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22/09/11 성령강림후 14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2. 9. 7. 11:59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예레미야 4:11-12, 22-28 (혹은) 출애굽기 32:7-14

      응송 | 시편 14

    2독서 | 디모데전서 1:12-17

    3독서 | 누가복음 15:1-10

     

    설교음원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

     

    설교영상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

     

     

    사랑받는 ‘하나’의 가치

     

    안과 두려움을 안겨주었던 태풍 ‘힌남노’가 지나갔습니다. 해마다 있는 재해를 막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해왔지만, 이번에도 남부지방에는 많은 피해가 있었다고 합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을 빼앗긴 분들도 계십니다. 아픔속에 짓눌린 곳마다 주님의 위로가 있기를 빕니다. 이처럼 뜻하지 않은 사고와 사건, 재해를 경험하게 될 때마다, 신앙의 유무와 관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던지는 동일한 질문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이라는 물음입니다. 책임을 묻고 하나님을 법정의 피고석에 세우고 싶은 마음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엉터리 같은 세상을 접하게 될 때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세상을 그냥 두시는 것인가?’, ‘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을 주시는 건가?’, 우리도 ‘하나님은 없다’(시편 14:1)고 체념하고 포기한 사람들처럼 비틀거릴 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향한 갈망이 아닌, 불의하고 아픈 현실을 초래하고 방관하시는 듯한 하나님께 책임을 물으려는 불온한 마음안에서 우리는 신앙의 유무와 관계 없이 한 편이 됩니다. 이처럼 납득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책임을 묻고 따지기 위해서, 아니면 그럴때야 도움을 구하며 겨우 하나님을 찾는 우리인데, 마음을 다해 당신을 찾는 한 사람을 향한 갈망을 하나님은 단 한번도 멈추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상 억울하십니다. 그럼에도 제 힘으로 살만하다 싶으면, 또다시 우리는 하나님을 쉽게 잊곤 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없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포기하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서일과 본문들을 이어주는 핵심 단어는 ‘앎’입니다.

    ..

    1독서 예레미야를 통해 전해지는 말씀의 분위기가 심각합니다. 그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심판을 불러드린 것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 자신입니다. 어디를 둘러 보아도 하나님 말씀을 따르며 사는 사람이 하나도 보이질 않습니다. 그 때문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 빛도 전혀 보이지 않을 것이고(23), 산들과 언덕은 요동칠 것이며(24), 아무리 둘러 보아도 사람 하나 남지 않을 만큼(25) 온 땅에 애곡하고 소리가 울려퍼질 겁니다. 마치 하늘 조차 빛을 잃고 어두워질 만큼(28) 무자비한 심판이 온 땅을 휩쓸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음에도 사람들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럴줄 모르셨다면 하나님께서 무능하신 것이고, 알고 계셨다면 그들을 방관하신 하나님 탓이라는 겁니다. 게다가 참혹한 심판의 칼을 휘두르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자비로우실 수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하나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끝까지 모르는 모습입니다.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온 땅을 황폐하게는 하여도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않겠다’ | 27절

     

    누구보다 멸망을 향하는 그들이 돌이켜 구원의 길로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분의 기다림, 그분의 사랑을 비웃고, 배신한 것은 그들 자신입니다. 그러니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겁니다. 

     

    나 주가 말하였으니, 마음을 바꾸지 않고, 취소하지 않겠다.’ | 예레미야 4:28

     

    그런 사람들에게 진절머리가 나신 것인지, 하나님께서 이제는 이들을 끝장내실 작정이신가 봅니다. 심판하기로 작정하신 마음을 바꾸거나 취소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말씀이 무섭기만 합니다. 그러나 불같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도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행악자는 가난한 사람의 계획을 늘 좌절시키지만, 주님은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신다.’ | 시편 14:6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한 사람이 없어 망하게 된 그 땅에, 의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 동안 행악자들로 인해 고통받던 사람입니다. 이 심판이 행악자들을 향한 것임을, 그리고 당신의 사람들을 지켜내시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마치 산불이 지나가고 나면 여린 새싹들이 다시 돋아나듯, 주님께서는 착한 일을 하는 의로운 이들을 이 땅에 다시 심어 놓으실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여기에 계심을 알게 될 겁니다. 

    ..

    지난 주에 이어 복음서 말씀에는 꽤 유명한 비유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잃은 양 한 마리’와 여인의 ‘드라크마’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계시는 모습을 고깝게 보고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들으라고 전하신 겁니다. 비유를 들어서까지 설명해주시는 까닭은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을 깨닫고 따르는 지혜로운 이들로 깨우쳐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 15:2

     

    지금 주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는 이 사람들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비난 때문이 아니라 실재로 유대 사회에서 ‘죄인’들로 치부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인들이라고 하면 무슨 큰 ‘범죄’를 저지른 악당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당시의 ‘죄인’에는 하나님을 거스르고 의도적으로 죄를 지은 그런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도와 관계 없이 ‘죄인’이 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중에는 ‘직업상의 죄인’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세리’가 그런 사람입니다. 모두가 먹고 살기 힘든 그 시기에 동포들에게서 세금을 징수할 때 정해진 것보다 더 거두어서 제 몫으로 착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보니, 로마의 식탁에 참여하는 ‘매국노’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던 이들입니다. 그들 뿐만 아니라 안식일에도 일해야만 겨우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던 사람들, 예를 들어 목자들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중에 상당수였던 ‘어부’들도 직업상 죄인들입니다. 사람들이 꺼리는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들을 대해야 하는 직업들은 정결예법 자체를 지킬 수 없으니 그런 일에 종사하는 이들도 으레 죄인 취급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죄인들도 있습니다. 사생아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모든 이들도 죄인 취급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꺼려하던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이방인들, 여인들도 그렇게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었던 사람들입니다. 성별, 직업, 신분, 처한 상황 다 다르지만 ‘죄인’취급받던 이들은 모두 ‘사회적인 약자’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이런 연약한 이들을 불편하게 여기면서도 스스로는 ‘당대의 의인'이라 여기는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사회적인 권한을 누리고 사는 ‘유력자’들입니다. 그때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도 이런 식의 ‘죄인’들은 적지 않게 많습니다. ‘죄인’이라는 주홍글씨를 짊어지고 살아가야만 하는 그들은 실재로 오늘 세상의 실패자로 낙인 찍힌 채 서럽게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이웃이고, 혹은 우리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이고, 형제, 자매이거나, 우리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계신데도 그분의 식탁에 함께 하고 있는 이들을 향해 거침없이 ‘죄인들’이라고 쏟아낼 만큼, 그들의 오만함은 하늘 높은 줄 모릅니다. 이건 대놓고 그들과 함께 하는 주님도 '부정한 죄인’이라고 낙인을 찍으려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비난대로라면 반대로 대체 누가 주님과 함께 식탁에 앉을 수 있을까요? 사람 앞에서는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의인이라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나 자신들이 주님 앞에서 다를 바가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오히려 자신들도 주님의 이 식탁에 초대를 받아야 하는 이라는 것을 정작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겁니다. 솔직히 주님과 식탁에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죄인 괴수’라 불리운들 그것이 대수일까? 싶은데, 그들은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그들은 끝까지 스스로를 옳게 보이고 싶어하는 ‘자아’라고 하는 산을 넘지 못한 채 주님곁에 가까이 오질 못하고 맙니다.

    그런 그들이 안타까워 해주신 비유의 말씀이 ‘잃은 양’과 ‘드라크마’의 비유입니다. 두 비유에서 공통되는 단어는 ‘하나’입니다. 열개 중 드라크마 ‘하나’, 백마리 양 중에 잃어버린 ‘하나’라는 이 말씀은 결국,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가 가지는 가치에 대한 가르침인 겁니다. 올 때도 갈 때도 빈손일 뿐인 우리는 늘 ‘하나’를 쉽게 ‘그 까짓 것’ 즈음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마는데,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그 ‘하나’에 목말라 하시니 아이러니하기만 합니다. 늘 다수가 ‘선’이 되고, 많은 것이 가치를 지닌다고 단정지으며, 효율성을 최고의 덕으로 삼는 물량주의, 소비주의에 길들여진 탓에, 우리는 한 마리 때문에 아흔 아홉마리를 들에 두는 목자의 어리석음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겨우 드라크마 하나를 찾으려고 헤매이는 수고가 귀찮게 보이고, 그것 하나 찾았다고 이웃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인다는 것은 분에 넘치는 과도한 비용 지출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접할 때 대부분은 쉽게 10절의 전반부로 결론을 맺곤 합니다. 신앙적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로 읽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 누가복음 15:10

     

    그러나 10절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은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라는 ‘후반부’에 있습니다. ‘그 까짓 것 하나’ 때문에 천사들이 기뻐하고 하나님이 웃음지으시는 나라야 말로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목자나 여인이 수고를 아끼지 않고 찾아나섰던 이유는, 결코 잃은 양 한 마리나, 드라크마의 ‘회개’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비유 밖에서 주님과 식탁에 함께 앉아있는 ‘죄인’들이 ‘회개’했다거나 실은 ‘의인’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전적으로 목자의 은혜였고, 주인의 간절함 덕 분입니다. 그러니 이 비유의 말씀들은 신앙적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신 ‘주님’이 잃은 양이나, 잃은 드라크마 같은 우리 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시는 분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비유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효율성의 안경을 벗어버리고, ‘관계성’의 눈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그때 비로서 목자나 여인의 수고는 마땅하고 당연한 것으로 읽을 수 있게 됩니다. 양이 발육이 좋은 우수한 녀석이라서도 아니었고, 한 닢의 드라크마의 가치가 주인이 온정성을 다할 만큼 컸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백 마리 중에 그저 한마리인 양이지만 주인에게 만큼은 ‘특별한 한 마리’였고, 별 것 아닌 열 닢의 동전중에 하나일 뿐이지만, ‘여인’에게는 매우 ‘특별한 하나’가 될 수도 있게 됩니다. 드라크마는 성인 노동자의 하루 품삯정도의 가치를 지닌다고 합니다. 십만원 즈음의 가치로만 보면 특별할 것도 없지만, 유대 전통을 이해하면 사정이 조금 달리 보일 겁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시집 가는 딸에게 은으로 만든 끈으로 묶은 은화를 지참금으로 건네주곤 했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급한 일이 생길 때, 남편에게 소박이라도 맞게 되면 요긴하게 쓰라는 부모의 마음이 담겨있는 겁니다. 드라크마 한 닢을 찾아 왜 그토록 헤매였는지 이해됩니다. 그 여인이 찾아 헤맨 것은 십만원의 가치가 아니라, 나 시집올 때 쌈짓돈 꺼내주시던 어머니의 사랑이었던 겁니다. 이제 이 말씀안에서 우리 자신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그토록 찾으시던 '한 사람', 죽음이라는 심판앞에 서야하는 죄인들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용납된 ‘한 사람’임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

    2독서인 목회 후배인 ‘디모데’에게 써보낸 편지안에서, 바울은 자신이야 말로 ‘하나님’을 대항하던 ‘죄인’, ‘훼방자’, ‘방해자’, ‘폭행자’, 심지어 ‘죄인 중의 괴수'였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쓸모 없을 정도가 아니라, 있으면 않되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장소와 시대를 초월한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죄인’ 한 사람을 통해 주님께서 이루어내신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오랜 기다림과 자비와 다 함이 없는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본보기’로 서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회자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은 지식을 전하거나 가르치는 이들이 아닙니다. 넘치게 용납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경험하고 자신의 삶을 채운 은혜를 나누어 주는 '한 사람'이기만 하면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겁니다. 

    ..

    오늘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이야 말로 우리 자신을 무한히 용서해주시고, 용납하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은 효율성 없고 수지가 맞지 않으며 늘 적자일 뿐입니다. 그러니 측량 불가능한 주님의 은혜를 우리가 무슨 논리로 설명할 수 있고, 제 자식을 내어주신 그 사랑을 무슨 염치로 판단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치 목자에게서 떨어져나간 양이나, 주인의 손에서 벗어난 드라크마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실존을 성경은 '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인'은 불행하고 불쌍한 겁니다. 그러나 양이 돌아오고 드라크마가 발견된 것이 전적인 주인의 수고덕이었던 것처럼, 이제는 죄인과 세리들이 주님의 식탁에 앉게 되고 죄인 중의 괴수였던 바울이 위대한 사도가 되었으며, 주님 없이 살던 우리가 주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오히려 이 일을 더 기뻐하시며 잔치를 벌이시는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15:10) 

     

    따지고 보면, 주님은 늘 세상이 ‘그 까짓 것’이라 여기던 것들을 사용해서 구원의 역사를 써오셨습니다. 한 처음 세상을 빚으실 때에도, 주님은 그 까짓 흙 한덩이에 호흡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온갖 세상의 제왕들이나 권력자들이 ‘그 까짓 것’ 즈음으로 여기던 선지자들의 목소리로 어둠에 잠들은 세상을 깨우셨고, 무지랭이 같은 어부들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서게 해주셨고,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피를 통해 온 땅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덮으셨습니다. 유대의 유력자들과 로마의 권력자들이 ‘그 까짓 것’으로 여기던 갈리리 나사렛의 예수의 생명을 통해, 온 땅을 꾸짖고 당신의 자녀들을 구원으로 건져내셨습니다. 세상이 거들떠 보지 않는 '그 하나'일지라도, 주님의 사랑이 닿기만 하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결실을 거두는 법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타인을 판단하거나 정죄하거나 차별하는 종교인이 되어서는 않됩니다. 그저 그리스도의 은총의 빛으로 인해 하나님에 의해 발견되었고, 용납되었다는 것에 감격해서, '죄인'인 나를 거룩한 식탁으로 초대해주신 주님을 따라 길을 잃은 '한 사람'을 용납하는 이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볼품 없고 가치 없으면 가벼이 여기고 포기하는 세상과 달리, 주님은 당신께 속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라도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죽음의 벽을 찢어내서라도 반드시 찾아 내시는 분이 계시니, 우리의 삶은 세상을 바꾸어 낼 만큼 충분히 경이롭고 복 됩니다. 아멘.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