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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08/13 성령강림후 열한 번째 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3. 8. 9. 17:35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창세기 37:1-4, 12-28 혹은 열왕기상19:9 - 18

      응송 | 시편 105:1-6, 16-22, 45b

    2독서 | 로마서 10:5-15

    3독서 | 마태복음 14:22-33

     

    # 설교음원

    http://naver.me/x6AT24Pl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nNagaMYXYQ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로렌초 베네치아노, ‘베드로를 물에서 구해주는 예수’, 1370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1

    요즘들어, 부쩍 우리 사회에 증오범죄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덕분에 평안한 일상을 꿈꾸는 보통 사람들의 소박한 바람도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모두 다 분노하지만, 이런 반사회적 범죄들을 단순히 당사자들의 문제만으로 치부해서는 곤란합니다. 우린 알게 모르게 서로와 연결되어 있고,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사회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도 우리 자신과 무관할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나’ 중심으로 작동되는 이기적인 세상이 되고 부터, 우리 사회는 ‘서로’, ‘함께’라는 단어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가까운 과거만 해도, 어느 집에 좋은 일이 일어나면 마을 사람 모두가 잔치를 열고 함께 기뻐해주었지만, 이미 옛날 옛적 동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먼 친척보다 가깝다던 이웃은 실종되고 나 이외의 타자는 그저 비교와 경쟁의 대상으로 삼다보니, 내가 행복해 질 수 없다면 누군가의 행복을 파괴해서라도 만족감을 얻으려는 끔찍한 세상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1독서 구약본문안에서 모두가 작당해서 한 사람의 삶을 파멸로 몰아넣는 악마적인 모습을 엿보게 됩니다. 그것도 믿음의 가정, 야곱의 집안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배가 다른 형제간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 가족이라는 것은 분명한데, 형제들에 의해 막내 아들 ‘요셉’이 죽음에 내몰리고 말았습니다. 성서기자는 비교적 덤덤하게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가족이라도 별 수 없을 만큼 사람의 본성이란 결국 똑같다는 겁니다. 인내심이 있고, 참을성이나, 체면을 잘 지켜낼 만큼 인격적인 사람들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조건이나 환경이 달라지게 되거나 조금만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게 되면 결국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본성은 여실히 드러나고 맙니다. 궁극적으로 보면 모두가 똑같을 뿐입니다. 

     

    2

    이럴 때일 수록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착각 중에 하나는, 예수를 믿으면 더 인격적이고, 더 참을성이 있고, 더 세련되어서, 시련이나 역경이 찾아와도 이겨낼 수 있게 될 거라고 속단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오히려 신앙인으로 세상을 살다보면 더 힘겹고, 속상한 일들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3독서 복음서 말씀은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제자들은 강 건너편으로 급하게 배를 띄웠습니다. 방금전까지만해도 엄청난 군중들이 몰려들었지만 그들은 모두 흩어졌고, 주님의 명령을 끝까지 따르는 것은 언제나처럼 제자들에게 주어진 몫일 뿐입니다. 주님 없이 제자들끼리만 나선 길이 왠지 불안 불하고 위태롭게만 보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평온하게만 보이던 바다가 한 순간에 사납게 돌변하더니, 금방이라도 배를 뒤집어 버릴 듯 바람과 파도가 제자들을 덮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이미 14장 본문의 시작단락에서 충분히 예측되었던 일입니다.

     

    그 무렵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자기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 때문에 그가 이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 마태복음 14:1 - 2

     

    ‘그 무렵’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던 즈음입니다. 그때 예수님 앞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던 세례자 요한이 분봉왕 헤롯에 의해 목이 잘려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일어난 이 사건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곧장 예수님과 제자들을 향해 닥쳐오고 있는 현실적 위협입니다. 제자 공동체의 암울한 내일이야 말로, 마치 풍랑과 바람에 침몰당하게 생긴 작은 배와 다를 바가 없던 겁니다. 이런 상황에 떨어지자 호기좋게 주님을 따라 물에 뛰어들었던 수제자 ‘베드로’ 조차 예수님께 ‘믿음이 작은 자’라는 책망을 듣게 될 만큼, 제자 공동체의 상황은 엉망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바람도 풍랑도 피해갈 수 있을 만큼의 ‘믿음’이 없던걸까요? 물위를 걷던 ‘베드로’처럼은 아니어도, 예수의 제자들이라면 이런 시련 쯤은 느긋하게 이겨낼 수 있을 만큼의 믿음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이 물음은 지난주일 말씀에서 제가 여러분께 우리가 야곱이 씨름하듯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도하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날까요?라고 했던 물음과 똑같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오늘 여러분이 처한 어려움이나 시련은 믿음없던 우리 탓일 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3

    이 말씀을 읽을 때 유념해야할 것은, 제자들에게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혹은 왜 베드로는 물에 빠졌느냐는 핵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물음은 결국 스스로를 구원해내지 못했을 만큼 믿음이 없었다는 신앙적 정죄를 초래할 뿐입니다. ‘믿음’을 자신의 업적처럼 생각하는 ‘자기의’의 또 다른 얼굴일 뿐입니다.

    하지만, 지금 제자들이 처하게 된 시련은 그들의 믿음의 수준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이런 상황은 그들이 초래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벗어나거나, 막아낼 수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만약 제자 공동체가 떨어진 이 상황이 ‘믿음’의 문제라고 한다면, 우리들의 운명은 절망적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베드로는 공포를 이겨내고 사나운 파도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사람은 물에 빠지면 살기 위해 제 몸보다 작은 널판지라도 붙드는 것이 본능입니다. 그러니 그는 아무나 할 수 없는 놀라운 믿음을 보여준 겁니다. 하지만,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에 그는 속절없이 무너졌고 하염없이 시퍼런 물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우리가 가진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전히 베드로의 믿음이 수준이 낮았을 뿐, 더 큰 믿음만 있었다면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 팔백오십명과 싸워서 이겼을 만큼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신앙의 능력도 대단했던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라면 어떻습니까?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주님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죽였습니다.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 | 열왕기상 19:11b

     

    하지만, 1독서 선택본문인 열왕기상 19장에서 보게되는 ‘엘리야’는 왕비 이세벨의 살해 위협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할 만큼 두려움에 떨어진 형편없는 사람일 뿐입니다. ‘믿음’을 마치 대단한 사람이 되기 위한 능력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믿음’에 대한 전적인 오해일 뿐입니다. 우리 중의 누구라도 ‘엘리야’나 ‘베드로’같은 믿음을 가질 순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 떨어지면 우린 모두 똑같습니다.

     

    4

    주인을 잃고 흔들리던 배는 비로서 주님이 오르시고 나서야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비록 물고기 두마리 보리떡 다섯개처럼 볼품없고, 작은 바람 소리에도 물속에 빠져들 만큼 연약해 보이는 제자 공동체라도, 어떤 파도와 풍랑속에서도 침몰하지 않을 겁니다. 요한을 살해한 서슬퍼런 권세가 목숨을 위협한다고 해도 그들의 걸음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겁니다. 여기에서 핵심은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사도 바울은 제자 공동체인 우리 모두의 희망의 근거가 여기에 있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 로마서 10:13

     

    우리 ‘구원’은 우리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바람만 불어도 언제 믿음이 있었는가 싶을 만큼 형편없이 무너지는 이런 믿음 조차도 붙들어주시는 ‘예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의지를 철회하신다거나,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을 거부하신다면 누구라도 구원은 불가합니다. ‘구원’이야 말로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는 주권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바울 사도의 외침처럼, 오직 ‘주님의 이름’안에서만 성립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편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은 ‘누구든지’라는 단어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이 되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구원일 수 없다면, 예수님을 우리 모두의 구원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운 좋게 주님을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왔다고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은 구원이라고 자랑한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구원이 될 수 없던 풍랑과 바람같은 상황에 떨어지는 순간 우리에게도 주님은 구원이실 수 없게 될 뿐입니다. 문제는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모두 언제, 어느날, 어떤 사람이 두려움에 떨어졌던 처절한 상황에 떨어질른지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상황에 떨어져있을 뿐입니다.

    다시 바울 사도의 외침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누구든지’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사도의 외침안에는, 이미 구백년 전 망해가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던 선지자 요엘로부터 이어져왔던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호소하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 시온 산 곧 예루살렘 안에는 피하여 살아 남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부르신 사람이 살아 남아 있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 요엘 2:32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구원을 간구하는 이들은 누구라도 하나님께서 다 구원해내신다’는 이 말씀을 상투적이거나 허투루 믿지 마십시오. 그거야 말로 우리 신앙이 위태로운 상황에 떨어졌다는 반증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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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시던 주님을 보고 ‘유령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유령’은 실체가 아닌, 공포에 사로잡힌 이들에게만 자신을 드러나는 헛된 존재일 뿐입니다. 두려움에 떨어지게 되면 우리도 제자들처럼 헛것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과 유령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올 지도 모릅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가 나아가야 하는 길에는 여전히 거센 풍랑과 바람이 숨어 있습니다. ‘바람’과 ‘유령’이 끝없이 삶을 덮쳐올 겁니다. 그럴때마다 우리는 또다시 베드로처럼 끝도 보이지 않는 심연 밑바닥까지 빠져들지 모릅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절망에 떨어졌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칠천명’이 남아 있다고 위로해주셨던 것처럼, 온통 희망이 끝장나버린 것 같은 절망에 짓눌려 있어도, 아직 우리에게는 희망의 이유가 남아 있습니다. ‘주님, 살려주십시오’라는 베드로의 외침에 사나운 파도를 헤치고 번개처럼 달려와 그의 손을 붙들어 주신 예수님입니다. 아무리 무너지고, 아무리 깨어져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결코 망하지 않을 겁니다. 세상 모두로부터 버려지고 살해당한 벼랑 끝에서라도 하나님은 능히 구원하신다는 변치 않는 약속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 이름 안에 오롯이 새겨져있기 때문입니다. 

    무더위와 장마, 태풍에 이르기까지 혹독한 여름을 지나고 있습니다. 예술가들은 초록으로 변해가는 나뭇잎안에서 태양을 보고, 흔들리는 억세풀안에서 바람을 본다고 합니다. 볼 수 없던 바람의 존재가 눈에 들어올 때까지, 들리지 않던 꽃이 개화하는 소리가 들릴때까지 모든 감각을 집중하며 기다리는 이들이 ‘예술가’입니다. 세계가 열릴때가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예술가들의 갈급함과 목마름으로 예수님께 집중하십시오. 그분에게 일어났던 하나님의 일에 마음과 뜻과 영혼을 온전히 기울이는 겁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예수의 이름으로 누구라도, 어떤 상황에서라도 구원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이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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