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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07/16 성령강림후 7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3. 7. 12. 16:30

    # 성서일과 독서본문

    • 1독서 | 창세기 25:19~34 혹은 이사야 55:10~13
    •   응송 | 시편 119:105~112 혹은 시편 65:(1~8), 9~13
    • 2독서 | 로마서 8:1~11
    • 3독서 | 마태복음 13:1~9, 18~23

     

    # 설교음원

    http://naver.me/xagNA9ht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yfhYMZytgKk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캔버스에 유채, 1888, 클뢸러 뮐러 미술관 소장

    정말, '밭'문제입니까?

     

    #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요? 

     

    너의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로마서8:11

     

    2독서 서신서인 이 말씀을 제 삶의 근거 삼고 하나님께 잇대어 세계를 이해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 그리고 이 말씀을 얼마나 실감하느냐가 신앙의 정도를 가늠하게 될 겁니다. 복음의 핵심은 바울의 말처럼 살리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데 있습니다. 문제는 이 말씀이 좀처럼 실감이 나질 않고, 그러다보니 믿음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겁니다.

    신앙생활, 예배 참석과 기도, 금식까지 열심을 다하면서도 그렇게 하는 ‘나’만 보일 뿐, 정작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에 집중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태양없이 살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태양에서 조금만 가까우면 모든 것이 타버릴 것이고 조금만 멀어지면 얼어버릴 겁니다. 지구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태양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평상시에 이 사실을 기억하거나 근거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늘 똑같은 형편입니다. 구원이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에 붙들려 있어야 하는데, 좀처럼 그렇게 하질 못합니다. 무언가 미숙하거나 그릇된 신앙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 자신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방식에 너무 익숙해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 1독서 구약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는 이런 인간 실존의 문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곱은 제 아비와 형 뿐까지 속인 사기꾼입니다. 인생 전체가 그랬습니다. 그러니 겉으로 만 보면 오히려 바보같은 ‘에서'가 더 순박하고 정직해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것에 주목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에서는 이와 같이 맏아들의 권리를 가볍게 여겼다.’ | 창세기 25:34b

     

    그럴듯해 보이지만 ‘에서’는 중요한 것을 가벼이 여기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에 반해 야곱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따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비열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본질에 닿아있다는 것이 성경의 평가입니다. 배가 고프다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맏아들의 권리를 가볍게 여긴 ‘에서’가 한심해 보인 적은 없으신가요? 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에 내몰려 하나님을 등한시 여기는 것은 우리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가볍게 여긴 적이 없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실 것’을 실감하고, 믿지 못하고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속한 것을 가볍게 여기는 겁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성령은 당신이 가르치시고 말한 것을 생각나고 기억하고 깨닫고 믿게 하시는 분 (요 14:26)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 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안에서’, 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은 쉽게 말씀드리면, 세상이 보여주는 것들이나 강요에 사로잡혀, 부러워하거나 염려 근심에 사로잡히는 대신에,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시다’는 믿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에 기대어 살아가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와 도움이 실감이 나질 않는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듣지만, 또 어떤 사람은 듣지 못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동일한 사람이라도 어떤 때는 들리지만, 어떤 때는 도무지 말씀이 들리질 않습니다. 말씀이 기억이 나고 그렇게 살려고 마음을 다잡아 보아도 도무지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형편없는 죄인’이라는 정죄감이 비집고 올라옵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 로마서 7 15

     

    지난 주에 함께 읽었던 로마서 말씀에서 바울 사도가 외쳤던 절규가 환청처럼 귓속을 맴돕니다.

     

    # 그러나 말씀은 변함이 없으며, 언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그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3독서 복음서의 말씀은 네가지 밭의 비유로 더 알려진 본문입니다. 먼저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말씀이 바닷가에 몰려든 사람들 뿐만 아니라, 12장에서 예수를 향한 바리새파 사람들 들으라고 하신 말씀이라는 겁니다.

    네가지 밭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는 ‘길 가’ 밭입니다 하지만 길가에 뿌려진 씨는 땅에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새들이 날아와 낼름 쪼아먹어 버립니다.
    두번째는 ‘돌작’밭입니다. 돌맹이 때문에 깊이 뿌리내릴 수 없는 씨앗은 비록 싹이 난다고 해도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 곧 말라버리고 맙니다. 
    세번째는 ‘가시덤불’입니다. 이곳에는 씨가 뿌려져도 가시덤불 때문에 제대로 자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더러 ‘좋은’ 밭도 있습니다. 비옥한 곳에 떨어진 씨앗은 잘 자라 백배, 육십배, 삼십배 결실을 얻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좋은 밭이 되어 결실하는 사람, 결실하는 인생을 살고 싶으시지 않으신가요?

    이제 이어지는 주님의 설명입니다. 

    말씀안에 언급되고 있는 ‘씨앗’은 하늘나라를 염두하신 복음의 말씀입니다.

    ‘길가 밭’은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해서 결국 하나님 나라를 결실로 거두지 못하는 사람을,
    ‘돌작 밭’은 말씀을 기쁘게 받기는 하지만 하나님 나라가 삶에 뿌리내리지 못해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쉽게 무너지는 사람을,
    ‘가시덤불’은 말씀을 들어도 세상 염려와 유혹에 사로잡혀 하나님 나라를 열매맺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자, 여러분은 어떤 밭이 되고 싶으신가요? 그리고 지금 스스로는 어떤 밭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좋은 밭’되었으면 좋겠지만, 혹여 길가나 돌작 밭, 가시덤불이라면 결국 제 삶에 하나님 나라가 결실할 수 없게 될테니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 하지만 저 마다 자신의 능력으로, 얼마나 결실했느냐로 좋은 밭인지 아닌지를 가늠하게 되고, 차별받게 된다면 그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요? 대체 그런 삶에 하나님나라가 무슨 의미와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애당초 이런 밭이었는데 왜 너는 그 만큼 결실하지 못했느냐고 하는 것도 부당합니다. 누구나 좋은 밭 되고 싶을 겁니다. ‘밭’의 차이에 시선을 두고 ‘비교’에 사로잡히게 되면, ‘하나님 나라’는 사라지고 맙니다. 

    주님의 말씀은, 사실 그 시작부터 이상합니다. 정성껏 준비한 씨앗을 길가나, 돌작 밭, 가시덤불에 뿌리는 정신나간 농부가 있을까요?  농사의 목적이 결실하는 것이 분명하다면, 누구라도 마땅히 좋은 밭에 뿌릴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이 ‘밭’이 아니라, 하나님나라 씨앗을 뿌리는 이 ‘농부’가 누구인지를 묻고 있는 것임이 틀림 없는 겁니다.

     

    주님은 분명히 비유로 전해주신 네가지 밭이 바로 말씀을 듣는 이들의 속마음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늘나라를 두고 하는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 마태복음 13:19a

     

    잘 일구어진 마음에 뿌려진 천국 복음의 씨앗이 결실하게 된다는 뜻일 겁니다. 사람의 마음판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땅은 무엇을 심든 고스란히 내어 놓는 것처럼, 우리 마음안에 어떤 씨를 뿌렸는지에 따라 그것이 드러날테니 말입니다. 사람의 됨됨이 뿐만 아니라, 말이나 행동, 사람과 삶을 대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겉으로 드러난 것들은 모두 속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는 기도의 수준은,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결코 뛰어넘을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제 마음 지키는 일이 쉽지가 않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성공보다 실패가 많고, 기쁜 일들보다는 염려나 근심해야할 일이 더 많습니다. 몸부림치며 애써보지만 혼자 힘으로 해낼 수 있는 일들도 한계가 있습니다. 애당초 내가 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입니다. 게다가 요즘처럼 부의 치우침과 쏠림이 극단적 양극화로 드러나는 시대에서는, 가난은 대물림되고, 사회안에는 갈등과 아픔을 피해갈 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늘 이런 상황을 개인들의 책임으로 몰아갈 뿐이고, 사람들은 구조적인 이런 문제에 무관심합니다. 남의 일이라 생각하는 탓입니다. 이럴 때 사람은 희망보다 절망에 떨어지기 쉽습니다. 밖으로부터 불어오는 거칠고 답답한 흙먼지들이 자꾸만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지만 도무지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농부가 굳어진 땅을 부드럽게 하고, 황폐한 땅을 갈아엎어주고, 메마른 땅에 물을 대어주듯, 모든 것은 마음판을 갈아 새롭게 일구어주실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 그런데도 여전히 하나님이 아닌, 제 스스로 좋은 밭 되는 것만 눈에 들어오고, 그러다보니 ‘열매’맺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겨버립니다. 삼십배에서 육십배로, 그리고 백배까지 성장하고 발전하고 풍성하게 맺는 밭이 되고 싶어하고 그것을 ‘예수’믿는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에 빠져들 것을 염려하셨던 걸까요? 주님은 분명 어떤 것은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라는 순서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점점 많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애당초 길가, 돌작, 가시덤불처럼 밭이 달랐으니 결실하는 양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불모지의 땅이 결실하는 땅이 되었다는 사실에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농부는 밭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제 밭이라면 길가라도, 돌작이나 가시덤불이라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씨를 뿌리기 위해, 아니 떨어진 씨앗이 결실하게 해주려고 땀흘려 수고하고 갈아엎어줄 겁니다

    결국은 농부 때문에 길가도, 가시덤불도 씨앗이 자라는 옥토가 될 겁니다

    농부의 수고가 고맙기만 합니다 이제야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려고 했던 말씀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 복음의 씨앗을 아끼지 않고 뿌려주신다는 사실 말입니다.

    .

    내 밭이 어떤 땅인지, 혹은 얼마나 결실했는지에만 마음을 빼앗겨 ‘천국복음’의 씨앗을 업쑤이 여기는 ‘에서’같은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있는 한 ‘버려진 땅’이란 없는 겁니다. 비록 세상의 억압과 강요앞에 황폐해지고, 믿음이 파산한 것 같은 형편에 떨어졌다고 해도, 여전히 쓸모 없다하지 않으시고 천국 복음의 씨를 아낌없이 뿌리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복음의 씨앗을 품은 땅이라면 그곳이 어디든지, 그분의 수고로 인해 마침내 백배, 육십배, 삼십배 하나님 나라가 결실하게 될 겁니다. 어떤 밭이라도 그 몫만큼 결실하게 될 것입니다. 이 희망의 메시지를 마음에 품고,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는 주님과 함께 나아가십시오. 이 일을 이루실 주님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이며, 믿음의 근거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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