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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23 성령강림주일 23주
    카테고리 없음 2016. 10. 23. 15:41

    20161023   성령강림주일 23



    본문 - 요엘 2:21 ~ 32                       https://youtu.be/jltp4-t6uN0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신다"







    1 

    논어에 “何憂何懼(부하우하구):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라는 말이 있습니다 

    송나라에서 공자의 문하로 들어온지 얼마 않되는 제자 사마우가 공자에게 군자에 관하여 여쭈었습니다 당시 송에 두고온 사마우의 형 ‘사마환퇴’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늘 근심과 공포에 사로잡혀있던 때였습니다 

    "군자는 걱정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걱정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군자라고 합니까?" 하고 여쭈어보자 공자께서는, "안으로 자신을 돌아보아 꺼림칙한 것이 없다면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 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범인은 눈에 보이는 것 즉 내 주위의 형편이 어찌 돌아가는지를 걱정하지만, 군자는 옳고 합당한 길을 걷고 있는지 자신안의 것을 걱정한다는 말입니다


    2

    아마도 공자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보고 한마디 한다면 “부하우하구” 라고 하지 않을까요 ?

    우리는 참으로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전 시대에 비하여 터무니 없을 만큼 풍족함을 누리고 있습니다 동시대 안에서도 우리는 저 먼 이국의 땅에서 굶주림과 두려움속에 살아가는 누군가보다 더 풍족함과 여유로움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가끔은 우리가 이렇게 많은 것들을 누리고 살아도 괜찮은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더 많은 두려움속에 살고 있습니다 삶의 질이 높아지고, 누리는 것들이 많아질 수록, 가진 것이 많을 수록, 잃어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져만 갑니다 그러니 진정 걱정해야할 것! 바르고 옳은 길을 걸으며 살고 있는지에 대한 걱정을 할 여유도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늘 이런 본질적인 질문앞에 서지 않으면 우리들의 삶은 한순간에 퇴락하고 맙니다 불의에 타협하고, 편법을 추구하고, 남을 속이고, 자신도 속이고, 하늘도 속이며 오직 눈앞의 이익에만 탐닉하는 소인배로 전락할 수 밖에는 없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3

    이스라엘에 큰 재난이 임했습니다 애굽에 임했던 재앙처럼 엄청난 메뚜기 떼가 몰아닥친 것입니다 메뚜기 떼가 휩쓸고 간 뒤에 남은 것은 황폐해진 빈 땅 뿐 이었습니다 온 식구들의 생명이 달린 추수의 결실을 꿈꾸며 여름 내내 땀흘렸던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평생을 모아온 재산이 하루 아침에 불에 타버린 것처럼 이스라엘 땅에 남은 것은 사람들의 절망 뿐이었습니다 한 두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그 땅에 누구도 예외 없이 벼락처럼 직면하게 된 참혹한 현실입니다

    부하우하구 ?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듣기 좋은 호사스러운 말일 뿐입니다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해졌으니 말입니다 뭐 바르게 사는 것이나, 정직하게 사는 것, 하나님을 향한 정직한 신앙의 길을 걷는 것은 모두 배부른 말로만 들릴 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재난이 임하기 이전에도 그들에게는 이 질문은 낯설기만 했습니다

    사실 신앙이 무너지기 시작했던 솔로몬 왕때로부터 재난이 일기 이전까지 그들은 자신들의 배를 채우며 만족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며 살아왔습니다 어느새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과 정직한 삶은 자신들이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이상의 의미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하라고 하시고,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라고 하는지는 아무런 부담도 되지 않습니다 하물며 제사장들 조차도 거룩한 성전에서 자신의 배를 채우는데 급급했으니 그들에게 있어서 누구도 ‘부하우하구?’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던 총체적인 문제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4

    그런 삶이 계속되다 보니 이제는 양심도 굳어집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탐욕에 취해있는 내 자신이 부끄럽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거나 예물을 드림은 그저 종교적 의미만 남습니다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자신들의 살을 찌우고 나서 남은 것을 드립니다 하지만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타인을 향해 베푸는 손은 이미 거두어진지 오래입니다 나르시즘에 노예가 되어버린 것처럼, 모두 자기만을 우상으로 섬기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부끄러운 마음도, 두려운 마음도 생겼지만 하루 이틀 계속되는 시간속에서 이제는 굳은 땅처럼 무뎌진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문제는 그 무뎌짐이야 말로 하나님과의 거리였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하나님 신앙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 존재할 수도, 성립될 수도 없는 민족이며 나라였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존재가 되어버렸으니 에덴에서 좇겨난 아담과 하와처럼 이제는 그들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만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5

    그러던 어느 날, 평상시와 똑같은 오늘을 기대하며 일어나 보니 참담한 장면이 펼쳐진 것입니다 이렇게 매일 매일 아무일 없이 살 수 있다고, 이제 하나님도 필요없다고 여기던 그 날이 끝나버렸습니다 

    배를 두들기며 노래하고 춤추고, 걱정없이 쾌락에 취해 살던 시간은 끝이 나버렸습니다 이제 또 다시 생존의 문제가 닥쳐왔습니다 갑작스런 재난에 정신이 없습니다 막막하기만 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그런대로 하나님의 개입없이도 살아내고 있었고, 그럴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았던 모습이 모두 무너졌습니다 농사는 망쳤고 다음해 수확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받아야하는지 모릅니다 살아가야할 소망마져 끊어진 고통의 순간이 찾아온 이후에야 이스라엘은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됩니다 

    마치 평생을 정신없이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죽음 앞에서야 비로서 삶을, 사랑해야하는 것들을, 마땅히 바른 것들을 돌아보게 되는 어리석음 처럼 말입니다

    이제야 다시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여호와의 이름이 그들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이름, 생존의 이름으로 다가옵니다


    6

    삶의 터를 몽땅 잃어버린 사람들의 눈에는 메뚜기 떼에 의하여 황폐하여진 그 벌판만 보였습니다 애써 심어 놓은 식물들이 모두 사라졌지만 죽은 것을 다시 살려낼 수 없으니 절망입니다 이제 끝나버린 자신들의 처지만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의 문제도 본질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때 선지자 요엘이 그들앞에 섭니다 요엘은 영적인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본질적인 것을 꿰뚫어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었고, 사람들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열려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본질적인 것에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참담해있던 그때! 선지자 요엘은 가슴을 뛰게 만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음성을 전합니다


    21~22절입니다  굉장히 시적인 선지자의 노래이지요 들짐승들의 생존을 위해, 나무가 열매를, 무화가 나무와 포도나무가 힘을 낸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생명을 살리려 스스로의 희생의 길을 힘차게 걸어가는 모습입니다 

    죽음이 덮인 그 땅에서 다시금 들풀과 열매들이 힘을 내며, 과실을 맺혀질 수 있도록 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 허허벌판, 죽음이 지배하는 그 현실속에서 선지자 요엘은 하나님이 풀이 돋고, 열매가 맺혀 다시금 생명이 푸르게 뒤덮게 하실 추수의 날을 미리 보고 있습니다 

    불가능의 땅, 불모지의 땅, 좌절의 땅, 그 현실속에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열심히 ,힘을 내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았으니 요엘은 얼마나 가슴이 벅찼을까요?

    메뚜기 떼의 대 재앙앞에서 선포되는 요엘의 이야기, 즉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듣게 된 이스라엘은 비로서 자신들의 삶과 죽음의 모든 것이 하나님안에 있음을,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의 이 절망을 덮고 그들을 구원하실 이름은 하나님 뿐임을, 그러니 늘 하나님의 그들의 살아있음의 근거였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 가장 본질적이며 돌아보아야 것들, 공자의 말대로라면 스스로를 돌아보아 마땅함으로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메뚜기 떼가 휩쓸고 간 재앙만을 보았지만 요엘은 메뚜기 떼로 인한 황폐함이 아닌, 하나님과의 단절, 하나님 없이 살았던 삶이야 말로 재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무너진 이스라엘의 영적인 황폐함이 그들을 죽입니다 그러나 메뚜기 떼가 휩쓸고 삶의 터전이 몽땅 무너져버린다고 하여도 더욱 본질적인 하나님 신앙을 잃지만 않는다면 이스라엘은 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이시기 때문입니다


    7

    요엘은 어떻게 그 사실을 볼 수 있었고,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요 ? 어떻게 요엘은 처참한 패망의 자리에서 힘줄이 돋고, 앞장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할 수 있었을까요 ? 다시 말해 어떻게 요엘은 흩어지고 사라질 부질없는 것들이 아닌, 삶의 본질에 마음을 두고 지켜낼 수 있었을까요 ? 그의 영적인 예민함은 어디서부터 왔을까요 ?


    요엘도 사람입니다 혼자 뚝 떨어져 도를 닦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요엘도 먹어야 사는 사람이었고, 그도 사람들 틈 속에서 살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달랐습니다 범인들 사이의 군자의 모습처럼 말이지요

    차이점은 한가지 입니다 요엘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도, 꽃이 피거나, 비가 내리고, 가뭄이 오고, 계절이 바뀌어도 언제나 하나님이 그의 생각의 가운데에 계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이 내 삶, 내 능력이었다면 선지자 요엘에게 오늘을 살아있음은 하나님이 붙들고 계심때문이었고, 오늘 찾아온 아픔에서 건져내실 구원자도 하나님 뿐이었습니다


    요엘이 그러했듯이 오늘 우리들이 부딪혀야만 하는 본질적인 질문은, 메뚜기 떼에 의한 황폐한 논과 밭을 어떻게 할 것인지 ? 다음해까지 어떻게 먹고 살것인지 ?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바르고 정직하게 서있지 못한, 하나님도 이웃도 보이지 않고 오직 나만 보이는 자기애속에 무너진 자리를 어떻게 구원하고 회복할 것인지가 본질적인 물음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이 경험되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님만이 구원자이시라는 고백은 풍족할 때는 쉬우나, 굶주림이나 절망앞에서 고백되기 쉽지 않습니다 눈앞의 절망은 현실이기 때문이지요

    아니 어쩌면 풍족함 가운데에서 더 하나님이 구원자이심을 고백하지 못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풍족한 매일속에서 어느새 구원자이신 하나님은 사라지고 내 힘으로, 내 뜻으로, 내 방식대로, 내 살아감으로, 내가 주인됨으로 살아내는 우리 삶속에서 과연 하나님이 구원자이심은 어디쯤에서 고백되어질 수 있을까요 ?

    어려운 상황속에서, 낯설은 환경속에서, 아픈 현실속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 구원입니다 의사는 병든 사람의 구원자입니다 일자리가 필요한 이들에게 직장은 구원자입니다 배고픈 이들에게 돈은 구원입니다 하지만 이런 구원은 본질적이지 않습니다 본질적인 구원은 하나님이십니다


    8

    사실 오늘 본문의 주제가 되는 부분은 28절 이후입니다 많은 이들이 암송하기도 하고 찬양으로 노래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처럼 특별한 이들에게만 부어지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신다는 놀라운 말씀이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지나친 은사에 대한 기대감으로, 예언, 환상, 비젼과 같은 단어에만 눈을 빼앗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메뚜기 떼의 재앙으로부터의 구원이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 본격적인 아니 근본적인 하나님의 구원이 새로이 시작될 것이라는 알리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구원은 이정도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선지자 요엘의 영적인 감수성, 즉 구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으로 살아내는 흗늘리 없는 그 영적인 상태야 말로 메뚜기 떼도 지배할 수 없는 구원의 자리입니다 


    주의 영, 성령이 임하시는 이유, 각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이유, 만민에게 부어주시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이스라엘 뿐만 아닙니다 아이나 청년이나 어른들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더하여 남종과 여종들까지 이르는 만민에게 임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든지 살아있는 사람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셨으니, 만민안에 성령이 임하셨으니 우리는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입니다 본질적인 물음을 갖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이곳에 있는 우리들 모두는 누구는 해당되고 누구는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모두다 예외 없이 주의 성령의 임하심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바르고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인지, 무엇이 구원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인지 사람사는 땅에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정의가 무너진 곳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소망이 무너진 사람들에게는 요엘의 예언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소망을 전해야 합니다 곳곳마다 찾아가 절망의 자리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전해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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