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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3 성령강림후 여덟번째 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3. 7. 20. 11:21
# 성서일과 독서 본문
1독서 | 창세기 28:10-19a
응송 | 시편139:1-12, 23-24
2독서 | 로마서8:12-25
3독서 | 마태복음 13:24-30, 36-43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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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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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 샤갈, <야곱의 꿈>, 195x278cm, 1960-66. '이곳'에, '주님'이 계신다
1
교회로 오는 길, 여느 때처럼 횡단보도앞에서 신호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문득 가로수 나무 등걸을 뚫고 나온 여린 싹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루 아침에 난것이 아닐텐데, 숱하게 이 길을 지나면서도 오늘에야 보게 된 겁니다. 늘 보던 방식에 길들여진 탓에,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소중한 것들은 지나쳐버립니다. 1독서 본문에서 마주하게 되는 ‘야곱’이 딱 그런 사람입니다. 지난주에도 보았듯, 그는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기만하여 장자권을 빼앗았고, 축복까지 가로챘습니다. 성서기자는 이런 야곱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귀히 여겼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그의 선택은 제 몫에 자족하고 감사하지 못한 조급함에 내몰린 결과였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의 선택이 초래한 결과를 보여줍니다. 그는 지금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해 정처 없이 걷고 있습니다. 분노한 형을 피해 얼굴 한번 뵌적 없는 삼촌 라반에게 목숨을 의탁하기 위해 떠난 길입니다. 걷다가 지쳐 광야에서 잠이 들었는데, 그때 그곳에서 꾸게 된 꿈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꿈속에서 본 것은 땅에서 하늘까지 닿은 계단 사이를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복 내려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도망하는 신세지만 풍성한 자손과 형통함, 그리고 다시 돌아오게 해주겠다고 하셨으니, 꿈이라고는 해도 ‘장자’의 복이라고 할 만큼 그럴듯해 보입니다.
2
본문을 읽으면서 몇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첫번째, 잠에서 깨어난 그의 첫 반응은 17절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뵈었으니 놀랍고 기뻐야 할텐데, 오히려 두려워했던 까닭이 무엇이었는지,
두번째, 어떻게 이곳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는지,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궁지에 내몰린 실패자 야곱을 만나주신 까닭이 무엇이었는지 입니다.
허둥지둥 도망쳐 나온 상황이었으니, 돌베게를 베고도 깊이 잠들 만큼 영적으로 육체적으로도 지쳐있었을 겁니다. 그 동안 걱정할 것도 없었고, 안락했고 평안했습니다. ‘장자권’만 제것으로 빼앗으면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인생이 다 잘 풀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장자권을 얻고 난 이후의 형편은 말 그대로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삶의 평안은 깨어졌고, 형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고 있습니다. 당장 오늘은 어디에서 자고, 내일은 또 어찌해야하지 아무것도 보이질 않습니다. 삼촌을 찾아간다고는 하지만, 앞으로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막연하고 불안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저 잘 살아보려고 했던 것 뿐인데, 평범했던 일상이 깨어지고 그는 인생의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런 그의 모습은, 꼭 하나님 앞에서 인간 존재의 형편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제 힘으로 몸부림치며 살아보았지만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죽을 것만 같은 공포에 내몰려 형을 피해 도망치던 그의 모습은, 이십년 뒤에도 정확하게 똑같이 겹쳐집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 일가를 이루고, 부자가 되었다는 것만 달라졌을 뿐, 이십년 뒤 고향으로 돌아올 때도 그는 여전히 형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얍복 강가에서 몸부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목숨을 건지려 도망쳤던 길, 잘 살아보겠다고 선택했던 인생이었지만, 정작 그의 삶은 늘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겁니다.
3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장자’에 대한 ‘복’을 탐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몰랐습니다. 성경읽고, 설교를 듣고, 예배에 참여하면서 얻은 정보로만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우리처럼,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를 통해 ‘하나님 야웨’에 대한 말씀을 들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에, 당연히 하나님 없이 제 스스로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해야하는가?’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살아야 하는 인생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많은 것을 얻고, 소유하고, 이루었지만, 그의 삶을 가득 채운 것은 늘 염려와 근심이었습니다. 내일도 살아내겠다는 강박에 내몰린 채 살던 그의 모습은, 무엇 때문인지도 모른 채 바삐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을 비추고 있습니다. 폐륜아가 되어 얻어낸 ‘장자권’ 조차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어 버린 야곱처럼, 그런 것만 가지면, 그런 것만 해내면, 부자가 되면, 성공하면 잘 살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지만, 한순간에 삶을 지탱하던 것들이 무너져버립니다. 믿는 구석이 모두 무너지고 아무것도 없이 저 혼자만 덩그러니 남게 된 인생은 쓰라릴 만큼 고독합니다. 인생이란 살아내어지는 것임을 모른 채, 살아내보겠다고 힘을 낼 수록 고독의 깊이는 깊고, 상처는 치명적입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야 비로서 야곱은 아버지, 어머니의 하나님, 귀로만 전해듣던 할아버지와 조상들의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야곱과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 것 아닌 곳이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광야 그곳도 하나님의 땅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 곳에 계실리 없고, 그런 방식으로 계실리 없다고 가벼이 여기고 외면하며 지나쳐 왔던 탓입니다. 그런데 처절하게 패망한 이 시점에 이르러 그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겁니다.
이유가 뭘까요? 야곱이 처한 상황을 유의깊게 들여다보십시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고 보면, 제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고, 얼마나 부자인지 따위는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아는 것과 통렬하게 경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건져줄 누군가 뿐입니다. 광야에 이른 그는 지금까지 소유한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절대적 무력과 무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런 때에 이르러야, 하나님을 향해 빈손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성경은 ‘자기부인’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자기부인’이라고 하면 금욕이나 절제, 종교적 훈련 정도로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그것은 ‘자기 부인’이 아니라, 스스로 이루어낸 ‘자기 업적’, ‘자기 능력’일 뿐입니다.
4
찬송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의 3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주 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보다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 앞에 서고 보니, 자신이 한 없이 작아져 세상이 크게 보이던 기대와 탐욕과 의존성이 간곳 없어 보이는 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금욕과 절제,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 로마서 8:13
바울은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럴때마다 죄된 우리 자아는 시퍼렇게 살아서 꿈틀거립니다. 아무리 자신을 부인하려고 해도 ‘자아’의 완고함을 스스로 벗어낼 도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부인되어지는 것을 경험하는 길 밖에는 없는 겁니다. 그곳이 바로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 내몰리고, 낯설은 날 고독 가운데 버려졌을 때면, 누구라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같은 ‘부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마치 하늘이 닫힌 것처럼 암울해지고, ‘죽을 것’만 같습니다. 야곱이 핍절하여 곯아떨어진 광야가 그런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곳에서 외쳤습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 창세기 28:16b
하나님은 이런 곳에도 계셨습니다. 이런 곳 뿐만 아닙니다. 인생이 망가지고, 실패하고, 끝장난 것 같은 그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은 그곳에 계십니다. 이것을 시청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야곱이 꿈에 보았던 하늘까지 닿은 ‘계단’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사다리’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사다리’는 필요에 따라 세우고 그러니 또 금새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술람’(סֻלָּם)은 ‘계단’이라고 읽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입니다. 계단은 한번 세워지면 무너트리기 전까지는 늘 그곳에 있습니다. 게다가 이 계단은 땅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땅으로 이어져있는 겁니다. 이 장면을 머릿속에 생각할 때마다 시퍼런 칼을 들고 아들 이삭의 가슴을 향하던 아브라함의 손을 잡아채던 하나님의 억센 손이 떠오릅니다. 건강이 깨어지거나 잘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되는 것처럼 딛고 서야 할 땅이 무너져내리는 인생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 자기 백성을 발견하고 찾아가시는 하나님의 손이 오늘도 고독 가운데 버려진 야곱을 구해낸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 손이 오늘 우리도 지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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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서신서 말씀에서 바울은 하나님이야 말로 목숨걸고 우리를 지키시는 ‘아빠 아버지’시라고 말합니다. (롬 8:15) 자녀들은 일이 잘 풀릴 때는 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며 살다가도 스스로 헤쳐나갈 수 없는 어려운 일이 생길 때는 ‘부모’를 찾게 됩니다. 이건 나이나 능력과는 무관한 일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모는 다릅니다. 비록 가진 것 없고 힘은 없지만, 제 자식이 위태로울 때면 번개처럼 몸을 던집니다. 우리는 다 무너진 것 같고, 아프고 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왜 이런 일이냐고 하나님께 불평하고 따져묻지만, 정작 그때 우리 곁에 있는 것은 하나님 뿐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잘해 낼 수 있다고 으쓱거리는 이들이 아닌, 처절하게 무너져 제 힘으로는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무력하고 무능한 이들의 곁을 찾아가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독처럼 쏟아내는 불평과 타박과 원망을 고스란히 자신의 몫으로 받아주십니다.
하지만,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꽃길만 펼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어도 질병에 걸리고, 사업이 망하기도 하고, 내뜻대로 자녀들의 삶이 열리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야곱처럼 우리도 아득한 벼랑 끝까지 내몰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암울하고 황폐한 광야의 날들 말입니다. 그럴때면 우리는 과연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이실까? 또 다시 의심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복음서 말씀입니다. 어떤 주인이 밭에 좋은 씨를 뿌렸습니다. 하지만 밤사이 원수가 가라지를 뿌리고 간 바람에, 밭이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걸 발견한 종들이 밀이 취해야할 양분을 빼앗기전에 가라지를 뽑아 버리겠다고 말합니다. 풍성한 결실이 목적이라면 농사에 관해서는 주인보다는 종들의 말을 듣는 편이 낫습니다. 하지만 결정권은 주인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냥 두라고 합니다. 마치 내게 찾아온 고난을 방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엿보게 된 것 같아 무책임한 주인의 모습에 마음이 불편합니다. 하지만, 주인이 그렇게 말한 이유가 중요합니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 13:29b
우리의 눈은 못된 가라지만 보이는데, 주인의 관심사는 온통 좋은 씨, 자라고 있는 밀 뿐입니다. 삶에는 밭에 뿌려진 가라지처럼 원치 않는 불행과, 악이 도처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속에서 무책임하게 이런 일들과 상황을 방치하시고 마치 눈을 감고 계신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이 야속하게만 보입니다. 온 몸으로 악과 죽음을 가로막고 영혼과 생명을 눈동자 같이 지키고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늘 아버지시라는 것을 잊은 탓입니다.
6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 | 마태복음 13:24b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재미난 것은 ‘하늘 나라’가 씨부리는 ‘사람’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천국이라면 이곳보다 좋고, 이런 상황보다 나은 어떤 것이라 생각하는 우리 기대를 완전히 전복시키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초기 교회 공동체는 천국을 이렇게 인식하고 경험했고 고백했습니다. 그럴 수 밖에요. 이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만 있으면 그곳이 어디이든 천국’이라는 이들의 신앙은 무척 상투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공허하게 생각합니다. 복음에 대한 무지탓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공의로운 통치와 구원이 일어납니다. 그런 곳이야 말로 하늘 나라인 겁니다. 초기 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안에서 그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신다는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고 경험할 수 있었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곧 천국이라고 외친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이 분명하다면, 돌베게를 배고 잠들어야 하는 광야, 벼랑끝까지 내몰린 한계의 상황, 온통 깨어진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곳은 천국입니다. 우리의 구원자가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참으로, 이곳에 하나님이 계시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지금껏 흘려보내고 지나쳐갔던 버려진 땅이었지만, 이제는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야곱은 이날부터 어디를 가든 눈을 크게 뜨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계단을 찾았을 겁니다. 계단만 찾을 수 있다면 내딛는 걸음, 닿는 곳이 어디라도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계단을 찾아 헤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생명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끊어질 수 없는 길을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죽음 끝자락에서도 당신의 아들을 찾아내어 살려내신 하나님이, 버려진 광야, 벼랑 끝이라도 그곳에서 우리를 구해주실 것입니다. 하늘 나라이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니, 그 어디라도 하늘나라가 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깨어진 세상,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이 많은 오늘입니다. 누가 그들의 위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만나는 사람이 누구이든, 닿는 곳이 어디이든 그곳이 하늘과 이어진 하늘 나라라는 것을 전하는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늘과 땅을 잇는 이들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주신 주님을 믿으며 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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