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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7 성령강림후 열세 번째 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3. 8. 23. 11:18
# 성서일과 독서 본문
1독서 | 출애굽기 1:8-2:10 혹은 이사야 51:1~6
응송 | 시편 124
2독서 | 로마서 12:1-8
3독서 | 마태복음 16:13-20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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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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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일, 하나님의 일
1
오늘 복음서 이야기는 기독교 공동체 모두에게 너무나 익숙한 사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 16:16
교회 공동체가 사도 베드로의 이 고백을 귀히 여기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그 고백위에 세우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은 구체적으로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을 것이냐?’의 해석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유대교나 이슬람과 갈라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있느냐’에 대한 답변에 따라, ‘교회’와 ‘성도’의 정체성이 확정된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베드로 사도에 의해 고백된 예수님의 정체성은 두 가지입니다. 첫번째는 ‘그리스도’라는 것, 두번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 즉 ‘구원자’라는 뜻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동일하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두 단어를 합치면 결국 ‘구원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라는 고백이 완성됩니다. 하지만 ‘예수’를 하나님의 구원으로 믿는다는 것은 이천 년전 유대 사회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오늘 우리도 베드로의 고백은 어렵고 낯설기만 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 고린도전서 1:23b
이건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로마 황제처럼 세계를 손안에 둔 정복자도 아니고,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대제사장들처럼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명성을 얻은 것도 아닙니다.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철저하게 실패했고 망한 겁니다. 여전히 사람들의 눈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는 ‘구원자’로 보이질 않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돈이나 명예, 그럴듯한 노후 준비처럼 인생과 삶을 지탱해 줄 수 있는 것을 ‘성공’이나 ‘구원’으로 여길 뿐입니다. 그래서 ‘나’자신 뿐만 아니라 그런 형편에 떨어진 사람들을 볼 때마다 불편했던 겁니다. 하나님께도 버려진 실패한 인생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2
1독서 구약본문은 ‘요셉’이야기가 끝나고 이어지는 ‘모세'의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물에서 건진 자’라는 뜻의 애굽식 이름입니다. 히브리인 ‘아므람’과 ‘요게벳’사이에서 태어났던 순간부터 ‘죽음’에 내몰린 비참한 인생이었습니다. ‘요셉'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애굽의 왕은 히브리인들의 세력이 커져 자신들을 위협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두려움은 결국 폭력으로 이어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폭력’을 사용하는 이들은 겉으로는 강한 척해도 실은 내면이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을 뿐입니다. 바로는 결국 히브리 산파들을 시켜 사내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 죽이라고 엄한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사람 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산파들의 신앙 덕분에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불어납니다. 뜻대로 되지 않자 갓 태어난 사내아이들 모두를 살해하라는 특단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제 모세의 부모도 그를 지켜줄 수 없습니다. 꼼짝없이 죽게 생긴겁니다. 이보다 비참한 운명이 있을까요? ‘헤롯’에 의해 살해될 위험에 내몰렸던 아기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모세’나 ‘예수님’을 영웅처럼 미화하기 위한 것도, 어떤 사람들만의 기구한 운명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의 위협에 떨어져있습니다. 누구라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도 어떤 아이들은 태어나면서 부모에게 버려지고, 심지어 돈 몇푼에 사고파는 물건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따지고 보면 그저 하루를 건강하게 살아간다는 것만도 ‘기적’이라고 해야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하지만 죽음이 모세를 삼키기 직전에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모세의 어미 요게벳은 이렇게 죽일 수는 없다는 생각에 모세를 갈대상자에 담아 떠나보냈는데, 때마침 강에 나왔던 애굽 왕의 딸이 그를 건져 올린 겁니다. 그리고 이후에 아시는 것처럼 모세는 공주의 양아들이 되어 궁궐에서 자라게 됩니다. 죽음의 손길에서 완전히 벗어난 겁니다. 성서기자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삶에 개입하셨던 증거라고 전합니다.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빠졌던 ‘요셉’을 건져내셨던 그 하나님이 죽음에 던져진 ‘모세’를 건져올리셨던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요셉이나 모세를 건져올리시기 위해 일하실 때, 그 사실을 눈치챘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이란 늘 ‘비밀’한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말씀하실 분도 있을 겁니다. 맞습니다. ‘믿음’을 배제하고 본다면 그렇게 밖에는 경험할 수 없고, 그렇게 밖에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우연’이라도 우리는 그것을 ‘필연’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우연’이 실제가 되게 하시고, ‘죽음’을 오히려 ‘구원의 길’로 이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 입니다.
만약 ‘요셉’이나 ‘모세’의 이야기안에서 ‘하나님’이 침묵하셨다면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세요. 오늘 ‘하나님의 손’을 지워낸다면, 우리 인생은 어떻게 될까요? 물론 밥도 먹어야 하고, 일상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돈’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고 충족하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생명’은 없습니다.
3
이렇게 말씀드리면 더 실감이 날 것 같습니다. 만약 ‘태양’이 꺼져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평상시에 태양이 생명에 절대적인 조건이라는 사실도, 하나님께서 우리 생명을 지키고 계신다는 것만큼 실감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태양’이 꺼진 세상처럼, 하나님을 지워낸 인간 삶이란,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죽음’ 뿐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이 우리안에 없다는 겁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으며 사는 것이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드러났음을 믿는 겁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사도 베드로의 고백이 그것을 말합니다.
이건 베드로가 뛰어나서 깨닫게 된 것이 아닙니다. 똑똑하고 지혜롭고 능력이 많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고, 그분의 말씀이 천둥같은 말씀으로 듣는 귀가 열리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1독서 본문에서 서슬퍼런 바로 왕의 명령을 거부했던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브아’가 그런 신앙을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믿음의 수준이 남달랐던 걸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야 말로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바로’왕 보다 높으신 분이라는 ‘경외’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을 경험한 사건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처럼 제 아무리 ‘믿습니다'라고 말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당신을 드러내주시지 않는 한 경험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는 대신에 오히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셨으니 ‘복’이 있다고 하셨던 겁니다.(16절)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 19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베드로가 대견하셨던 것인지, 주님은 베드로에게 터무니 없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그가 수제자였다는 사실과 더불어 주님께서 ‘하늘 나라 열쇠’를 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사도 ‘베드로’를 대단한 믿음, 대단한 능력을 가진 놀라운 인물처럼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무슨 ‘만능의 능력’을 얻은 것으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본문에서도 그 증거는 여지 없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았다고 하실 만큼 주님께 칭찬받는 고백을 했던 ‘베드로’였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는 예수님에 의해 ‘사탄’이라고 책망을 받는 땅끝까지 추락해 버렸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결코 사람을 영웅화하지 않습니다. 열쇠를 받은 베드로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땅에서 매고 푸는 대로 하늘에서도 그렇게 되는 이런 놀라운 열쇠를 주시는 분이 누구시냐는 겁니다.
4
구약과 신약의 말씀안에 단서가 고스란히 담겨있으니, ‘열쇠’에 대한 행방을 찾는 것은 그닥 어렵지 않습니다.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둘 것이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자가 없을 것이다.’ | 이사야 22:22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살아 있는 자다. 나는 한 번은 죽었으나, 보아라,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 요한계시록 1:17b -18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약속해주셨던 ‘열쇠’는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선물은 베드로를 놀라운 능력자로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드로의 구원과 능력이 되어주시겠다는 약속이었던 겁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기독교 신앙은 하늘로부터 신비로운 능력을 부여 받는다거나, 놀라운 사람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을 기쁨으로 채우시고, 죽음을 이길 힘이 되시며, 어둠을 밝혀주시는 ‘빛’되신 구원의 하나님을 만나고, 그 영광에 사로잡혀 자신을 부인하고 지워내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모두 ‘구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하나의 사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고, 생명의 주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것이 뭘까요? 어떤 능력을 더 얻어야 하고, 어떤 복을 더 받아야 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분임을 경험하게 된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데, 우리 편에서 조급할 이유도 혹은 무엇이 되지 않았다고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그저 하늘의 은총을 누리며, 하나님 백성으로 살면 됩니다. 더 많은 일, 더 많은 업적, 심지어는 교회 부흥 조차도 크게 보이지 않게 됩니다. 생명의 풍성함,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고백의 내용인 겁니다.
5
이런 고백에 잇대어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 로마서 12:1b
우리의 몸으로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며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뭔가 대단히 결연하고 막중한 순교적 헌신같은 것이 떠오르셨다면, 아직 ‘복음’을 능력으로 경험하지 못하신 겁니다. 바울은 제물로 드려질 ‘몸’을 4, 5절에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된 우리들 자신이라고 밝힙니다. 하나된 주님의 ‘몸’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이들이야 말로 예수께서 자신의 몸으로 삼아주신 ‘교회’인 겁니다. 우리 때문에 주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이 아니라, 우리 같은 사람들도 한 몸으로 받아주신 주님께서 머리가 되어주셨기에 우리가 교회일 수 있는 겁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마음, 그분의 뜻과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하나님 나라가 나를 통해 드러나고 실현되는 ‘삶’ 을 살아갈 때, 말씀이신 주님이 비로서 우리의 몸으로 육화하시는 겁니다. 그것을 상징하는 예식이 바로 ‘성찬례’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 로마서 12:2
이 일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은 ‘분별함’에 있습니다. 시대의 풍조에 끌려다니지 않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마음을 가지는 겁니다. 하지만 대체 언제 ‘주님의 몸’다운 교회가 되고, ‘주님의 백성’답게 말씀이 육화되는 삶을 살 수 있을런지 조바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의 권면을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스스로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 | 12:3b
‘분별’의 핵심은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가르고 뭔가 의미있고 거창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 말씀에서 베드로는 한가지 이유 때문에 주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한 탓’입니다. (23) 그리고, ‘사람의 일’은 ‘내 생각에는’이라는 말로 드러나는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25절) 하지만, 오늘 성서일과 본문은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만 하시는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일’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 일’을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구원’입니다. 마땅히 생각해야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각 사람에게 주어진 분량과 분수에 맞게 생각하는 것은, ‘구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믿음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제 손으로 상황을 낫게 하고 구원해내려하니, 조급해지고, 부산해지고, 비교와 경쟁에 떨어지는 겁니다.
저는 지금까지 제가 걸어온 모든 시간이 함께 하신 주님의 인도안에 있었다는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선하신 당신의 뜻을 따라 이끌어 가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살고 있으니, 숨 쉬는 것 뿐만 아니라 주어진 모든 것들이 ‘은혜’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은혜에 길들여지다보니 자연스레 앞으로 제 인생이 어떤 시련이나 어둠에도 무너지지 않을 것을 또한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꺼이 당신과 한몸으로 삼아주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의 운명을 지켜줄까요?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하려는 열심, 하늘 나라 열쇠를 통해 무언가를 이루어보겠다는 조바심은, 이제 그만 내려놓으십시오. ‘구원’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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