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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 14 사순절 4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1. 3. 11. 11:09
성서일과
- 1독서 | 민수기 21:4~9
- 응 송 | 시편 107:1~3, 17~22
- 2독서 | 에베소서 2:1~10
- 3독서 | 요한복음 3:14~21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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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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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에 달린 것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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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이견이 있지만, 대체로 사순절은 부활절을 앞두고 세례 받을 성도를 교육시키는 기간에서 유래했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사순절이 부활절을 주목하고 있고, 이 기간이 또한 ‘세례’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깊습니다. 사순절 4주 주일 아침, 세례를 받은 성도임에도 교회 밖 일상에서 우리의 걸음은 여전히 절망과 불행에 사로잡힐 때가 많고, 그토록 오랜 신앙생활에도 불구하고 삶의 지향을 주님을 향하지 못했던 시간을 반성합시다. 이전의 삶은 십자가위에서 죽음으로 수렴키시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매일 준비하고, 익어짐으로 다시 사는 부활의 기쁨이 회복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 동안 ‘행복’에 대한 각종 조사에서 늘 하위권에 뒤쳐져있을 만큼 우리는 스스로를 ‘불행’하다 여기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 ‘불행’의 이유로 삼아왔던 것들은 돈이 없거나, 건강하지 않고, 성공하지 못했다는 정도입니다. 이처럼 소유하고 성취하는 것들을 행복의 근거로 삼게되면, 늘 누군가와 스스로를 비교하는 방식에 사로잡힐 수 밖에는 없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 누구를 대상으로 삼는가에 따라 ‘행복’이나 ‘불행’이 나뉘게 된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나보다 못한 이를 대상으로 삼으면 만족해하고, 나보다 잘난 사람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불행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어떤 상황, 또 누구와 비교를 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순간 우리의 행복이 결정되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 행복도, 불행도 우리 스스로 선택한 결과였을 뿐입니다. 그 결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이 주어져 있음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결국은 내 손을 떠난 이후에 후회하는 안타까운 일상을 반복합니다. 삶을 향해야 하는 감사와 감격은 모두 사라지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부족한 것만 찾으니 자꾸만 스스로가 불행하다 여기게 되고, 그러다보니 타인의 행복에 불만스럽고 불행에는 스스로를 자위하는 지경으로까지 전락하고 맙니다. 자신을 ‘무엇’과 비교하도록 강요하는 악마적인 힘은 우리 안에 뿌리내린 욕망과 욕정에 기생하면서 오늘도 우리 자신과 세상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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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민수기 21장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스라엘 진중에 불뱀이 나타났고 물린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불뱀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성서기자가 전하는 말이 우리 마음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죽이시다니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이 상한 것이 발단입니다. 곧장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될 것을 에돔을 끼고 우회, 돌아가게 하셨던, 하나님의 선택하신 길, 자신들을 인도하시는 방식이 불만스러웠던 겁니다. 형편이나 사정이 넉넉했다면 모르지만 지금 그들이 걷는 길이 광야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길은 불편하고, 이렇게 돌아가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의 변명일 뿐임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 민수기 21:5
그러고보니 그들은 먹을 것이 있었습니다. 다만 주어진 음식이 하찮을 만큼 맘에 들지 않고 싫증이 났다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그들은 출애굽 이후 신광야에 이르렀던 첫 여정부터 ‘굶어죽겠다’는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양식이 바로 ‘만나’였습니다. 제 힘으로는 아무리 애를 쓰고 수고를 해도 한끼의 양식도 구할 수 없는 광야에서 그들은 하늘의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먹꺼리 덕분에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입성을 목전에 둔 지금은 막상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고, 너무 익숙해져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기 시작하니 보잘 것 없어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너희는 죽지 말고 오늘을 살아내라’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일용할 은혜가 원망의 이유가 된 것은, 은혜를 마땅한 것으로 여기는 순간에서 비롯했습니다. 정성을 다해 전해준 선물을 싸구려라고 집어 던진다면 심각한 모멸감을 느끼게 될 겁니다. 누군가 호의로 베푸는 것을 무가치하게 대하는 것은 그 상대를 업쑤이 여김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멸시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입니다. 은혜가 불만이 되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오만함의 자리를 찾아온 것은 불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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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을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천성이 악하고 그릇되었기 때문이라 보면 않됩니다. 우리라고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일단 받은 은혜, 빚진 마음을 쉽게 잊는 것이 우리 본성입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말이 허투루 나온 말이 아닙니다. 늘 ‘감사’라는 말을 하고는 입에 달고 살지만, 실재로 하나님께 감사하는것에 진실하지도, 익숙하지도 않습니다. 감사함으로 받은 것을 만족하고 은혜로 인해 기뻐하기 보다는, 현실에서 얻지 못한 이익에 아쉬워하고 원망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우리 입니다. 밥상앞에서 드리는 감사기도가 타성으로 전락한지 오래라는 것이 이 사실을 뒷받침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의 풍조에 익숙해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육체의 욕심을 따라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온 탓이라고 지적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 엡 2:2
찾아든 불뱀앞에서 그들은 속수무책일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하고 몸부림을 쳐도 독이 퍼져가는 것을 앞당길 뿐입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피조물이었다는 사실을 절절하게 깨닫는 순간입니다. 꼭 스스로 택한 걸음이 무너지고, 깨지고, 상했을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하나님을 찾는 우리네 모습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그들이 당신께로 돌이키고, 복된 삶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다시금 은총의 길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장대 위에 매달린 놋뱀’을 쳐다보는 겁니다. 이보다 쉬운 방법이 또 없습니다.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 민수기 21:9b
놋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모두 살았다는 말은 그러나 쳐다보지 않고 죽은 이들도 있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누구라도 볼 수 있도록 놋뱀이 장대위에 높이 올려졌으니 힘이 없어서, 길이 멀어서 보지 못했을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죽게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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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약간의 상상력이 사용해서 우리가 그 상황에 있다고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불뱀에게 물린 독이 온 몸에 퍼져나가고 죽음이 다가오는 위급한 순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이라며 지도자 모세가 전한 이야기는 ‘장대에 걸린 놋뱀을 보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것 뿐입니다!!! 상식에 맞질 않는 소리, 형편없고 하찮은 말일 뿐입니다. 어이가 없고, 꼼짝 없이 이대로 죽는구나 생각하거나, 해독제를 달라고 아웃성을 쳤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이런 상황에 방치하신 하나님을 원망다가 죽었을 까요?
그 상황에서 살게 된 사람들은 모두 모세의 말대로 놋뱀을 쳐다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떠했을까요? 말씀을 따라 고개를 치켜들고 놋뱀을 보고 있노라니 저도 모르게 자신들을 물었던 불뱀에 물렸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을 겁니다. 그리고 생각이 거기에 미쳤을 때, 어쩌다가 자신들이 불뱀에 물려 죽게된 것인지를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살라’고 베풀어주셨던 은혜를 무시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멸시했던 탓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죽는 존재라는 뼈져린 깨달음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나았던 걸까요? 놋뱀 자체에 치료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놋뱀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방법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셨다면 놋뱀이 아니라 빈 막대기 뿐이이도 충분합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놋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쳐다본즉 살았더라’는 말씀이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선착순으로 달려와 놋뱀의 머리를 만지라거나, 긁어서 차를 끓여마시라거나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왜? 놋뱀을 쳐다볼 것을 요구하셨던 것일까요?
사실, 놋뱀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일상의 은혜를 무시해서 불뱀에 물릴 수 밖에 없던 자신, 즉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먼저 선행해야 할 것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탐욕과 욕망에 물들어 하나님을 멸시하고 그의 은혜를 하찮게 여기던 제 자신의 죄를 직면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허물과 무능과 죄를 드러내는 것을 불편해하고 싫어하는 것이 우리 본성이지만, 회피하거나 숨기려하거나 무시해서는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에덴에서의 인류의 실패는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앞에서 도망하고,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스스로의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며 회피했다는 것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 요한복음 3:20~21절
허물이 없거나, 믿음의 흔들림이 없거나, 온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늘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 안에 있는 이들의 정체성입니다. 두려움으로 회피하는 것이 아닌, 빛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무능과 죄성을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응답하며 살아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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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빛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까?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 요한복음 3:18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심판은 바로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응답하고 반응하였는가?라는 사실로 결정되는 겁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수능을 치르고 나온 학생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며칠 후면 합격 여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합격여부는 언제 결정되는 것일까요? 시험을 치른 날일까요? 발표날입니까? 발표일에는 합격의 사실을 확인할 뿐입니다. 시험을 끝마친 그 순간, 시험의 결과는 확정되었습니다. 종말에 얻게 되는 생명이나 심판이 오늘의 믿음에 달려있다는 말씀이 이와 같은 겁니다. 심판이 아닌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보냄을 받으신 주님은 바로 '지금' 우리의 응답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는 구원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죄안에 갇혀 있는 존재임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구원이 되시는 주님께만 응답하며 사는 겁니다. 주어진 일상, 그토록 평범해 보이고 하찮다고 여기었던 오늘이, 바로 그 날입니다. 바로 지금이야 말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주목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달리셨던 십자가는 어제의 과거를 기억하라고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무능하고 무익한 자기 자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으로 감당하실 수 밖에 없었던 죽을 수 밖에 없는 제 자신의 실존의 밑바닥을 직면하기 위해 세워져 있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사순절의 기간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주님의 십자가를 향하십시오. 그곳에서 처절한 내 자신과 능히 구원하실 주님의 은총을 발견하십시오. 주님을 바라보는 이들을 하나님은 반드시 구원해 내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니,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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