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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01/10 주현후 1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1. 1. 7. 16:56

    성서일과

           1독서 | 창세기 1:1 ~ 5
            응송 | 시편 29
          2독서 | 사도행전 19:1 ~ 7
          3독서 | 마가복음 1:4 ~ 11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MpkFnSNw2xL5H4waVJ9XxVU6eo1w96ju/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BAHedAFhyVE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아직도 울려야 할, 하늘의 음성

     

    1

    정신이 아득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16개월 지난 아이가 양부모에게 맞아 죽은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부모에게 버림 받았던 불쌍한 영혼은 다시 양부모에게 버림받았고 세상은 누구도 보호하는 손을 내밀어주지 못했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에 방치된 사그러든 정인이 앞에서 우리는 모두 할말이 없는 죄인들입니다. 와중에 우리를 뜨악하게 만든 다른 이유는 양부모들이 신실하다 인정받던 기독교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끝을 없이 추락하는 기독교의 비루한 현실이 도무지 어디쯤에서 멈출 있게 될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생명의 아버지 되시는 주님께서 품어주시기를, 세대를 향해 피흘림의 값을 물으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선하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엎드릴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처럼 참담한 인간 현실을 만나게 되는 걸까요? 발전하고, 살만해졌다 말하고, 너나 없이 세련되고 교양있는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 우리의 영혼은 마치 밑둥이 터져버린 것처럼 허무하고 자꾸만 거칠고 잔혹해지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풍요를 말하는 시대의 한복판에, 곤고하고 허무한 인간 실존을 직면한 슬픈 오늘입니다.

     

    2

    주현후 1 성서일과 1독서는 우리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습니다. 창세기 말씀이 기억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오늘에 직면하는 우리 모습과 너무나 달라보이니 오히려 허무맹랑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의 창조의 평가의 마지막 마침표는 다름아닌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 1:31a

     

    창세기 기자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빚으심을 끝으로이제야 모든 것이 좋다라고 하셨습니다. 땅이 주님 보시기에 좋은 곳이었다는 말씀이 아련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오늘을 보고 있으면 인간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에 선뜻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깨어지고 엉망진창인 인간은 오히려 하나님 창조의 위험요소라고 해야 타당해 보입니다. ‘질료 좋았던 것일까요? 그건 아닌 같습니다. 인간 역시 다른 존재들처럼 흙으로 빚으셨으니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투박하고 거친 한덩이였던 우리를 보시기에 좋은 사람으로 빚어내신 분은 하나님이셨으며, 하나님이 지으셨으니 좋은 것이 있었습니다. 지점에서부터 우리는 성서 기자가 소개하고 있는 창조신앙을 오해하고 맙니다. 창조신앙이라고 하면, 으레 진화론과 맞서 싸워야하는 교리 정도로 이해할 , 모든 ( 아무리 돌아보아도 절망스러워 보이는 인간을 포함한 ) 하나님으로부터 비롯했다고 하는창조신앙이 현실의 어둠속에서 얼마나 삶을 아름답게 건져내는지 실감하지 못합니다. 고고학적 기록물이나 화석을 대하듯 창조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모든 것이 그렇게 생겨났더라 말로 끝나버립니다.

     

    3

    창세기의 역사를 기록했던 성서기자들이 활동했던 시기는 바벨론 포로기를 즈음이었습니다. 먹고 살기 퍽퍽하고 영혼은 곤비하고 정체 모를 억울함에 자체가 벼랑끝에 내몰리는 같은 매일의 연속에 그들은 있었습니다. 도무지 낭만적이고 낙관적인 시선으로 인간 창조를 내려가는 창세기가 기록되었던 시기, 그것을 기록한 성서기자들의 삶이었다고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과 형편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짐승처럼 잔혹한 형편속에서도 처음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신앙이야말로 삶이 붕괴되거나 영혼이 침몰당하지 않을 있도록 이스라엘을 지켜내는 힘이었고, 그들의 정체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이니, 세상은 소망이 있고 삶은 여전히 살아갈 만한 기대가 있게 됩니다. 냉소와 정죄 앞에서도 내일을 기다릴 있는 마지막 버팀목이 되어주셨던 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셨던 겁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은 여기에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지어진 인간, 그런 하나님을 믿으며 사는 이들이라면 그렇게 살라고 빚어졌으니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율법이고 계명이며 말씀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하나님을 따라 살아가는 , 우리는 땅의 노예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지어진  복스러운 존재들이라는 정체성을 일깨워줍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생명의 근거이며 목적지인 하나님은 잃어버린 , 그런 방식으로 살아내고, 그렇게 해내었다는 자신을 발견하려고 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손을 놓은 , 스스로 흙덩이를 뭉쳐 사람이 되려고 했던 겁니다. 

     

    4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잃어버린 길에 멈추어섰던 것이 유대교였던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삶과 운명을 빚어가시는 창조주 시라는 것은 믿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손에 흙덩이를 들고 이리 저리 분주해집니다. 그들의 종교적 열심도 그런 겁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노력과 삶은 하나 하나 따지고보면 참으로 귀한 것들입니다. 오늘 세상이 주목하고 바라고 기대하는 최고의 가치도 이런 것입니다. 이렇게만 살아도 세상을 바꿀 있고, 나은 삶을 있을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세상도 교회도 이렇게 살아보자고, 이런 신앙을 갖고, 이런 교회를 만들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2독서 사도행전 19장을 보니 에베소 교회에 이르게 되었던 바울은 이런 삶의 전향을 세례자 요한이 전했던회개 세례를 받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결코 간과할 없는 것이 바로회개입니다. 이전까지의 삶에서 돌이키는 전향이 없는 결코 하나님을 믿을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모르는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하나님의 은혜안으로 돌아올 수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회개 뜻하는 단어를 과녘에서 이탈되었던 방향을 바로 돌려놓는메타노이아 사용합니다. 

    예수 없던 삶에서, 예수를 믿으며 사는 삶으로 방향을 전환시키기는 ! 탐욕에 붙들려 세상을 추구하며 살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예수 생명을 구하며 사는 삶으로 돌이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만큼 중요합니다. 존재의 변화를 추구하는 기독교 신앙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겁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이 회개가 전부가 아닌 것처럼, 회개의 세례를 받는 것만으로 삶을 구원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비교적 간단하게 확인할 있습니다. 이전의 삶이 못된 것인줄 깨닫고 새롭게 결심하고 결단한다고 해서 삶이 바뀌던가요? 인간 역사는 어떻습니까?

    끊임없이 과거를 반성하고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투쟁이 인류의 역사였지만, 여전히 우리의 영혼은 공허하고 끊이지 않고 참담한 민낯과 만날 뿐입니다. 여전히 가난하고, 굶주리고, 고통받고, 악을 행하고, 폭력은 난무합니다. 

    회개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무용론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 못된 것도 아닙니다. ‘회개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열망과 간절함이야 귀한 것이지만, ‘회개에만 자꾸 매달리다보면, 어느 복음이 안에 가져다 주는자유기쁨 두려움과 정죄감으로 대체되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구원자로 경험하지 못하고, 마치 무서운 사감선생 처럼 대하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회개후회 한다거나 새로운결단 하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이나 시도를 통한 변화와 구원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통렬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무능을 발견하고 고백하는 자리에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총 기대는 간절함만이 오롯이 남게 되는 됩니다. 

     

    5

    사도행전 19장의 바울과 제자들과의 대화를 보면 초기 교회공동체안에 여전히 이런 유대교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는 것을 있습니다. 예수를 믿을 때에성령 받았느냐는 바울의 물음에,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했다 답변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 유대교와의 사이에서 가지는 차별성과 탁월성의 핵심이 바로성령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지만 우리도 에배소 교회의 제자들처럼성령 무지합니다. ‘성령 어떤 분이신지를 오해해서 특별한 경우에 채워지는 어떤 능력이나 현상으로 기대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대체 예수를 믿을 성령 받는다는 바울의 말이 어떤 것인지도 선명하지 않을 뿐더러, 예수를 믿을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독교 신앙 ,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은성령 빼놓고는 존재할 없다는 겁니다. 

     

    그러고보니 마가도 3독서 복음서 첫장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야 말로 바로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소개했었습니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 1:8b 

     

    예수님과 성령은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도 결국은 성령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성령 사로잡힌다는 것은 뭘까요? 창세기 기자는 사실을 하나님의 창조 사역안에서 드러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를 운행하시느니라’ | 1:2b

     

    해산할 아이를 감싸고 있는 어머니의 자궁처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를 이루는 위대한 순간을 감싸고 계신 분이성령이었습니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고, 덩이를 살아있도록 불어넣으시는 그분의 호흡이며, 생기이고, 생명입니다. 성령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자유를 누리는 겁니다. 흙덩이를 손에 쥐고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부산해 하는 손을 멈추고, 보시기에 좋았던 우리를 빚어내시는 하나님 손에 기대는 겁니다. 나은 무엇을 이루기 위해, 이전과 다른 무엇이 되기 위해 애를 쓰고 수고를 해야하는 회개의 세례가 아니라,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뛰어드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있는창조 능력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손에 맡겨지는 순간, 불법과 불의함과 폭력으로 삶을 억압하는 죽음에서 벗어날 있습니다. 

     

    6

    오늘은 주현후 첫번째 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어둠에 잠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그리스도이심이 빛처럼 드러나고 폭로되었음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주현절의 핵심사건은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던 장면에서 변화산에서 있었던 사건으로 마무리 됩니다. 그때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 1:10 ~ 11

     

    성탄의 , 그리스도께서 땅을 찾아오셨지만 여전히 아무도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어둠에 짓눌린 작은 빛처럼 아직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감추어져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현의 그날, 기쁨을 이기지 못했던 하나님께서 하늘을 열고 외치셨습니다. 창조의 여섯째 이제야 모든 것이 보기에 좋았다는 마침표를 찍을 있게 해주었던 바로 사람을 찾아내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와 덮었던 사람, 성령에 휩쌓인 예수가 바로 사람입니다. 성령이 감싸고 있는 그곳에 무에서 유로 하나님의 창조가 드러났던 것처럼, 생명의 영이신 성령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외침있던 순간을 모두가 보고 들은 것은 아닙니다. 마가는 어떻게 모습을 그리고 있고, 교회는 어떻게 사실을 함께 기뻐할 있었을까요? 성령에 사로잡힌 예수를 하나님께서 발견하셨던 것처럼,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오늘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열어젖혀진 선명한 하늘을 있고, 어두운 세상에서 사람을 발견한 하나님의 천둥 같은 기쁨의 환호성을 들을 있습니다.

     

    주현후 첫주일,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땅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곳임을 기억하게 해주셨습니다. 창조주이신 분께서 포기하시지 않은 땅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망을 기억하게 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주현의 , 예수님을 향해 외치셨던 함성에 목말라하고 계십니다. 세속의 , 사특하고 거짓된 악을 거부하고, 주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으며 살아가십시오. 우리를 향해, 하늘을 열고 내가 사랑하는 , 내가 기뻐하는 이들이라는 하나님의 음성듣게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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