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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7 성령강림후 24주카테고리 없음 2021. 11. 2. 16:08
성서일과
- 룻기 3:1~5; 4:13~17 혹은 열왕기상 17:8~16
- 시편 127 혹은 시편 146
- 히브리서 9:24~28
- 마가복음 12:38~44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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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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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손' 을 통해, 보게 되는 것
1
선거철만 되면, 여당 야당할 것 없이 어제나 오늘이나 후보들이 내세우는 약속은 한결같이 ‘국민을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시대가 가고, 세월이 변해도 저들의 말은 바뀔줄 모릅니다. 그래서 이제는 실재로 그들이 어떤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뻔히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표를 줄 사람입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는 즉시 그들이 찾는 사람들은 속절없이 바뀔 것입니다. 자신을 후원해줄 수 있는 사람, 정치적 입지에 도움이 될만한 힘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약속은 (公約)이 아니라, 대부분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는 빈 약속(空約)에 그치고 맙니다.
이와 달리 말씀이 우리의 시선을 이끄는 곳은, 다가올 '겨울나기' 걱정이 깊어지는 이웃들의 삶, 오늘 성서일과 독서에서 만나게 되는 여인들의 처지가 겹쳐지는 곳입니다. 룻과 나오미, 열왕기상에 등장하는 사르밧 과부, 두렙돈을 봉헌한 복음서의 여인까지 공통점은 모두 과부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특히 성서에서 언급되는 ‘과부’는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대명사입니다. 서럽고 아픈 이들입니다.
2
복음서의 배경이 되는 1독서 선택본문인 열왕기상 말씀을 먼저 살펴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만이 구원자이심을 보이기 위해, 엘리야를 북왕국 아합왕과 이세벨에게 보내어 삼년 육개월간 가뭄을 내릴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엘리야는 도망을 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저주를 풀기 위해 저주의 원인이 되었던 엘리야를 아합왕이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요단 동편 그릿 골짜기에 숨어 까마귀들이 가져다 주는 음식을 먹으며 연명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릿에 머문지 얼마되지 않아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떠나게 하셨습니다. 극심한 가뭄으로 골짜기의 시냇물까지 말라버렸기 때문입니다. 목적지는 ‘사르밧’이라는 곳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에 엘리야는 선뜻 나서지 못하고 주저합니다. 갈등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우선 ‘사르밧’은 악한 왕비 이세벨의 출신지인 시돈에 속한 땅입니다. 이스라엘을 이렇게 만든 원수들의 근거지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두렵기도 하지만 꺼려지는 일입니다. 또 한가지 이유는 그곳에서 엘리야가 먹고 살 수 있도록 예비해놓으신 사람이 ‘과부’라는 점이었습니다. 가난한 과부에게 의지해서 먹고 살라니, 차라리 지금처럼 까마귀를 통해 먹을 것을 공급해주시면 되지 않나 싶습니다. 굳이 고생해가면서 원수의 땅까지 가야하는 것인지도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의미없는 길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이시니 그는 길을 떠났고, 마침내 사르밧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정말 성문에 이르렀을 때 나뭇가지를 줍고 있던 한 여인과 마주치게 됩니다. 누가보아도 하나님이 예비하셨다는 그 여인이 틀림없습니다. 엘리야는 이 여인이 예비된 그 인지 떠보았습니다.
‘마실 물 한 그릇만 떠다주십시오’ (10)
순순히 물을 뜨러가는 모습을 보니 틀림없다 싶었는지, 내친김에 ‘먹을 것도 좀 가져다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여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먹을 것을 주라고 일러두었다’고 하셨지만, 여인은 금시초문인 듯한 표정입니다. 오히려 엘리야만 낭패에 빠진 셈입니다. 남아 있는 밀가루 한 줌, 병에 남은 몇 방울의 기름을 죽기전에 아들과 함께 먹을 마지막 음식으로 삼아야 할 만큼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를 위해 땔감을 준비하러 나온 참이었습니다. 명색히 하나님의 사자가 이런 가난하고 불쌍한 여인에게 빌붙어 기근을 연명하며 살라니요? 이건 분명 하나님의 실수가 틀림이 없습니다.
3
그런데 그의 다음 요구는 더 가관입니다.
‘음식을 만들어 나에게 먼저 가져오시오’ (13) 과부 모자가 마지막으로 나누려고 했던 그 서러운 식사를 자신에게 먼저 내놓으라니, 어찌 그리 뻔뻔할 수 있는 것인지 해도 너무합니다. 천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엘리야! 당신이야! 소리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억지스럽고 터무니 없는 요구를 했던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비를 내려 주실 때까지, 그 뒤주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왕상 17:14
지금 엘리야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고 있던 겁니다. 저라면 쉽게 하나님의 말씀이라 믿지도 못했을 겁니다.
여튼 이제 선택은 여인의 몫으로 주어졌습니다. 어찌할지는 모두 여인에게 달려있는 겁니다. 그녀의 선택에 따라 예비하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곧장 마지막 음식 준비를 시작했고 곧 떡 한조각을 엘리야에게 봉헌합니다. 엘리야가 전한 말씀만 믿고 자신과 아들의 생명을 담은 몫을 고스란히 바친 일생일대의 봉헌인 셈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면 그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건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순종할 마음, 말씀을 향한 믿음을 불어넣어주신 결과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말씀에 순종한 결과, 엘리야의 말처럼 떡반죽 그릇과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았고, 그녀와 아들, 그리고 엘리야까지 삼년 육개월의 가뭄에서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서로를 전혀 알 수 조차 없었고, 또한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전혀 알지 못했던 그들의 만남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은 살림의 역사를 이루신 겁니다.
4
복음서의 말씀은 지난주에 이어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신 주님께서 정치, 종교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 율법학자들, 산헤드린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시는 대목에 이어집니다. 본문 첫단락에서 주님은 그들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 마가복음 12:38~39
이들은 모두 위선자들입니다. 백성의 지도자 행세를 하면서 성전 체제 최고의 수혜를 받던 그들은, 정작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던 장본인들입니다. 성전 경내에 있는 ‘여인들의 뜰’ 한켠에는 성전보물창고가 있고, 그곳 벽면에 헌금궤 13개가 놓여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헌금궤 한켠에 서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깔때기처럼 입구가 넓은 헌금궤안에 떨어지는 동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몇푼이나 넣었는지 가늠해 보는 것이 그들의 일입니다. 과부가 내는 헌금만 보일 뿐 그의 형편과 삶은 보려하지 않는 삯군들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조심하라’ 하신 이유가 분명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봉헌하는지, 그 안에서 드리는 이의 형편과 삶에 주목하시는 예수님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이 말씀뒤에 두 렙돈의 헌금을 드린 과부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노파심에 말씀드리지만, 이 말씀은 가진 재물을 모두 봉헌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렙돈의 값어치는 한 데나리온의 128분의 1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정도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천원이 갓 넘은 금액을 드린 겁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눈에는 얼마나 작은 금액으로 보이나요? 렙돈 두 닢이 봉헌함에 떨어지는 소리에 종교지도자들의 인상이 구겨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의 손을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그 여인의 전재산이었기 때문입니다. 외식하는 이들의 눈에 그까짓 것으로 보이던 ‘두닢’의 예물안에서 주님은 여인의 모든 것을 읽어내셨습니다. 어쩌면 내심 주님께서는 ‘아서라 한닢은 남겨 끼니라도 때워라’싶으셨을지도 모릅니다.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의 또 다른 이름은, ‘절실한 모든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도 선택은 그녀의 몫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내 모든 삶을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믿음을 봉헌으로 드렸던 겁니다. ‘기회가 되면’, '이 다음에’라는 말 대신에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단 번에 드린 겁니다. 세월의 간급을 뛰어넘어 복음서의 말씀안에서 만나게 되는 사르밧 과부의 모습입니다.
5
그런데 몹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단 한번의 드림으로 나아갔던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두 렙돈을 바쳤던 과부는 이후에 어떤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을까요? 오늘 끼니는 해결할 수 있었을까요? 그녀의 집 떡반죽 그릇이나 기름그릇에도 다함이 없는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주님이 그곳에 계셨으니 이 가련한 여인에게 엘리야와는 비할 바 없을만큼 큰 이적을 베풀어주실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본문에는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섭섭한 생각이 드는 것은 저 뿐일까요?
불편한 마음을 추스리고 다시 본문을 읽고 또 읽다 불현듯 주님께서 누군가를 바라보고 계시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엘리야가 그리했듯 과부의 곁을 찾아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용기를 가지십시오’ 라고 하나님의 위로를 전해주어야 할 이는, 바로 우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책망하신 이유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당시의 세상은 렙돈 두개에 생명을 의존한 채 살아가야만 하는 가련한 과부를 존재하게 만들었습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이 책망받은 것은 그런 세상의 힘에 편승하고 부역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마지막 식사로 삼아야만하는 사르밧 과부의 눈물은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합니다. 우리 시대를 향해, 그런 서러운 삶을 방치하는 이들을 향해 주님의 저주와 꾸짖음은 지금도 쏟아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가뭄에 다 굶어죽게 된 세상’이라고 원망만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우리 중의 누구도 하나님께 두 렙돈을 봉헌했던 과부보다 가난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을 바꿀 수 없는 이유는 ‘가진 것이 없고 시간이 없고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탓’이라 자기 합리화에 빠진 채, 그저 까마귀가 날라다 줄 이적만 기다리며 그릿 골짜기 한 켠에 무기력하게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 백성다움임을 깨닫고 실천하던 교회가 있습니다. 초대교회입니다.
‘이 시기에 제자들이 점점 불어났다. 그런데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그것은 자기네 과부들이 날마다 구호 음식을 나누어 받는 일에 소홀히 여김을 받기 때문이었다.’ | 사도행전 6:1
초대교회가 연약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책임을 감당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은 사도행전 곳곳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 성도들의 삶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마음의 부담이 되지 않는다면, 결국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우리의 구호라것이 교인의 수를 늘리고, 교회의 위세를 키우는 것을 감추려는 얄팍한 기만에 그칠 수 밖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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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드리는 손위에 무엇이 들리워져 있는지가 아닙니다. 이런 사고야 말로 손에 쥐어진 것을 놓으면 죽을 것처럼 몰아세우는 세상이 요구하는 방식입니다. 일단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나면 하나님의 요구는 들리지 않습니다. 제것이 그렇게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믿음을 드리는 곳마다 도우시는 ‘섭리’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드리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죽음으로 내몰았던 십자가를 온 인류를 위한 ‘부활’의 길로 만들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주님도, 우리손에 들리워진 한 움큼의 밀가루, 얼마 남지 않은 기름 방울, 과부가 드린 두 렙돈, 그리고 어린 아이의 손에 들리워진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도, 믿음을 담아 드려질 때마다 예외없이 받으시고, 넉넉한 하늘 양식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어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시고, 손을 내밀어도 좋습니다. 깨지고, 상한 삶이라 할지라도, 혹은 두 렙돈 가치도 않되어 보일 만큼 비루해보인다 하여도, 주님께 드려진 손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러나 드림을 종교적 선동이나 부담으로 여기시면 곤란합니다. 우리의 드림은, 더 가지고 싶은 탐욕과, 더 가지지 못해 찾아오는 비굴함에서 벗어나라는 주님의 부름에 닿아야 합니다. 주님께 드릴 때,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이 없게 하겠다거나 복지를 향상시키겠다는 수준을 너머, 연약했던 이들이 오히려 또 다른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나누고, 베풀수 있는 부자가 되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허덕이고 그저 하루 하루 연명하며 살던 삶을,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꿈을 전하는 ‘선물’같은 인생으로 구원해내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살고 내일은 죽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던 가련한 여인이었음에도, 사르밧의 과부는 가뭄의 때에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가 생명을 의탁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살 소망마져 깨어졌던 그녀의 오늘을 구원해내는 하나님의 은혜가 되어주었던 것은 또한 ‘엘리야’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렇습니다. 마치 원수처럼 서로에게 날을 세우며 살아가는 세상속에서, 주님께 드려질 때,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선물’같은 존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 손에 들리우게 되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빚어가시는 ‘섭리’가 될 것입니다. 주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일입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옥합을 깨트리고, 삶을 드리는 당신의 손을 찾고 계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