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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0 성령강림후 1주 '삼위일체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1. 5. 27. 22:40
성서일과
1독서 | 이사야 6:1 ~ 8
응송 | 시편 29
2독서 | 로마서 8:12 ~ 17
3독서 | 요한복음 3:1 ~ 17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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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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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주어지는, 새로움
1
신앙은 ‘새로움’으로의 초대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낯설게 들려오는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말했지요. ‘이전의 것은 다 지나가버리고 없다’고 했으니, 이 새로움은 이전의 것과 완전히 결별한 수준입니다. ‘죽음’에 삼키워지는 무력한 삶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부활’도 그렇고, 애쓰고 수고함으로 세상과 삶의 노예처럼 살던 인생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살게 되었다는 ‘구원’도, 모두 따지고보면 ‘이전’과 다른 전혀 낯설고 새로운 삶의 차원으로 들어섰음을 말하는 겁니다.
교회가 ‘왜 이 모양이 되었느냐?’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결국은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왜? 우리 삶의 방식은 변하지 않느냐?는 책망일 수 밖에는 없는데, 아무리 보아도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 개개인의 삶은 별반 달라진 것도 또 달라질 것도 보이질 않으니, 때만 되면 개혁과 운동을 벌이고 있음에도 한번 곤두박질친 교회의 모습이 새로워질 조짐은 요원하기만 해 보입니다. 여전히 복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심드렁해졌습니다. 간혹 신앙 만능의 열광주의에 빠지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기도를 한다거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열패감이나 신앙불감증에 떨어지고 만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왜? 복음이 삶을 바꾸지 못하고, 교회를 바꾸지 못하고,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2
삼위일체 주일 요한의 복음서 본문에는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유대 산헤드린 위원으로 유대사회의 유력하고 저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유대교인으로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와 예수님과의 만남은, 율법주의와 복음의 만남이며,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의 만남의 차원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 삼아주시고 스스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 언약의 관계를 체결해주셨고, 그 매개는 ‘율법’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는 분이되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법을 받은 이들이 된 겁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계명을 지켜내는 민족이 되었다는 자부심 탓에 관계의 매개였던 ‘율법’에 마음을 빼앗겨버리고 말았습니다. 애당초 하나님께서 인간과 관계를 맺어주셨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런 경이로움에 초대를 받았음에도 스스로 해야할 숙제만 잔뜩 짊어진 셈입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열심을 내도 율법을 지켜내는 것에 자꾸만 실패만 합니다. 명령도 지켜내지 못하고, 금지를 준수하지도 못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백성이라고 큰 소리는 쳤는데 삶은 그와 전혀 관계 없는 가식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법을 얼마나 잘 지켜내고 있는지 모르니 불안하고, 불안하니 자꾸만 조급함에 자신을 몰아세우게 됩니다. 무언가 괜찮고, 잘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만 안심이 됩니다. 그래서 자꾸만 증거와 표적을 찾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열심의 중심에 있는 것은 ‘나’일 뿐입니다. 이 만큼 잘해내고, 이 만큼 훌륭한 ‘자신’을 찾는 겁니다. 하지만 증거와 표적은 결코 우리를 자유케 해줄 수 없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오늘날도 죽을 병에 걸렸던 사람이 살아나는 일을 경험하고도 하나님을 떠나는 일도 수 없이 많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안심하지 못하고,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세상 보다 크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보이는 세상을 다 채워도 더 채워야만 한다는 허무와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실패의 역사를 반복해 오면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는 반성에 이르렀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끊임없는 회개의 촉구가 있었습니다. 회칠한 무덤같고, 독사의 자식들 같다는 책망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마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물 세례’의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온전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해라’는 식의 이런 반성의 촉구도 결국은 애를 쓰고 수고함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니 그렇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의 함정입니다.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법을 지켜낼 수 없다는 실존의 고백이 우리의 최선입니다. 그래야 제 힘이 아닌 ‘은총’이 가져다 주는 자유와 해방의 가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3
여전히 율법의 덫에 자꾸만 걸려드는 것은 우리 본성외에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거나,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며 살게 되었다는 복음이 일상에서는 그닥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 때문입니다. 급성 천식으로 호흡곤란으로 고통받던 이가 숨통이 틔었을 때 실감하는 기쁨과 달리 일상에서 공기의 가치는 우리에게 돈 몇푼보다 귀하질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가장 귀한 것들을 마땅한 것으로 여긴 탓입니다.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소유하거나 이루어 남보다 더 나은 존재임을 확인받아야만 만족하게 됩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자유나 복음을 가치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강압과 규율, 율법주의의 짐을 짊어질 때 오히려 더 만족하고 안심합니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마음껏 누려보십시오’ 라는 초대보다는 성경을 몇장 읽고, 전도를 몇시간 하고, 어떤 봉사를 하라는 숙제를 더 편안하게 느낍니다. 이 만큼 해냈다는 안도감이 좋은 탓이고, 그렇지 못한 이를 보면서 만족감을 누리려는 ‘자기의’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업적’, ‘자기만족’으로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무엇이나,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것들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중에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런 절망에서 우리는 복음을 듣게 됩니다. 어떤 소식입니까? 우리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해주실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요한복음 3:5
보이지도 않고, 어디에 계신지 조차 모르는 ‘성령’에 의해서라는 주님의 말씀이 너무 막연하고, 허무하다고 생각하셨다면, 아직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영생’의 깊이에 닿지 못한 겁니다. ‘성령’에 의해서라는 말씀을 곱씹어 보십시오. ‘성령’은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에 의해서만’이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앞에서 우리 모두는 빈부, 귀천, 연령, 민족 그 어떤 기준에도 구속당하지 않고 평등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전적인 은혜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목적은 본문의 후반부 마지막 두 절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요한복음 3:16 ~ 17
성령에 의해서 거듭나야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4
바울은 로마서 8장 13절에서 ‘육신으로 살면 죽고,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몸’을 ‘성령’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바울은 몸을 뜻하는 헬라어로 ‘소마’가 아닌, ‘사르크스’라는 단어를 선택합니다. ‘소마’는 말그대로의 육체를 말하지만, ‘사르크스’는 개념이 조금 다릅니다. ‘사르크스’는 하나님의 통치, 하늘의 질서에 속하지 않은 모든 속된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돈을 벌고, 유명해지고, 성공하는 탐욕을 채우기 위한 모든 것이 ‘육체’, ‘사르크스’ 에 속한 일들인 겁니다. 그러므로 그에 반대되는 ‘성령’에 속하였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 나라’의 통치원리를 삶의 방식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음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두려워하는 양자의 영을 받은 이들은 세상을 따르며 사는 이들이고, 반대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이들은 양자의 영을 받은 이들입니다.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열심을 내고 힘을 더할 수록 종은 주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런지 불안과 염려에 사로잡힐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녀가 됩니다.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열사람의 몫을 감당한다고 해도 종은 종일 뿐입니다. 자녀는 그의 능력이나 업적으로가 아니라 자녀이기 때문에 존중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자녀된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또 내일을, 다음을 어떻게 살아내야하는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녀'인 것 자체가 복이고, 자유이고, 기쁨입니다.
자녀된 우리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특권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으레 우리는 ‘상속’이라고 하면 ‘상속물’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율법주의에 물들은 본성 탓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상속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유의 주재로부터 상속자로 인정받았고, 그때 주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 로마서 8:17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영광’이지만, 한 편으로 ‘고난’도 함께!라는 말이 불편합니다.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속으로 주시는 영광과 고난을 오해합니다. 고난이 우리가 받은 상속물이라는 것이 거북하다면, 그래서 ‘고난’은 읽지 않고 지나쳐버리고 싶다라면 우리는 상속물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땅의 것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고난’의 의미를 하나님의 상속물로 바꾸어주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고난’안에 하나님의 구원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이시지만, 기독교 신앙은 여전히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믿음으로 붙들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고난이고 고통입니다. 왜? 십자가이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입니까?
십자가라고 하는 절대의 고난, 죽음의 힘앞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과 일치되어 계셨습니다. 그의 온 맘과 영혼은 십자가위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했던 것이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외에 누구도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됨을 경험하신 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만이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을 우리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같은 운명 공동체로 받아들이며 사는 것, 그 안에서 경험하는 하나님 경험이야 말로, 하나님과 일치되는 구원의 경험인 겁니다.
가만히 돌아보십시오. 실재로 극심한 고통이 찾아오면 정작 문제 자체는 고통스럽지만 그 순간, 우리를 우겨싸고, 삶을 힘겹게 하던, 수 많은 문제들이 일순간 별 것 아닌 것처럼 흩어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평상시에는 자신의 삶을 행복하지 못하다고 여기게 만들던 문제들이었는데 없는 것처럼 여겨지니, 고난은 비로서 우리를 그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문이 됩니다. 우리도 고난의 때에 이르러 절절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모두 십자가의 달리신 예수 덕분입니다. 여전히 세상이 귀하다고 하는 것, 그것보다 내가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 채 살고 있고, 하나님의 구원을 믿지 못하고 ‘고난’을 회피하려만 한다면 ‘거듭남’은 아직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5
거듭남이란 ‘위로부터 임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지요? 힘을 모으고, 개혁을 하고, 규칙을 세우고, 업적을 쌓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총이 우리를 살려냅니다. 하늘로부터 은혜가 부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그 때가 언제인지, 또 어디로부터 시작되어 삶을 덮어 올른지 또한 알 수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바람이 임의로 불지만 바람이 있었음은 흔들리는 가지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그렇게 바꾸어 내실 것이라는 사실 뿐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 ‘삼위일체’는 학문의 목적도 아니고, 게다가 우리 수준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정의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노력은 우리 신앙에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삼위일체는 삶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어야만 합니다.
돌로 떡을 만들고, 성전 꼭대기에 이르는 영광이나, 세상을 얻으라고 말하는 세상을 따르지 않고 예수 따름의 삶을 따라 살게 되면, 언제인지 알수는 없지만 머리 둘 곳도 없어 망할 것 같아 보이는 그 걸음 끝에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를 믿고 나아가는 이라면 누구라도 빗겨가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위로부터 하나님에 의해 부어지는 것이기에 언제나 ‘은총’ 사건입니다. 길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 길에 선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시는 성령, 반드시 우리를 만나주시는 성부 하나님까지, 어느 한 만남이라도 결핍되어 있다면 우리는 영생의 구원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해야하는 것은 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고, 믿고, 따르는 것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만 할 수 있습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겨우네 얼어붙은 땅이 봄 바람에 시나브로 녹아내리듯, 영생의 기쁨으로 이끄시는 생명의 훈풍이 우리 영혼을 채울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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