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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09/18 성령강림후 15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2. 9. 13. 20:24

    성서일과 본문

    1독서 | 예레미야 8:18-9:1 (선택) 아모스 8:4~7

    응송 | 시편 4

    2독서 | 디모데전서 2:1-7

    3독서 | 누가복음 16:1-13

     

    설교음원

    http://naver.me/FFiNQVHk = '클릭'하시면 설교 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pcJdcZRYAAQ = '클릭'하시면 설교 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급박한 '구원'의 문제

    1

    이 땅에 복음이 들어왔던 초기에 기독교는 오늘처럼 주류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나 성도들의 영향력 만큼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소수의 그들은 민족의 독립 운동에 앞장 섰으며, 퇴락된 시대를 계몽하고 일깨우는데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자리라면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곧장 신뢰와 믿음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어리석고, 맹신적이며,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종교인이라는 비난의 이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딱히 다른 변명을 찾을 수 없는 이런 형국은 이분화된 기형적 신앙, 즉 교회안에서의 신앙과 이웃들과 함께 하는 일상의 영역에서의 불일치한 탓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교회안에서, 예배의 자리에서 더 없이 선하고 거룩한 교인이지만, 가정에서, 학교에서, 마을 공동체 안에서, 회사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낯설기만 했습니다. 신앙이 발현되고, 입증되어야 할 영역이 천국이 아닌, 이 땅이라는 것을 등한시해 온 탓입니다.

     

    2

    그런 면에서 하나님에 의해 구원을 받았던 이스라엘 공동체는 우리와 무척이나 닮아 있습니다. 이름 없는 히브리 노예들이었던 그들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신데는 특별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탐욕스러운 인간 왕이 중심이 되어 세워가는 나라들과 달리, 새로운 나라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실험적 모델로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권력을 지향하고 탐욕에 물들은 이들이 가난한 이들을 노예로 굴종시키는 세상과 달리, 하나님께서 왕이 되어 통치하시는 나라, 비록 왕이 있어도 마치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것처럼 공의와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를 만드는 역사적 책임에 그들은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1독서 구약 본문에는 선지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처절한 외침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꿈꾸시던 이 실험이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노예에서 벗어났던 그들의 땅에 어느새 노예로 추락한 사람들과 사람을 노예로 떨어지게 만드는 또 다른 황제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노예로 부릴 만큼 이 때의 이스라엘이야 말로 정치,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강성한 이들의 세상, 세속적으로 보면 더 할 나위 없이 성공한 시대로 불리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오히려 이 시절에 하나님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경제적 부를 얼마나 이루었는가나, 정치 외교적으로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는지는 하나님께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시는 기준이 아니었던 겁니다. 우리가 얼마나 그럴 듯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가 아닌, 오직 그 땅에 얼마나 공의와 정의, 자비와 인애가 펼쳐지고 있는지 여부만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근거가 될 뿐입니다. 그리고 자비와 인애의 실천은 헐벗고 굶주리는 이들, 소외되고 버려진 이들의 억울한 눈물이 멈추어졌는지를 통해서만 확인하실 것입니다.

     

    3

    선택본문인 아모스서는 하나님이 분노하실 수 밖에 없는 이스라엘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 잘 살게 된 권력자들이나 더 가진 자들이 빈궁한 이들을 짓밟고 망하게 합니다. 그들만 문제가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장에서 사람들은 되는 줄이고 추는 늘이고 가짜 저울로 속입니다. 정직하게 땀흘리며 살아가는 사람만 어리석은 바보가 되는, 모두가 거짓된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한통속이 되어버린 세상입니다. 하지만 아직 실망하기는 이릅니다. 6절에 이르면 이들이 얼마나 막장처럼 타락했는지를 보게 됩니다.

     

    헐값에 가난한 사람들을 사고 신 한 켤레 값으로 빈궁한 사람들을 사자. 찌꺼기 밀까지도 팔아먹자" 하는구나.’

     

    성경은 분명 만물의 창조주는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입니다. 모든 인간안에는 하나님의 고유한 성품과 속성이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병든 이들이나 가난한 자들,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다움의 품위를 잃지 않아야 하고, 그렇게 되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이 사실을 마음으로부터 믿고 있는지는, 우리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분명해 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 자부하던 이스라엘안에서 신 한켤레 값으로 사람이 사고 팔리고 있는 겁니다.

    누구라도 이 말씀을 읽을 때 이스라엘의 모습에 분노할 겁니다. 그러나 ‘유전무죄, 무전유죄’( )의 불법한 모습은 이 시대에도 여전할 뿐입니다. 실재로 신발 한켤레가 수십만원을 호가하고 그것을 사려고 밤을 세워가며 줄을 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면에 그 만도 못한 값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는 이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말씀대로라면 사람을 그런 식으로 부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를 훼손하는 죄를 짓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최저 시급 문제를 마치 세상을 망하게 할 문제인 것처럼 터부시하거나,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를 경기나 물가 안정을 이유로 거부하는 모습에 분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없다는 것을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저들 스스로의 깨어지고 상한 자신들의 형편을 직면하게 될 때면 여지 없이, ‘주님께서 시온을 떠나셨단 말인가? 시온에는 왕도 없단 말인가?’(예레미야 8:19) 하나님 탓을 합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형편이 나아지질 않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책임을 다하지 않으신 탓이라는 불만입니다.

     

    어쩌자고 조각한 신상과 헛된 우상을 남의 나라에서 들여다가, 나를 노하게 하였느냐?’ | 8:19c

     

    그러나 하나님의 답변은 오히려 이 모든 책임이 저들에게 있다는 고발입니다.

     

    '어찌하여 나의 백성, 나의 딸의 병이 낫지 않는 것일까?’ | 22b

     

    그저 시편 4:5절의 말씀처럼, ‘올바른 제사’를 드리고, ‘바르게 주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을 하지 못하니, 이토록 절망스러운 상황으로 떨어진 뒤에도 여전히 회복되지 못하는 그들을 하나님은 도무지 이해하실 수가 없습니다.

     

    4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에게 말씀하시던 지난 주와 달리, 복음서 말씀은 당신의 뒤를 쫓으며 당신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으로 알려진 ‘비유’가 등장합니다. 이 비유가 특별히 어렵게 여기지는 이유는 두번이나 언급되고 있는 ‘불의한 재물’이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사실 ‘재물’자체는 불의하거나 불법하지 않습니다. 돈이나 재물은 이편도 저편도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재물을 얻거나 사용하는 이가 불의하고, 불법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통해, ‘재물’을 사용할 때 쉽게 사로잡히게 되는 ‘재물’안에 담겨있는 불의한 존재에 대해 주목할 수 있습니다. 재물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마력이 담겨있습니다. 세상없던 사람도 돈 앞에서 탐욕에 사로잡힐 뿐만 아니라, 일단 그렇게 되면 자꾸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재물의 표상을 ‘맘몬’이라는 풍요의 우상이라고 지적하셨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13절)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던 겁니다. 뿐만 아닙니다. 본문 뒤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이 전해주신 이 말씀을 듣고 ‘비웃었다’는 14절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들을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라고 한 누가의 표현도 재미있습니다. ‘사용’해야할 재물을 ‘사랑’하고 ‘복종’하고 ‘섬김’의 대상으로 여기는 부자들에게 주님의 말씀은 늘 어리석은 비웃음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늘 소비의 대상일 뿐인 재물을 자꾸만 섬김의 대상으로만 바라 봅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무릇 ‘하나님’만을 섬기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5

    비유 안에서 부자는 청지기를 고용해서 자신의 재물을 맡겨두었는데, 어느날 자신의 청지기가 재물을 낭비하고 있다는 불편한 소문을 듣게 됩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게 되었으니, 속에서 불이 났을 겁니다. 곧장 청지기를 해고하기로 결정했지만 주인은 청지기가 일을 정리하도록 말미를 주었습니다. 이 후의 내용은 청지기의 관점에서의 이야기들입니다. 

    주인의 해고통지를 받은 청지기는 그 사실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매우 절박한 처지라는 것을 실감한 겁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맡겨진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도 이런 해고의 날이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제 생명이 마땅하고 당연것인 줄 착각한 체 주인으로부터의 해고통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의 것을 내놓으라고 하실 때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절실하게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사실을 기억하며 맡겨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내는 사람들에게는 주인이 부르는 날이 기쁨의 날이 되겠지만, 이와는 반대로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히게 되는 이들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저 아직 주인의 해고 통지를 받지 않았을 뿐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악한 일을 향한 주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야곱의 자랑을 걸고 맹세하신다. "그들이 한 일 그 어느 것도 내가 두고두고 잊지 않겠다.’ | 아모스 8:7

     

    주님이 없는 것처럼 여기며, 저들 하고 싶은대로 악을 일삼고 주님의 백성들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게 한 그 모든 일을 두고 두고 잊지 않으시겠다는 주님의 맹세는 악행을 일삼으며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더 없이 무서운 말씀이겠지만, 고난당한 백성들 입장에서는 이보다 큰 위로가 없을 것입니다.

     

    6

    먼저 청지기는 짧은 말미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고민했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에게 기대겠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그는 번개처럼 지체 없이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채무자들을 불러 빚을 탕감해 주고 거짓 채무 증서를 만들어 주는 겁니다. 그의 행위는 오늘로 치면 주인의 재산을 횡령하고 거짓 문서를 만드는 고약한 범죄행위일 뿐인데, 주인이 그 소식을 듣고는 오히려 그를 슬기롭다고 칭찬해줍니다. 현실에서는 그렇게 청지기를 감싸줄 주인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실재로 그런 주인이 있겠느냐의 여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의 목적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청지기처럼 행동하라는 말씀을 전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인의 칭찬을 통해 ‘재물’이란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를 ‘정의’해야만 합니다. 고리의 이자일지라도 빚을 지지 않으면 않되는 상황에 내몰렸던 채무자들은 당시의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재물이란 이런 이들을 돕기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 우리가 그들과 가까워질 때, 천국도 가까워지고, 주님과도 가까워질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오늘날 참으로 모든 이들이 돈을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정한 무엇’ 즈음의 대명사로 여기고 있습니다. 돈을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고, 자신을 드러내고, 타자를 업쑤이 여길 뿐만 아니라, 때로는 연약한 이들의 생명을 대신하는 '불의한 도구’로 전락시켜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청지기처럼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게 될 때, 우리는 생명 뿐만 아니라 재물도 구원해 낼 수 있게 됩니다.

     

    7

    이 이야기 안에는 미쳐 발견하지 못한 재미난 사실이 한가지 있습니다. 주인에게 발각된 이후에 청지기가 빚을 탕감해주고 거짓 문서를 체결한 행위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주인이나 채무자들 누구에게도 손해가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실재로 그 동안 청지기가 주인 몰래 착취해왔던 것은 주인의 원금이 아니라, 그가 임의로 덧붙인 비싼 이자였습니다. 위조된 장부는 그것을 탕감해주고 없는 셈 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동족끼리 금전을 빌려주면서 이자놀이를 하는 것은 본래부터 율법이 금지(출애 22:25; 레위 25:35~37; 신명 23:20)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받지 못하게 되어도 주인에게는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청지기의 행위를 통해 주인은 사람들로부터 고리의 이자를 탕감해준 은혜롭고 자비로운 채주로 명성을 얻게 되었을 뿐 입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다.’ | 16:8b

     

    무엇이 더 이득이 되는지,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택함에 있어서 세속의 자녀들은 영악할 만큼 지혜롭다는 주님의 말씀안에는,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깊은 안타까움이 베어 있습니다. 교회에게, 성도들에게, 제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 급한 일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인 우리는 어떨까요?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또 어떻게 재물을 사용해야하는지도 모른 채, 세속의 사람들보다 못하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참으로 우리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깨닫고, 신속하고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를 향해 돌이키고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재물이 신이 될 수 없음을 드러내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8

    2독서인 서신서 디모데전서 2:4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신다’라고 전합니다. 악행하는 이들까지도 돌이키기를 원하셨던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 대속물로 자신을 내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라는 말씀안에는, ‘우리 자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의 말이 참으로 진실이라는 것은 ‘사도’로서 살아간 그의 삶을 통해 우리는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한 바, 고백한 바가 참되다는 것은, 그 자신이 살아가는 삶 만이 입증할 수 있는 법입니다. 나는 지금 참말을 하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외침이 절절하게 들립니다. 그러므로 진리되시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인 우리 역시 믿는 바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정확하게 일치해야만 하는 겁니다.

     

    아모스 본문 바로 뒤에 이어지는 11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이 온다. 나 주 하나님이 하는 말이다.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겠다. 사람들이 배고파 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 | 아모스 8:11

     

    심판을 맹세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이 가지고 오실 ‘심판’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침묵, 하나님의 부재, 말씀의 상실입니다.(11절) ‘그까짓것이 뭐가 대수일까?’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자신이 목전에 놓인 주인의 해고통지로부터 구원받았음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직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탓이기도 합니다. 복음이 사건이 되고, 예수님의 구원을 믿게 되었다면, 말씀이 없는 기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등을 지시고 돌아서시는 침묵이야 말로 ‘심판’이라는 것에 어렵지 않게 동의하실 수 있을 겁니다. 말씀이 사라지게 되는 순간, 영혼은 피폐해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이것만 하면, 이것만 가지거나 얻게 되면 행복할 것이라 믿고 달려왔던 삶이 결국 허무로 떨어지고 마는 이유는 모두가 ‘말씀’의 기갈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12절 말씀을 읽어보면서 ‘말씀의 부재’가 어떤 것인지 눈을 감고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 | 아모스 8:12

     

    물 몇잔이 시원하다고 해도 아무리 물을 들이켜도 갈증이 해소되지 못하는 극심한 가뭄에는, 궁극적으로 가뭄이 그쳐야만 타는 목마름이 해소될 수 있는 것처럼, 말씀의 기갈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해갈할 수가 없는 겁니다. 세상을 다 뒤져도 얻을 수 없는 ‘말씀’을 ‘생명’이나, ‘안식’, ‘영혼의 만족’ 또는 ‘자유’나 ‘기쁨’으로 바꿔 읽어보면, 더 실감이 날 겁니다.

    어떻습니까? 아모스가 외치고 있는 여호와의 ‘말씀’을 얻으셨습니까? 상황이나 조건과 관계 없이 안정감과 평화를 누리는 ‘영혼의 만족’을 경험하고 계시냐?는 물음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잊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불의한 이 땅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잊지 않으시는 분이시니 ‘심판’은 취소되지 않을 겁니다. 이 말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되겠지만, 또한 어떤 이들에게는 기쁨의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오늘의 삶을 축제로 경험하신 분도 있을 테고, 반대로 12절의 말씀처럼 여전히 비틀거리며 헤매이는 헛헛함이 밀려드는 시간에 놓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심판의 경험입니다.

     

    9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이 행하실 새로운 세상, 곧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살아가겠다는 뜻입니다. 우리 영혼은 주님이 가지고 오신 그 세상을 제 자신의 삶에서 실재로 경험하게 될 때만 만족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말씀이 자신의 삶에서 ‘육화’되는 경험, 실재가 되고, 능력이 되는 경험을 할 수 없다면, 삶은 늘 공허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며, 주님을 따르며 살겠노라 결단한 제자들입니다. 그러니 깨달음이 없다고, 아직은 그런 날이 올른지 모른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하고, 예수를 따르는 실천으로 이어져야만 합니다. 영혼의 갈함을 해소하고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예수의 길을 따르며 살아가는 겁니다. 주인에 의해 주어진 말미의 시간같은 인생에서 이것보다 급박하고, 본질적인 일은 없습니다.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따라 나서십시오. 그 안에 우리의 구원이 담겨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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