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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6 부활절 제7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1. 5. 14. 16:02
성서일과
1독서 | 사도행전 1:15 ~ 17, 21 ~ 26
응송 | 시편 1편
2독서 | 요한 1서 5:9 ~ 13
3독서 | 요한복음 17:6 ~ 19.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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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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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st Sermon of Our Lord, 1886-1894' _ James Tissot '예수 부활' 을 증언할, 사람
1
오늘은 교회력상 주님의 부활절 이후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몇 걸음만 더 나아가면 우리는 ‘성령강림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동안 성서일과는 1독서로 구약본문을 읽었었는데, 부활절 기간에는 ‘사도행전’을 1독서 본문으로 읽었었지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교회의 본질이 ‘부활’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신앙하는 모든 일이 ‘부활’에서 비롯한다는 뜻이고, 달리 말하면 ‘부활’과 관련 없는 어떠한 것도 신앙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던 놀라운 사건이나, 성탄절이나 사순절과 같은 교회의 절기 가운데 하나라는 의미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도 않을 뿐더러, 오늘의 내 삶과는 무관한 ‘신화’처럼 여기고 있는 탓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부활’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바울은 왜? 부활을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였는지, 예수의 ‘부활’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인지, 그리고 대체 우리는 어떻게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인지 질문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 성서일과 독서본문을 통해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우리를 부르신 은총이 기쁨으로 경험되고, 먹먹했던 가슴이 벅찬 소망으로 힘차게 뛰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2
1독서인 사도행전 본문은 새로이 사도를 선출하는 교회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래 주님이 세우셨던 사도는 열둘이었으나 가룟 사람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고 목숨을 끊은 이후, 그 자리는 계속 비어 있었습니다. 부활 사건을 경험한 이후 다시 결속하기 시작했던 교회 공동체가 처음 한 일이 바로 비어있는 사도의 자리를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을 들여다보면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사도’가 될 수 있는 조건, 다시 말해 무엇을 하는 이가 사도일 수 있는가라는 정의입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 사도행전 1:22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유일하게 사도의 조건으로 삼은 것, 그러니까 사도의 사명이란 ‘주의 부활을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후보로 요셉과 맛디아를 세우고, 둘중에서 제비를 뽑는 방식으로 사도를 택했습니다. 사사로움이 개입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려는 진중함이 엿보입니다.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중에서 후보를 뽑았다는 말을 통해, 두 사람이 이미 다른 사도들과 같은 사명에 참여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맛디아’가 새로운 사도로 선출되었다고해서 요셉이 맛디아 보다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사도로 선출되지는 못했지만 이미 사도로 선출될 것을 추대받았을 만큼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서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살아온 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튼 맛디아가 유다를 대신해 12사도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이제부터 그가 ‘부활을 전하는 사람’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요?
큰 거리로 나가 큰 소리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외치는 것을 말할까요? 아니면 로마 황제앞에서 복음을 외치다 장렬하게 순교를 해야하는 것일까요?
3
두번째 살펴볼 복음서의 내용은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제자들을 위해 절절한 마음으로 드리는 주님의 기도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 대상이 제자들을 뛰어넘어 오늘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 땅에 남겨진 모든 이들을 향하고 있기에, 이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대사제의 기도’라 불리우고 있습니다. 기도의 주된 내용은 두 가지 입니다. 첫번째 주님을 통해 하나님과 연결된 모든 이들을 보호해 달라는 것과, 두번째 하나님과 주님이 하나이셨던 것처럼 위하여 기도하신 이들 모두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요한공동체의 성도들은 주님의 이 기도문을 통해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그들 자신의 간절한 기도문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나아갔을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왜 이렇게 기도 하셨느냐?’는 물음은, 대체 요한공동체의 성도들이 ‘왜 주님이 드리셨던 이 기도를 하나님께 올릴 수 밖에 없었는가?’라는 물음의 답에서 찾아야만 합니다.
1세기 즈음, 로마에 의해 성전이 훼파되어 예배의 구심을 잃어버렸던 유대인들은 바리새파를 중심으로 경전 중심의 유대교 신앙을 강화해갔습니다. 그 와중에 초기 교회 공동체는 유대교로부터 율법을 가볍게 여기는 이들이라는 이유로 핍박과 박해를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기독교 공동체를 향한 로마의 박해도 극심해져가던 때였습니다. 박해와 환란이 덮쳐오는 이런 시기에 신앙을 지켜내며 산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목숨을 지켜내기 위해 변절하기 쉽고, 그렇지 않더라도 오랜 박해 속에 믿음이 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님이 드리셨던 이 기도문을 기억하였고, 또한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 절체절명의 순간을 버텨낼수 있었습니다.
당시 성도들에게 보호를 구하는 것과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 중에 더 시급하고, 간절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위급함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결과는 반대입니다. 이미 교회는 예수를 통해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에 이어져있는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핍박이나 환란은 지금이 아니어도 언제고 우리 삶을 위협해 올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분명히 알았기에, 오히려 죽음을 무너트리는 ‘부활’에 기대고, ‘부활’하신 주님께 이어지는 것에 더 간절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교회는 끊임없이 자신들의 처지를 예수님과 일치시키는데 집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들이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짊어진 공동체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라는 죽음이 덮쳤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키셨던 것처럼, 같은 운명안에 있는 자신들도 하나님이시라면 능히 살려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던 겁니다.
초대교회의 믿음이라는 것, 그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모두 그를 살려내신 하나님을 향한 신뢰였습니다. 속절없이 무너졌던 제자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꿋꿋하게 대환란의 시대를 이겨내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은 ‘예수 부활의 경험’이었습니다.
4
요한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 요한일서 5:11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다는 것, 즉 ‘부활’의 주님을 믿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들도 교회도 예수의 ‘부활’을 삶의 토대와 근거로 삼았던 이들입니다. 우리도 역시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있지만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보여준 삶과 오늘 우리들의 삶의 결은 전혀 닮아 보이질 않습니다. 예수 부활을 증언하는 이가 사도라고 했으니, 그렇다면 우리도 ‘사도’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이런 차이는 실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라고 내 삶을 꿰뚫고 터져나오는 부활 경험이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들어서 알고, 유추해서 알고, 지식으로 헤아려보는 앎이 아닌, 부활의 첫날 빈무덤앞에 섰던 여인들이 경험했고, 어둑한 방안에서 제자들이 경험했던 그것, 낙망한 채 엠마오로 향하던 길에 마주쳤던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부활하신)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숱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예수 부활의 경험이 부재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활은 주님안에서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므로 주님을 주목할 때만 경험할 수 있음에도, 그 동안 현실이 보여주는 것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고, 일상을 과잉으로 내모는 삶에 순응해 왔던 탓 입니다.‘부활’은 ‘죽음’에서 ‘생명’을 만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따름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부활’을 끌어안고 산다는 것은 ‘죽음’과 ‘생명’을 깊이 묵상하는 삶이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죽음앞에 있는 존재임을 생각하며 살게 된다면, 죽을 것처럼 몰아닥치는 두려움이나, 부러움이나 질투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욕망들처럼 우리가 절대시여기는 모든 것들이 상대화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겁니다. ‘하지 않으면 않된다’거나, ‘해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길은 ‘죽음’ 뿐이기에 ‘죽음’을 통해서 바라볼 때만 삶이 해방될 수 있게 됩니다. 또 ‘나는 왜 소멸되거나 죽지 않고 살아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면 할 수록, 주어진 모든 것이 선물처럼 귀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게 될 겁니다. 삶과 죽음에 예민해질 수록 예수 부활 사건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5
교회가 사도의 조건으로 삼은 것은 ‘예수 부활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증인이 되는 것이니 우리도 그리 살아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과연 부활을 증언하는 것일까요?
‘증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스’에는 ‘순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증인이란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주장하기 위해 순교를 무릎쓴다는 뜻이니, 결국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이란? 예수 부활을 증언하기 위해 순교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 됩니다. 아찔하시지요? 오늘 우리 삶에서 ‘순교’란 어떤 것일까요? 선교 불모지에 목숨을 걸고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걸까요? 주님은 당신의 기도안에서,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악에 빠지지 않고 보전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5:15)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 이곳임이 분명해집니다. 죽음이 발견되는 땅위에서 다시 사는 부활의 증언은 외쳐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교’는 ‘죽음’의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물리적인 죽음 이전에 당사자는 제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 ‘순교’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오늘 내게 주어진 삶안에서 예수 부활 사건, 즉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시는 하나님께, 죽음을 깨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 자신의 운명을 걸고 살아가는 것이어야만 하는 겁니다.
운명을 건다는 말은 허투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운명을 건다는 것은, 일희일비하면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아닙니다. 좋을 때는 좋고, 부담이 되면 버릴 수 없습니다. 손해 보는 것 같고, 별볼일 없어 보이고, 세상이 부럽고, 이 길 끝이 두렵다고 돌아설 수 없는 길입니다. 상대에게 자신의 운명을 걸었으니 결혼 이후의 상황이나 여건이 어떻게 펼쳐지더라도 ‘함께’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예수 부활에 운명을 걸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이든 부활이든,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의 기도문을 자신들의 기도로 붙들었던 것처럼 이미 그리스도로 인해 한 운명 공동체되었음을 믿고, 자신의 모든 삶을 예수께 일치시켜가는 겁니다.
목사인 저로서의 최선은 설교를 하고, 전도를 하거나, 기도하고, 목양하는 모든 일의 근거를 예수 부활에서 찾아내는 것입니다. 교회를 성장시키고, 성도를 늘리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자리에 오르는 것은 저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아닌, 오직 예수 부활안에서만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비트코인에 투자를 하고 부동산 투기와 같은 욕망의 광풍에 마음을 빼앗기는 세상과 달리, 우리는 모두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예수 부활에 일치시키면서 성실하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런 걸음이야 말로 예수를 믿고 있음이 증거로서 드러나는 삶, 예수 부활을 증언하는 사도적 증인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용기를 내십시오. 삶이 아무리 거칠고, 세상이 아무리 커보여도 기죽지 마시고, 하늘을 올려다 보십시오. 땅이 제 아무리 커도 하늘을 덮을 수는 없는 겁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주님께 인생을 거십시오. 예수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 못하였으니 어찌할까 지레 포기하지도 마십시오. 증인의 가치는 그가 얼마나 잘 생겼는지, 인품이 얼마나 뛰어난지, 능력이 있는지가 아닌, 그가 보고, 듣고, 경험한 사건에 달려 있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도, 예수의 부활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차별하지 않고 찾아내어 부활하신 주님을 볼 수 있도록 눈을 열어주시는 이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던 성령께서 시련과 환란을 넉넉한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도록 우리의 오늘을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복된 날로 건져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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