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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2 성령강림후 다섯째주 * 맥추감사주일카테고리 없음 2023. 6. 29. 15:38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창세기 22:1-14
응송 | 시편 13
2독서 | 로마서 6:12-23
3독서 | 마태복음 10:40-42
# 설교음원
http://naver.me/xJaRTqKW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할 수 있습니다 (*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ZgBDhmIQAzo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렘브란트, The Sacrifice of Isaac, 유채, 1635, The Hermitage, St. Petersburg 여호와 이레 : '지켜보시는', 하나님
1
성공한 CEO가 세단에서 내립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룬 듯한 자신감 넘치는 모습입니다. 또 한편에서는 정원이 있는 너른 집에서 장성한 자녀들과 손주들 사이에서 더 없이 평안하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 노부부의 모습도 보여줍니다. 마치 다 이쯤은 하면서 산다고 하는 것 같고, 당신도 이렇게 살아보라는 것처럼, 대중매체는 허무한 신화를 무한 생산하고 있습니다. 성실하게 살면 누구나 이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직하게 땀흘리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삶이란 그런 식으로 내뜻 대로 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아득한 일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런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둘째치고, 일단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그야 말로 황망함과 두려움, 괴로움과 절망으로 삶은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버립니다. 아무도 곁에 없고 그저 나만 홀로 벼랑끝에 내몰려 선 것같은 고독함은 되돌아갈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살아있는 한 이런 일들이 끊임없이 누구에게나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삶의 언저리에서는 ‘왜, 이런일이’라든가 ‘왜? 내게’와 같은 상처입고 지친 사람들의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질 뿐입니다.
2
오늘 1독서 본문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은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경우에 아브라함하면 하나님께는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받고, 남부러울 것 없는 많은 복을 누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씀안에서 엿보게 되는 그의 삶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씀안에 들어왔던 75세 이후의 그의 삶은 늘 시험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경험했던 시험은 모두 포기를 요구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첫번째 시험은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75세까지 누리고 있던 것들 그러니까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것과 다름 없는 시험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가져다 주실 ‘내일’을 바라보며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마지막 시험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시험은 그 동안 경험했던 것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목사나 선교사로 세우겠다는 차원이 아니라, ‘인신공양’(人身供養) 산 채로 제물로 바치라는 겁니다. 말 그대로 끝판 왕을 만난 기분입니다. 과연 그는 이런 끔찍한 시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우리는 그저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험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정작 당사자에게 시험이란 언제나 치명적이고 절망적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섣불리 제 삼자의 입장에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난을 ‘시험’ 운운하고 신앙적 열심을 강요합니다. 하지만, 출구까지 나오면 ‘빛’이 보이는 것이 사실이라도 터널안에서는 여전히 ‘어둠’만 보이는 것처럼, 각자가 짊어진 모든 ‘고난’은 지나고 나서야 ‘시험’이나 ‘연단’이었다고 해석될 수 있을 뿐인 겁니다. 이런 시선에서 아브라함의 시험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3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와 현재를 포기해야만 하나님을 따라갈 수 있던 첫번째 시험으로부터,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안에서도, 그리고 조카 롯에게 더 보기 좋고 많은 것을 양보했던 그 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으로 비교적 시험을 잘 치루어냈습니다. 그런데 이번 시험은 이전의 어떤 시험과도 무게가 다릅니다. 부모란, 자식에게 제 인생 모두를 걸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부모에게 자식은 자기 자신의 미래이고, 희망이며, 운명 전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시험지에는 ‘이삭’을 내놓으라는 문제가 담겨있습니다.
사람이 낙담하고 절망하는 것은 ‘오늘’ 직면한 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무엇이 없다라든지, 실패했다라거나 비교에 내몰린 탓도 아닙니다. 아무리 힘겹고 서러운 인생일지라도, ‘내일’만 있다면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것도 나아질 것처럼 보이지 않을 때, 희망을 잃어버리는 순간에 이르면 속절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그 동안의 실패와 후회, 낭비처럼 보였던 지나온 제 인생과 선택의 시간들 모두가 의미있었다는 보증이며, 자신의 ‘미래’였습니다. ‘이삭’을 내어드린다는 것은, 자기 존재 의미가 지워지는 것이고, 삶을 송두리째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지나온 삶, 지금 붙들고 있는 것이라면 아낌없이 내어 놓을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졌지만, ‘이삭’만큼은 더욱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신제사를 요구하던 고대 근동의 우상들처럼 ‘이삭’을 산제물로 바치라는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하실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에 미쳐서 환청을 들은 것이거나, 어쩌면 악마가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대체 이 시험은 어디로부터 온 걸까요? 혹시 아들 이삭의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어떤 사건에 휘말렸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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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아브라함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어떤 사건을 계기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하신 것이라고 듣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그에게 그 시간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시간보다 더 고통스럽고 출구를 발견할 수 없는 무질서로 가득했을 겁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답을 찾을 수 없고 이해해 보려고 해도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그러니 자꾸만 억울하고, 숨이 막힙니다. 그리고 아마 그날의 아브라함처럼 똑같이 말하게 될 겁니다. ‘왜? 내게 이런 시련이’….
하지만 이렇게 한번 가정해 보면 어떨까요? 만일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이삭에게 오늘의 이 시험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요? 혹시 그날 아브라함이 시험에 실패했으면 이후의 사건은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었을까요? 납득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시험’이란 늘상 우리를 찾아옵니다. 누구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왜? 내가 바라는 일은 어그러지고 원치 않는 일은 일어나는 걸까요? 왜 이런 일은 나에게만 일어나는 건지 시원하게 답해주는 이가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쉽게 조급함에 내몰려 내 믿음이 부족해서라는 정죄감에 빠지거나, 미쳐 내가 모르는 신령하고 숭고한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자위하고 싶어합니다. 질문을 더 확장시켜 볼까요? 왜, 난민들이 탄 배가 침몰해야 했는지, 본질적으로 그들은 왜 그런 나라에서 태어나야만 했는지, 지진이나 홍수는 왜 일어나고, 태풍은 왜 부는 걸까요? 왜 ‘그때’가 아니고 ‘지금’이며, 왜 그 사람들이 아니고 ‘나’여야 하는 걸까요? 반대로 왜 그들은 죽고 나는 남아 있는 걸까요? 우리는 누구도 이 물음에 책임있게 답할 수가 없습니다. 정직하게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다보면 결국은 이런 상황이나, 이런 문제가 아니라, ‘그는 누구이시고, 나는 또 누구인가?’라는 물음만 남게 됩니다. 모든 것이 잘 풀리고 내가 바라는 대로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만, 그런 상황에 만족하고 있는 ‘나’자신에게 빠져들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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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결국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이려던 그의 손을 멈추게 하시고, 대신에 직접 준비하신 숫양으로 제사하게 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했고, 이삭도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 ‘여호와 이레’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여호와 이레’를 아브라함의 말을 인용해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이레’는 사실 준비하다라는 뜻보다는 ‘보다’는 의미로 더 자주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모리아산 그곳에서 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보고 계셨을까요? 말씀에 순응하기 위해 철저히 자기 자신을 부인하며 자기 자식 가슴위에 칼날을 들이밀던 ‘아브라함’일까요? 믿음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아버지로 인해 공포와 절망으로 얼어붙었던 ‘이삭’이었을까요? 그도 아니면, 산 밑 저 어딘가 무사히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사라’였을까요?
이 대목 덕분에?, 오늘 본문은 너무나 자주 ‘절대적 순종’과 ‘믿음’을 권면하는 것으로 설교되어집니다. ‘아낌없이 순종하면 결국 하나님이 다 갚아주신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만 하는 것은 ‘아브라함’도 ‘이삭’도 아닌, ‘하나님’ 뿐 입니다. 자식을 내어주는 순종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닐 뿐더러, 그런 방식으로는 드러나있는 이 처참한 상황을 해결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놓여진 우리를 보고 계신 하나님, ‘여호와 이레’는 허무한 메아리처럼 들릴 수 밖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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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우리 인생앞에 서 계신 하나님은 과연 누구이실까요? 이와 관련해서 곱씹어 봐야할 말씀이 있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 창세기 4:26
에노스가 태어난 날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걸까요? ‘에노스’는 ‘아담’과 마찬가지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난 그 날 사람들은 처음 또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아담’입니다. 살아갈 날만 볼 때는 보이지 않던 하나님인데, 자신이 죽는 존재라는 것을 목격한 순간 보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고난과 역경처럼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절망과 무력함 속에 이를 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 앞에 있다고 모두가 똑같이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인생’앞에서 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무능한지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사람만, 비로서 구원이 자기 밖에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겁니다.
그는 전능자이시며 생명의 주인입니다. ‘주권자’시라는 말이 애당초, 생명은 하나님께만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가 어떤 선택을 하시든, 무엇을 하시든 우리는 그 뜻을 다 헤아릴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보태거나 더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것이 그분의 뜻에 의해서 결정된다면, 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묻고 싶으실 겁니다.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 중에 누구도 값도 치르지 않고 아무 조건없이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얼마를 주시든, 또한 무엇을 주시든, 우리는 그저 감사하며 하나님의 것을 누릴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전능자이신 하나님, 모든 생명이 주님께 있음을 믿는 신앙의 삶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늘의 상급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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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파송하면서 하셨던 복음서 말씀안에서도 주님은 ‘상’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 10:42b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지와 무관하게, 그저 우리 자신이 ‘그렇게 가지고 싶었고, 가지려고 했던 것’들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런 것들이 ‘복’이고 ‘상이라고 생각한 채, 그러니 이 땅에서 헌금이나 전도 많이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상’을 많이 받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라는 식으로 성도들을 몰아가기도 합니다. 아니면 죽은 다음 천국에 가면 보상을 받게 될테니 지금은 참고 견디라고 훈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천국은 그런식으로 더 많이 가진 자와 없는 자, 능력있으면 인정받고 그렇지 않으면 냉대받는 차별의 땅이 아닙니다. 과연 우리가 받을 상은 무엇일까요?
제자를 세우시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혈기 많은 요한과 야고보, 성미 급한 베드로, 그리고 주님을 배신한 ‘유다’, 도무지 왜 저런 사람들을 제자로 세우셨는지 의아해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과 달리, 그런 이들을 제자로 택하면 않될 이유만 찾는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자들 면면은 실망스럽기 그지 없는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주님은 그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들의 능력이나 사람 됨됨이, 혹은 믿음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주님은 그들을 당신이 제자로 부르셨고, 당신이 그리하셨듯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천국복음을 전하는 일과 병든 사람,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제자는 이런 일을 해야만 하고,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 예수의 제자라고 할 수 없는 겁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상’이 무엇인지 눈에 들어오십니까? 이미 제자들은 ‘상’을 받았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을 얻은 것, 제자로서 부름을 받은 것 자체가 성도에게 주어진 상입니다. 이 보다 더 큰 상은 없습니다. 제자에게 주어진 일, 제자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들은 다 불필요한 것들, 비본질일 뿐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 일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이들만 맛볼 수 있는 기쁨이며 상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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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은 1독서 본문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습에 당황했던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갑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내어놓으라던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동일한 요구를 하셨고 실행에 옮기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은 죽임당하고 말았습니다. 결정적인 순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칼든 손을 붙들고 멈추게 하셨지만, 자기 아들의 손과 발을 꿰뚫던 못과 옆구리를 찌르던 창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미래를 지켜주셨던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신 것입니다. 그 대가로, 당신의 나라와 미래를 고스란히 우리에게 담으신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따져 물을 수가 없고, 불평을 늘어놓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 내몰은 대가로 우리에게 주신 이 모든 것이 은혜이며, ‘하나님의 주권’일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 이미 넘치는 ‘상’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인간을 수단화, 부품화하는 이 땅 곳곳에서 자식을 위해 울부짖는 라헬의 눈물이 마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눈에 제단에 올려져 희생당해도 좋을 ‘이삭’은 없습니다. 그러니 무시해도 좋을 사람, 없어도 좋을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겁니다. 우리는 죽음의 지배 아래 떨어진 세상, 기쁨과 감사, 생명의 능력을 상실한 세상을 향해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고 외치는 일에 부름받은 제자들입니다. 결코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상급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으시나요? 이런 상급을 받으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