다. 그래서 가난과 억울함을 없앨 수 있도록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고, 시스템을 뜯어 고치고, 사회 정의를 이루는 것에 천착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잘못 된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옳은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세상을 구원해 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은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경험한다는 것은 개인적 구원에 천착하거나 사회를 개혁하는 일에 매달리는 것이 아닌, 아무리 막연해 보여도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내신 하나님의 구원사건에 매달리는 것이 최선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구원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보다 근원적이고 중요한 것은 예수 사건을 발견하고 그 구원 사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사건에 집중하게 될 수록, 알 수 없는 기쁨이 우리 삶을 채울 겁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그런 복에 사로잡힌 사람은 세상도 어찌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바울은 하늘의 신령한 ‘복’을 말할 때 매우 독특한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율로기아’라는 단어입니다. 사전적 의미가 놀랍습니다. ‘율로기아’ 안에는 ‘복’이라는 뜻외에도 ‘찬양’이라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예사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야말로 단순히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높이는 것만이 아닌 하늘의 복이 임하기를 바라는 것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허락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고, 또한 이루실 수 있으신 분이신지를 경험한 사람들, 세상이 알 수 없고, 줄 수도 없는 놀라운 세계를 엿본 사람들입니다.
지난 2020년을 통해 ‘내일’의 시간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고 무능한지를 고통속에 경험해 온 우리이기에, 올 한해를 또 어떻게 지낼 수 있을지 온통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걸어내 보지 못한 이 미지의 시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선물처럼 주어진 올 한해를 건져내실 분은 주님 뿐이십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구원해 내실 것입니다.
세상이 유혹하는 사람의 영혼을 헤치고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속되고 사특한 것에 마음을 담지않고, 늘 좋은 것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한계에 사로잡히게 만들어 마치 노예처럼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게 만드는 세상의 권세를 거부하고 삶을 구원하는 길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하늘의 신령한 복’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복, 하나님의 말씀만이 이루실 수 있는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이 복을 주셨습니다. 눈을 크게 뜨십시오. 2021년 새해가 이미 우리앞에 와있습니다. 아멘.
'성서의 거울 앞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01/17 주현후 2주 (0) 2021.01.13 21/01/10 주현후 1주 (0) 2021.01.07 20/12/25 성탄주일 (0) 2020.12.25 20/12/27 성탄후 1주 (0) 2020.12.23 20/12/20 대림절 4주 (0) 2020.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