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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2 부활절 6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2. 5. 18. 18:28
성서일과 본문
1독서 | 사도행전 16:9-15
응송 | 시편 67
2독서 | 요한계시록 21:10, 22-22:5
3독서 | 요한복음 14:23-29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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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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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nouvelle Jérusalem (Tapisserie de l'Apocalypse) / The New Jerusalem (Tapestry of the Apocalypse)
다시금, 열려져야 할 나라1.
지난 주에 이어 오늘 복음서 이야기도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남기셨던 고별 설교의 한 대목에서 읽었습니다. 바로 앞 14장의 전반부는 자신들만 남겨지게 된다는 사실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주님이 떠나가시는 까닭이 아버지의 집에 그들의 처소를 준비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그들을 위로하시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준비하시겠다고 했던 ‘영원한 처소’라든가 ‘영생’에 관해서 인생이 끝나거나 세상의 종말이 찾아온 이후 저 세상에서나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천국에 대한 이런 이해는 죽음 뒤 내세에만 천착하게 만들고,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을 벗어내야만 하는 무거운 짐처럼 여기게 만들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은 교회 밖의 어떤 이들이 생각하듯 두려움과 공포의 날이 아닌, 오랜 기다림이 성취되는 기쁨과 환희와 축제의 날입니다. 그 이유는 그 날이나 천국이라는 것이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 동안 자신이 바라던 세상을 살게 되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셨던 그 주님을 다시 만나는 날이라는 오직 한 가지 사실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은 우리의 간절함과는 관계 없이 여전히 열려지지 않은 세계처럼 아득하게만 보일 뿐입니다.
2.
요한 사도가 전하고 있는 계시록 말씀안에는 주님께서 말씀해주셨던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처소인 천국, 새 예루살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해도 달도 없습니다. 밝혀야할 어둠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어린 양이신 주님께서 등불이 되시는 곳입니다.(23)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 강이 흘러넘쳐 모든 아픔과 깨어짐과 상처받은 것들은 치료되고, 다시는 저주받을 일도 없습니다. (22:3)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이나 햇빛도 필요 없는 곳, 남겨져야만 했던 제자들과 오늘 믿음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들이 한 맘으로 갈망하던 바로 그 곳입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에 존재하지 않는 딱 한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성전’입니다. (21:22)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성전이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새 예루살렘이야 말로 ‘천국’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 그곳에는 ‘성전'이 없을까요? 본래 ‘성전’은 이스라엘 진중에 함께 거하시던 하나님을 기리고 예배하기 위한 곳이었으며, 주님을 향한 갈망을 안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사랑과 경배와 찬양이 올려지는 곳입니다. 하지만, 빛되신 그분과 함께 얼굴을 마주하며 살 수 있는 그곳에서, 성전은 더 이상의 쓸모가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말씀이신 주님이 그곳에 계시니, 말씀을 전하는 역할을 맡은 저 같은 목사도, 또한 그분에 대해 증언하는 성경 책도 쓸모가 없어지게 될 겁니다. 어둠속의 초나 등불이 제 아무리 밝아도 태양이 뜨고나면 하등 쓸모 없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등불 되시는 어린 양이 계심으로 그곳은 새로운 예루살렘이고, 주님이 계시니 그 곳은 ‘천국’일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나라를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져다 주실 것이고, 그것을 제자들이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위로의 말씀을 전하셨던 겁니다.
3.
그런데 가룟인 아닌 유다는 왜 자신들에게만 나타내시고 세상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것인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 이유에 대해 주님께 물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내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 | 요한복음 14:23
정작 그 날이 되면 ‘다시 오심을 왜 세상에는 드러내시지 않느냐’는 물음은, 더 이상 쓸모 없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답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날부터는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함께 사시게 되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만천하에 당신께서 다시 오셨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우리 자신이야 말로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그 동안 늘상 하나님께서 우리안에 성전 삼고 계신다고 고백해 왔었습니다. 요한의 계시록이 주님께서 가지고 오실 새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다고 했던 이유는, 그곳에 주님이 성전삼고 살아가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던 겁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은 저마다의 인생이 끝마쳐지거나 세상의 종말이 찾아오는 그날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언제인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 이루어지는가?인 겁니다. 주님을 사랑하여서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안에 있는 이들에게만 주님이 다시 찾아오시는 그날은 ‘현실’의 사건이 됩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주님이 성부와 ‘하나’이셨듯이, 사랑과 믿음안에서 주님과 하나인 이들에게만 드러나고 열리고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주님의 얼굴을 환하게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어서, (셀라)온 세상이 주님의 뜻을 알고 모든 민족이 주님의 구원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 시편 67:1~2
그래서 시편 기자는 모든 세상과 민족의 구원을 위해 무지의 구름을 걷어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얼굴을 비추어 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면 깨우쳐지고 열려지는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닫혀 있던 우리의 눈이 열려지고, 차갑게 식었던 마음이 열려질 때 비로서 우리는 ‘지금, 여기’에 계신 주님을 볼 수 있고, 그분의 나라를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더 이상은 ‘천국’이나 ‘종말’뿐 아니라, ‘영생’에 관해 말할 때마다, ‘이 다음에 언젠가?’, 혹은 ‘다른 어딘가?’라고 물어서는 곤란합니다. 천국은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 찾아오신 주님과 함께 임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주님을 뵙는 것처럼 ‘지금, 여기’에서 그 나라를 발견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이라고 했던 바울 사도의 말처럼 경험되는 나라여야만 합니다. 천국은 가는 나라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찾아오는 나라이고, 그 나라는 진리를 깨우친 이들에게 열려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4.
1독서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열어젖히시는 구원의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복음을 들고 소아시아 지역으로 전도를 떠나려고 했지만, 주님의 영광을 위한 복된 걸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의 걸음을 막으시는 통에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16:6~7)
그때 바울은 바다 건너 마게도냐 사람들이 ‘건너와 도와달라’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이 환상이야 말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확신하 바울은 선교여행의 경로를 바꾸게 됩니다.
바다를 건너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은 유다 사람들이 기도하는 처소를 찾기 위해 성문 밖 강가로 향했습니다. 그곳의 모여든 여인들에게 바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그가 전하는 복음에 반응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던 자색 옷감을 팔던 ‘루디아’라는 여인입니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모두가 말씀에 응답하는 것은 아니며, 수 없이 많은 말씀과 설교가 선포되어도 모든 말씀에 감동하고 응답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가까운 것 같아도 사람의 마음에 닿는 것 만큼 어렵고 먼 일이 또 없습니다. 그러니 루디아가 바울이 전한 말씀에 마음을 열었다는 것은 한 사람의 세계가 열리는 결코 가벼이 지나칠 수 없는 사건인 겁니다. 그래서 누가는 이것이야 말로 ‘주님께서 마음을 열어놓으신 것’이 분명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 자신의 무딘 변화나, 사람을 대하면서 낙심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 맡겨야 할 영역, 주님이 일하실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할 영역일 뿐입니다. 관계에 있어도, 가치관이나 삶의 방향도, 그리고 마음의 문도 주님은 열어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마음을 열어놓으신 곳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주님에 의해 마음의 문이 열린 루디아가 바울 일행을 위해 자신의 집 대문을 활짝 열어젖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빌립보 교회가 시작됩니다. 바울이 이곳까지 이르기전까지, 그리고 루디아가 강가에 나가기 전까지 그들의 만남을 통해 교회를 열고 선교의 길을 여시려는 주님의 세밀한 계획과 간섭하심이 있었지만, 이것을 엿볼 수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일이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길이었음에도 부족함 없이 하나 하나 준비되고 채워지는 모습을 통해 적어도 바울은 주님께서 동행하고 계시다는 확신을 갖기에 충분했을 겁니다. 주님과 함께 함으로 부족할 것이 없으니, 적어도 바울 자신에게 만큼은 매일이 감동이었고, 천국을 살아가는 것 같았을 겁니다. 주님에 의해 마음이 열려진 루디아처럼,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던 바울처럼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린 사람들에게는 지금, 여기에 임한 천국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처럼 천국은 도착하는 나라가 아니라, 열려지고 깨우쳐지는 나라인 겁니다. 이제야 바울이 어떻게 로마의 권세 앞에서도, 세상의 핍박과 박해 앞에서도 늠름하게 믿음의 걸음을 지켜갈 수 있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는 늘 열려진 눈으로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았던 겁니다.
5.
주님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주셨을 때 그녀의 집 대문이 활짝 열린 것처럼, 주님이 가지고 오실 새 예루살렘의 문도 지금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누구에나 활짝 열려져 있어도 아무나 그 문으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속된 것은 무엇이나 그 도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증한 일과 거짓을 행하는 자도 절대로 거기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다만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 요한계시록 21:27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꼭 특별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니 불편해 하실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 집에 들어가는 이들을 멈춰 세우고는 ‘왜 너만 그 집에 들어가느냐, 나도 들어가자’고 억지를 부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들은 주님을 사랑하여 그의 말씀을 따르며 살아온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사람들이 주님이 주인되시는 집에 들어가는 것은 부당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이 말씀 그대로라면 어린 양의 생명책에만 기록되기만 하면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으니, 닫혀있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초대의 말씀이 되는 셈입니다.
주님은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한 방문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서 찾아오시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오시겠다던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해야만 합니다. 애당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이제 하늘을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도, 그분께서 스스로를 낮추어 우리 가운데로 찾아와주신 덕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노예로 길을 잃던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삼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스라엘의 가죽 천막 진중으로 내려와 함께 사셨던 분이십니다. 그러니 새 하늘과 새 땅도, 우리를 위해 예비해두신 하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끌고 와주실 겁니다. 광야에서 씨름하다 주저 앉아도, 죽음 너머 어느 한 곳에서 길을 잃더라도, 주님은 우리를 반드시 찾아내 주실 겁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어디든, 지금, 여기가 바로 주님이 찾아오시는 곳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삶이나 형편이 어떻게 천국일 수 있고, 어떻게 새 예루살렘일 수 있느냐? 고 되묻고 싶으실 겁니다. 아직도 천국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겁니다. 다시 한번 이 말씀을 곱씹어 보십시오.
‘나는 그 안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이 그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에는, 해나 달이 빛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밝혀 주며, 어린 양이 그 도성의 등불이시기 때문입니다’ | 요한계시록 21:22~23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 천국입니다. 예수님 안에 모든 것이 담겨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누구나 평안을 누리고, 생명수 샘물을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버림 받은 모든 땅이 천국으로 변화되고, 저주받은 삶이 기쁨으로 충만해지며, 죽음에 사로잡힌 삶이 영생으로 이어집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 예루살렘은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였습니다. 좌고우면하지 말고, 지쳤다고 주저앉지도 마시고 다시 한번 힘을 내십시오. 하나님을 믿듯이 주님을 믿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에게는,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주셨던 것처럼 이미 우리를 찾아온 그 나라를 볼 수 있도록 눈을 열어주실 분이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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