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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05/15 부활절 제5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2. 5. 12. 20:48

    성서일과 본문

    1독서 | 사도행전 11:1-18

    응송 | 시편 148

    2독서 | 요한계시록 21:1-6

    3독서 요한복음 13:31-35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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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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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사랑'과 '새로운 계명'

     

    1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만 합니다. 오늘 응송인 성서일과 응송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2독서인 계시록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하는 당신의 약속을 성취하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왜 하나님을 찬양해야만 할까요? 하나님께서 크고 위대하실 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분이시기에 찬양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이유는 오늘을 살아가야하는 우리와는 동떨어진 동화처럼 들릴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이 고백은 자칫 내가 열등한 존재라서 어찌할 수 없이 굴복해야만  하는 것처럼 들리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유도 없이 찬양하겠다는 말은 헛된 종교성에 함몰된 맹신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 보려고 합니다. 대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찬양해야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부활절기를 보내고는 있지만 오늘 계시록에서 접하게 되는 ‘새 하늘’과 ‘새 땅’ 은 ‘부활’만큼이나 손에 잡히지 않고 가늠하기에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조금 더 평화하고, 조금 더 사람이 살아갈 만한 세상을 만들어 보자고 하는 바램 조차 요원해 보이는 마당에,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라는 말씀이 쉽게 다가오질 않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경험되어지는 사건들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이어져 살게 되면 이전에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 보이던 이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우울한 현실에 낙망하고 마는 우리 자신도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이런 우리이지만 당신의 품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되게 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을 살아가는 이들로 채워가실 겁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2

    복음서 말씀은 주님의 고별설교, 즉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남기신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누구의 것이든 마지막 남기는 말에는 무게감이 담기기 마련입니다. 이 말씀안에는 주어진 생애 전체를 제자들을 하늘에 닿게 하고자 하셨던 주님의 진심, 주님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주님께서 남기신 말씀은 유언이라 하기에는 걸맞지 않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전부입니다. 마지막 명령이 가지는 엄중함에 비해 겨우 ‘사랑하라’는 것이 다인가 싶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 본일이 있는가?라는 물음앞에 부끄러운 자신을 숨겨야만 한다는 조급함이 밀려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남기시는 마지막 말씀이라면 그래도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던가, 그도 아니면 ‘선교나 전도에 모든 것을 걸으라’거나 하다 못해 ‘믿음을 굳건히 지키며 살아라’는 정도의 말씀은 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게다가 따지고보면 ‘사랑하라’는 말씀은 새로울 것도 없는 말씀입니다. 이미 구약성경에도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 레위기 19:18 ) 그런데도 주님은 ‘서로 사랑하라’던 당신의 명령이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한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이 한 말씀 때문에, 눈 앞이 캄캄해 지는 기분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내어주셨던 전적인 희생이셨고, 원수를 끌어안는 무조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계명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지난 주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셨는데, 영낙없이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들을 수 없으니, 주님의 양일 수 없다는 비난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한다는 것조차 무겁고 아득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내 몸처럼 여기는 마음’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제 아무리 타자를 향해도 그런 사랑은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하는 마음을 확장시켜가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런 사랑은 늘 습관적으로 우리 ‘편’과 상대의 ‘편’을 가릅니다. 내 편에서 벗어나는 순간, ‘사랑’은 쉽게 ‘증오’나 ‘미움’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참사랑’을 따른다는 것도 역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미 주님을 통해 참 사랑의 길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보았기 때문입니다. 참 사랑은 늘 고통, 눈물, 울음, 비탄, 자기 희생, 결국은 목숨을 값으로 지불해야만 하는 스스로의 고통을 감수하는 길입니다. 누구에게나 어리석어 보이고, 많은 이들에게 불가능하다 외면당하는 너무 외롭고 고독한 길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외면할 도리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전해주라고 받은 말씀이 아닌, 우리 자신이 그런 말씀이 되라는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무엇하나 허투루 할 수 없는 엄중한 주님의 말씀을 우리 수준으로 따라 걷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입니다. 죽었다가 깨어나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명령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만 따라 갈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말씀이 부활절기에 주어진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참 사랑은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제 자신의 ‘부활’을 살아낸 사람들만이 걸어갈 수 있음을 가르쳐주기 위함인 겁니다. 그렇습니다. 여전히 내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한, 결코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합니다. ‘나로서는 할 수 없다’는 자아의 죽음 뒤에, 다시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시다’는 믿음의 사람으로 다시 살려내는 ‘부활’의 능력이 우리를 주님의 사랑을 닮아가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3

    지난 주에 이어 1독서 사도행전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 심상치 않은 베드로의 행보와 마주하게 됩니다. 지난주 ‘무두장이’ 시몬의 집으로 향해 그와 함께 머물던 그가, 오늘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경건하고 평판 좋은 유대인으로의 인정을 걷어찬 모습입니다.

    이방인과 만나는 것은 불법(10:28)이라는 것은 베드로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넬료는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이방인 동시에, 유대인의 원수였던 가이사랴 지방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의 장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지금 그의 집에 방문한 겁니다. 방문만 한 것이 아니라, 손을 얹고 안수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까지 해주었습니다. 그에게도 처음부터 이 만큼 경계를 넘어온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민족의 원수를 찾아가라는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어, 계속해서 저항했습니다. 심지어는 ‘그럴 수 없다’고 반항하기도 했습니다. 마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십자가를 지실 것이라던 주님을 꾸짖던 그의 무모함이 다시금 고개를 든 겁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고집을 꺾는데는 한말씀이면 충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 사도행전 11:9a

     

    그 한 말씀이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시다’는 절대주권에 대한 믿음을 북돋우어 주었고, 스스로 더럽고 천박하다 여기던 것들에 대한 그의 모든 가치가 전복되었습니다. 이것이 마땅한 겁니다. 그분이 옳다하시면 그르다 생각하던 우리의 생각도, 그분이 그르다 하시면 옳다 여기던 우리의 생각은 모두 폐기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 사도행전 11:17

     

    말씀앞에서 자신을 무너트리고 기꺼이 순종함으로 말씀의 권위를 높여드렸던 그가 어느새 이방인의 경계를 넘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교회가 감당해야하는 마땅한 길이라고 증언하는 멋진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은 말씀앞에서 정치, 종교, 이데올로기와 자기 신념 마져 깨트리는 이들의 순종과 헌신을 통해, 소외와 천대로 내몰렸던 생명들을 구원해 내신다는 것을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 가르쳐주셨습니다.

     

    4

    오늘의 베드로는 이전의 무모하고 비굴하던 모습에 비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꿈만 같은 변화이지만, 이 모든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죽고 다시 사는 생명을 만난 이후에, 이전의 베드로는 죽고 주님의 제자로 거듭나게 된 겁니다. 하지만 주님을 따르는 그의 걸음을 말없이 도우시고, 지켜주셨던 분이 있습니다. 다름아닌 ‘성령’하나님 입니다. 한 말씀에 응답하는 사람이 되도록 그의 마음을 고양시키고 감동주셨던 것도 성령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의심하지 말고 고넬료에게 가라’는 말씀이야 말로 이방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부활하신 주님의 초대였음을 입증해주시기 위해, 그리고 안수하는 그의 손을 통해 고넬료의 가족들에게 임하여 주심으로, 베드로 자신이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드러내 주신 것도 성령이십니다. 왜 부활절기가 곧장 성령강림절기를 향하고 있는지, 부활절기 내내 성서일과 독서가 은근한 시선으로 계속해서 성령께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언하여 주실 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그분의 부활을 볼 수 있도록 눈을 열고, 마음을 열고, 믿음을 독려해주시는 분이야 말로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도우시는 성령의 위로가 없이는 누구도 예수의 부활을 믿거나,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면 성령이 임하실 때까지 멍하니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는 걸까요? 고넬료를 소개하는 첫 대목을 읽어 보면 적어도, 성령께서 어떤 이들을 찾아와 주시는 분인지 만큼은 알 수 있습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탈리아 부대라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다.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유대 백성에게 자선을 많이 베풀며,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 사도행전 10:1~2

     

    그가 어떻게, 그리고 언제부터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성공을 보장하는 길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길을 선택했다는 겁니다. 출세를 하려면 황제를 높이고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높이며 살았으니 출세 대신에 찾아온 것은 오히려 고난과 위태로워진 삶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믿음의 길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만큼 하나님의 나라는 그에게 모든 것이었고, 그에 대한 갈망이 깊었던 탓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명분으로 삼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기 위한 수단처럼 여기는 그릇된 신앙이 판을 치고 있는 오늘, 성령이 고넬료와 그의 가정에 임하셨다는 사실로 부터 우리는 큰 위안을 받게 됩니다. 성령께서 주님과 함께 생명의 길을 걸어가려는 이들에게 어김없이 찾아오십니다. 또 성경은 그런 이들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셨음을 보여줍니다. 까닭이 있습니다. 조롱을 받거나 핍박을 당하고, 때로는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잃게 되더라도 부활의 주님을 바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셔서 어둠에 굴복하지 않고 세상을 밝히는 거룩하게 구별된 빛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이 땅에 심어놓기 위해서입니다.

     

    5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은 모두 예수의 참 사랑을 본 받고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만난 사람이라면,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의 기운을 공급받는 주님의 교회라면 예수님께서 명하신 새 계명으로 나아가는 길이 선명하게 보일 겁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참 사랑을 본받아 경계 밖으로 내몰린 이들까지도 담아내는 그릇으로 빚어내실 겁니다.

    그러고 보면 베드로가 환상 가운데 보았던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커다란 보자기나 계시록에 등장하는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은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들이었습니다. 온갖 부정한 것들이 가득 담겨있던 커다란 보자기 는 사실은 우리가 부정하다 여기는 모든 것들을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보자기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늘로부터 이곳에 임하는 땅입니다. 그곳에는 말씀이신 그분이 계시니 더 없이 아름답고 행복한 위로로 가득합니다. 어떤 이들만 올라가는 하늘이 아닌, 이 땅에 남겨진 이들을 누구도 천박하다고, 더럽다고 소외시키지 않고, 여전히 울고 있는 이들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고 또한 모두의 눈물을 닦아 내시기 위해 임하는 나라입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안수할 때 이방인의 가정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버림받은 이들을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보자기가 드리워졌습니다. 하나님의 한 가족, 한몸으로 받아주시려는 하나님의 참 사랑이 성령을 통해 드러난 겁니다. 게다가 여전히 ‘그리 할 수 없다’는 불신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도,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의 한 가족으로 받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 사람이 막을 수 없습니다’ | 사도행전 11:17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 말씀 앞에 ‘아멘’으로 응답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이 일을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습니다’ | 마태복음 19:26

     

    우리 모두는 이 말씀을 한 몸으로 경험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했던 불신과 차별과 혐오의 벽을 허물고, 주님의 참 사랑에 기대어 살아가는 우리 안에,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임한 나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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