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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01/24 주현후 3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1. 1. 20. 11:21

    성서일과 

    • 1독서 | 요나 3:1~5, 10
    •  응 송 | 시편 62:5~12
    • 2독서 | 고린도전서 7:29~31
    • 3독서 | 마가복음 1:14~20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xVnpgfNnJPpFLCVCbvjBflhJLStEhg00/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1-Dy4tKZcAg  = '클릭' 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요나 이야기_by Paul Brill_in the The Wawel Castle in Krakow_Poland

     

    하나님의 초대, 우리의 응답

     

    1

    일반적인 조건이라면 물은 100도에 이르면 끓기 시작합니다. 99 정도가 되면 아직 끓지는 않는것 처럼 보여도 손이라도 닿으면 화상을 입을 만큼 뜨거울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물은 끓지 않습니다. 99도까지는 김이 올라오는 말고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가도 마침내 100도가 되면 예외없이 끓게 됩니다. 분명 불의 열기가 물의 형질과 상태를 바꾸고 있었음에도 우리 눈에는 보이질 않습니다. 이처럼 물이 끓는 여부도이정도 불에 얼마쯤 지나면 끓더라 경험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헤아릴 없는 우리인데, 오늘 복음서 안에서는 도무지 가늠해볼 없는 아득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때가 찼다’ !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주님의 외침입니다. 주께서때가 찼다 하셨을 , ‘라는 뜻으로 사용된 단어는카이로스라는 헬라어입니다. 본래카이로스라는 말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기회, 시간, 행운으로 불리우던 신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상상해 카이로스 외모는 매우 독특합니다. 앞머리는 길고 무성한데 뒤통수는 대머리이고, 어깨에는 날개가 있고 발뒤꿈치에도 작은 날개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카이로스를 이렇게 묘사한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일단 옷을 벗고 있으니 사람들 눈에 띄지만 길고 무성한 앞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그를 쉽게 알아보지 못합니다. 안타깝지만 대부분은 지나친 다음에야 그를 알아차립니다. 일단 돌아선 그의 뒷덜미는 잡으려해도 매끈한 대머리이니 붙잡을 없습니다. 게다가 어깨와 발뒤꿈치에 날개가 달려 있으니 한번 손에서 벗어난 그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한번 지나가버린기회시간이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교훈을 주는 신화인 셈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저마다 찰나처럼 지나쳐가는크로노스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학에 합격하고, 직장에 들어가거나 좋은 집을 얻게 되는 날이기도 하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 운명적 대상을 만난다거나, 혹은 누군가에게는 고생만 하던 삶에하고 해가 뜨는 인생 역전의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성도인 우리의 기다림은 주님이 말씀하셨던하나님의 나라 우리 가운데 이루어질 , 시간에 있을 겁니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건, 우리의 의문은대체 날은 언제 오는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날을 알수만 있다면 민머리카이로스 앞머리라도 냉큼 붙잡을 있을 텐데 말입니다.

     

     

    2

    오늘 1독서 본문인 요나서에도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이 아닌, 그것도 자기 민족을 멸망시켰던 이방 나라 앗수르에 말씀을 전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던 특별한 선지자입니다.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에게 앗수르의 도시니느웨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지만, 요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요나는 선지자들을 보내 심판과 징계의 예언을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속뜻이 사실은 은혜 안으로 돌이키기고 살기를 바라시는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정말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용서라도 받게 된다면, 니느웨에 임할 심판을 전한 자신의 예언은 그릇된 예언이 되고 스스로는 거짓 예언자가 되고 맙니다. 원수같은 니느웨가 망하지 않고 심판을 피할 길을 가르쳐준다는 것도 거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심판하시지 않고 용서해주신다는 자체가 공의롭지 못한 처사입니다. 하나님마져도 불의함과 죄악을 징벌하지 않고 폭력과 억압을 묵과하신다면 도대체 악인이 득세하고 의로운 이들이 핍박을 당하는 이땅 어디에 소망이 있겠습니까? 죄에 대한 정당한 값을 치루도록 불의한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야 말로, ‘공의 주님일 있다는 것이 선지자 요나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것을 전하는 것이 사명인 선지자임에도 지금 요나는 반대로 유대땅에서 제일 곳인다시스 도망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는 없는 법이겠지요. 하나님을 피해 요나가 숨어들었던 배가 풍랑을 맞아 배안에 있던 사람들이 죽게 되었는데, 모든 환란이 자신 때문임이 드러난 이후에 요나가 뱃사람들에게 했던 말은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라입니다. (요나 1:12)‘차라리 죽을 지언정 니느웨로는 가지 않겠다뉘우침을 기대했던 우리를 무색하게 만드는 하나님을 향한 그의 오기가 단호해 보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니느웨에 도착은 했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냉랭합니다. 사흘 동안 걸어야 만큼 성읍이라는 니느웨를 하루만에 다니며 말씀을 전했다는 것만 보아도 있습니다. 게다가 그가 전했던 설교는 히브리어로 다섯 단어 밖에 않될 만큼 매우 단촐합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라’ | 2:4

     

    무엇 때문에 망하게 되는지, 어떻게 해야하는지 아무런 언급없이 그저너희는 망할 이라는 말만 외치고 다녔습니다. ‘누구든 들으라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듣지 마라 그의 마뜩찮은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놀랍습니다. 그런 불성실하고 긍휼함 없는 선지자의 짧은 설교에도 불구하고, 니느웨 성읍 안에 있던 왕을 비롯한 사람들, 짐승들까지 모두가 굵은 옷을 입고 마음이 되어 회개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걸음을 멈추고 전혀 다른 , 신에게 긍휼을 구하며 사는 삶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으니, 요나야 말로 회개를 촉구했던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 중에 유일하게 성공한 선지자가 셈입니다.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 3:10b

     

    게다가 이방인들의 회개에 하나님께서도 뜻을 돌이키고 심판을 거두셨습니다. 이런 해피 엔딩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요나의 마음은 강팍해져갑니다. 4 2절과 3절을 보면 그가 얼마나 마음이 거칠어 졌는지 있습니다. 자신을 부르셨을 때는 니느웨를 심판하시겠다고 확언하셨으면서도 니느웨 사람들을 덜컥 용서해주시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것이 요나의 고백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지금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칭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매우 불경스러운 불퉁거림이고 빈정거림일 뿐입니다. 그의 속마음은 이어지는 4 3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 4:2

     

    공의로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따를 바에야 차라리 죽여달라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신앙 좋은 선지자의 모습이 우리 눈에도 위태로워보입니다. 사실 요나서는 선지자 요나가 기록한 예언서가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서들이 예언자의 이름으로 기록된 예언자 자신의 책이라면, 요나서는 선지자 요나에 관한 이야기를 누군가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대상은 바로 하나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자신입니다. 하지만 없이 많은 , 포기하시지 않는 말씀과 부르심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삶의 전향을 이루지 못했던 요나의 모습과는 달리, 마디의 말씀에 삶을 송두리째 무너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삶을 던졌던 이방인들의 절절한 모습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모순과 역설이 가져다 주는 충격이었을 겁니다. 이스라엘의 기준으로는 절대로 구원받을 없던 이방인들 조차 하나님의 초대에회개함으로 구원을 향해 절규하고 있는데, 정작 하나님을 거스르고 있는 요나의 모습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참여하기 위해 삶을 깨트리지 않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들추어내는 통렬하고 신랄한 비난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서의 저자가 전해주고 싶었던 본론은 우리 편에서의회개 중요성이 아닙니다. 인간의 회개에 기꺼이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 그분을 소개하는 것이 예언서의 목적지입니다.

     

    3

    요나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이 전해지지 않았더라면 니느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계의 패권을 움켜쥔 불의함과 폭력에 기대며 살던 니느웨 사람들의 일상은 결국 불법과 함께 심판으로 망하고 말았을 겁니다. 권력이나 부유함이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결국은 죽음과 멸망이라는 크로노스의 시간안에서는 벗어날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음을 향해 치닿던 크로노스의 시간안에 어느날 보이지 않던 멸망과 심판의 때가 불쑥 찾아온 겁니다. 선지자 요나를 통해 회개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때에 니느웨 사람들은 멸망을 피해갈 없던 크로노스의 시간속에서 맘을 다해 응답함으로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길어 올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날이 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마지막 선지자라는 찬사를 한몸에 받던 세례자 요한이 갑작스럽게 헤롯에 의해 살해 당한 , ‘그러면 그렇지라는 패배감과 절망으로 사람들의 마음은 무너지고 굳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쭈볏거리던 요나와는 달리, 죽음의 암담함에 덮여 있던 세상을 일깨우시는 예수님의 힘찬 외침이 울려퍼졌던 순간이 바로 그때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죽고 모든 인간적 소망이 무너져 버린지금이야 말로 하나님만이 하실 있는 새로운 희망의 시대가 시작될 있는가장 좋은 라는 겁니다. 이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소망의 깃발을 높이 올리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하나님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때가 임했음을 보시고 나라를 살아내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믿으며 살라 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합니까?

     

    질문에 대한 마가의 답변은 17 베드로와 안드레를 향해나를 따라오라 주님의 부르심과 18 부르심에 이어지는 그들의 행동안에 담겨 있습니다.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 1:18

     

    베드로와 안드레는 고기 잡는 어부였습니다. 고기를 많이 잡아 만선이 되든 허탕을 친채 돌아오게 되든, 그들의 열심과 수고는 크로노스라는 소비되는 시간의 덫에 걸려 있을 뿐입니다. 그들의 매일은 얼마나 많거나, 적거나의 반복일 뿐입니다. 그런 일상에 어느날, 주님이 찾아오셔서나를 따라오라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그들의 내일에 하나님의 때에 참여할 있는기회’, 카이로스의 시간이 찾아온 겁니다. 주님은 그들을 초대하셨고, 이제 초대에 응하는 것은 그들의 몫입니다. 그리고 응답은 바로지금이어야만 하며, 응답의 내용이 바로버려두고’, ‘떠나는 입니다.

     

    4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으로부터 떠남으로 예수님의 초대에 참여할 있습니까?
    2
    독서 고린도전서 7 29에서 31절까지 사도바울의 짧은 가르침안에 사용되고 있는 독특한 표현 방식에 주목해 보면 좋겠습니다. 헬라어호스 라고 하는 표현인데, ‘~하지 않은 것처럼이라는 말입니다. ‘아내가 있지만 없는 자처럼’, ‘우는 자는 울지 않는 자처럼’,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처럼’, ‘없는 쓰지 못하는 처럼 살라는 말은 가식이나 허위에 떨어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안에서도 변하고 사그러지지 않는 절대적인 가치로 비추어 우리 영혼을 구속하는 모든 것들이 상대적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 있으나 없는 것처럼 없으나 있는 것처럼, 있어도 자랑하지 않고 없어도 주눅들지 않으며 풍성한 자유안에서 있습니다. 코로나 이전에 죽네 사네 하던 일들도 코로나 이후에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절대적인 기준이 바로 7 28 후반에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바울의 말에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절대화하고 주님의 초대를 가벼이 여기는 그릇된 마음을 버리고, 떠나야만 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지금의 처지와 상황을카이로스’, 의미있는기회의 시간으로 만들어 것이냐가 중요합니다. 죽음의 시간속에서 주님의 초대를 받았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숱한 날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허투루 지나쳐왔습니다. 들리워진 말씀에 응답하거나, 가슴을 때리는 말씀에 반응하고, 지금 버리고 떠나라는 주님의 초대에도 심드렁했을 뿐만 아니라, 이외의 사람들은 저렇게 사느냐? 요나의 불퉁거림만 따르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들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며 불평하는 우리이지만, 정작 ?라는 물음앞에서는 말이 없습니다. ? 우리는 살았고, ?우리는 구원을 받았으며, ? 우리는 믿을 있는지, ? 우리는 절망의 시대에 하나님 앞에 사람들이 되었는지 설명할 없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오늘 주일의 아침에 예배를 드린다는 ,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나,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마져도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안에 있는 신비로움일 뿐입니다. 기회의 시간인카이로스 바로 지금 우리에게에 들리워진 말씀 한구절, 허락된 오늘, 모든 것이생명 참여하라는 하나님의 초대안에 담겨있는 겁니다.

    이미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의 시간을 모두 완수해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또한 하나님의 시간, 구원의 시간을 완수해 내라고 초대해 내시기 위해 우리 삶에 개입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초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다음에 이루어질 기회의 때는 없습니다. 바로 지금, 초대에 응하며 주님을 향해회개하며 사는 이들을 향해 기꺼이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기억하며 사십시오. 이것이 크로노스의 시간속에서 영원의 시간을 길어 올리며 사는 길입니다. 안에 풍성한 생명이 담겨있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고후 6: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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