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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성령강림후 열 다섯 번째 주일카테고리 없음 2024. 8. 28. 09:33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아가 2:8 ~ 13 혹은 신명기 4:1 ~ 2, 6 ~ 9
응송 | 시편 45:1 ~ 2, 6 ~ 9 혹은 15편
2독서 | 야고보서 1:17 ~ 27
3독서 | 마가복음 7:1 ~ 8, 14 ~ 15, 21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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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 사도 '그리스도인' - '말씀'대로 살아내기
1.
대체로 한국교회 신자들이 많이 읽는 성경은 ‘창세기’와 ‘로마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번 성경을 읽어보겠다고 하면 성경의 첫번째 책이다 보니, 아무래도 ‘창세기’는 가장 많이 읽혀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내용적으로는 아마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복음’의 진수가 잘 정리된 ‘로마서’가 많이 읽혀질 겁니다. 하지만 반대로 잘 읽혀지지 않는 책들도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생소하고 낯설은 유대 제사 규정이 가득한 ‘레위기’ 정도일테고, 신약에서는 오늘 2독서 서신서 말씀인 ‘야고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야고보’서를 불편해 하는 까닭은 아무래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실천하는 신앙을 강조하는 내용 때문일 겁니다. 여러분은 ‘설교무용론’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설교’는 말 그대로 ‘설교’일 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쓴소리입니다. 오죽 목사들이 말하는 대로 살지 않고, 신자들이 들은 대로 살지 않으면,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일까 싶으니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야고보’서는 이런 우리의 연약한 민낯을 여실히 들여다 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불편한 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떠신가요? 여러분은 ‘말씀’대로 살고 있느냐?는 물음에 ‘아멘’이라고 답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오늘은 대체 왜, 우리는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지 그렇다면 또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구약 1독서 선택본문은 ‘신명기’ 4장 말씀입니다. ‘신명기’의 핵심 구절을 하나만 꼽으라면 아마도 6장 4절이 아닐까 싶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신명기 6:4
‘신명기’의 핵심 중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유대’백성들에게는 그것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해주는 근거이고, 능력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명령한 말에 한 마디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됩니다. 당신들은 내가 당신들에게 알려 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 신명기 4:2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 백성이라고 할 수 없다고 믿은 탓에, 그들은 정말 말씀 그대로, 하나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 어쩌나 늘 노심초사하며 살았습니다. 아시다시피 말씀을 향한 유대인들의 열정은 대단합니다. 그들은 모세로부터 전해 받은 십계명을 토대로, 거기에 더해 “하라"는 긍정적인 형태로 된 계명 248개와 "하지 말라"고 하는 부정적인 형태로 된 금지 계명 365개로 이루어져있는 무려 613개나 되는 율례와 명령을 만들고 지켜냈습니다. 613개의 계명을 어기지 않기 위해, 매일 계명을 암송하며 지켜냈던 그들의 신앙의 모습을 보면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그럼에도 성경은 그들이 말씀을 지키는 일에 실패했다고 평가합니다. 물론 겉으로는 완벽해 보였지만 말씀을 제 이익을 위한 명분으로 삼는 일이 허다했고, 그마저도 마지못해 따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적 열심에도 불구하고 결국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보면, 우리로서는 잔뜩 주눅이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지켜내겠다는 의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없어집니다.
3.
머릿말에 언급했듯 오늘 서신서 말씀인 ‘야고보서’는 이런 우리를 주저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몰아세웁니다.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 1:22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 1:27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의 말씀 덕분에, 우리의 믿음은 심각하게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아닌, ‘행함’을 요구하는 이런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슬그머니 나는 아닌척하거나, 그도 아니면 애써 모른 척하고 지나치려고 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대충 얼버무린 채로 이 물음을 비켜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물론 더 훌륭하게, 더 많은 일을 감당하고 실천하려고 애를 쓰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대견해 보이기는 하지만 제 아무리 최선을 다하고 노력한다고 해도, 결국 우리의 노력은 어느 수준을 넘어 서지 못하고 맙니다. 겉으로는 말씀을 잘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은 전혀 기쁘질 않고, 마음은 자유롭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이 또한 말씀을 지켜냈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말씀이라는 것은 언제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지키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성서일과 말씀들은 이런 우리의 불편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고백으로 가득합니다.
‘마음이 흥겨워서 읊으니, 노래 한 가락이라네. 내가 왕께 드리는 노래를 지어 바치려네. 나의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다네.’ | 시편 45:1
응송 말씀인 ‘시편’은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찬미의 노래입니다. 1독서 계속 본문으로 주어진 ‘아가’서의 분위기도 비슷합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속삭임 때문에 행복에 겨운 사랑에 빠진 여인의 마음이 절절하기만 합니다. 시편기자처럼 ‘은혜’와 ‘복’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들, 그러니까 ‘말씀’도 우리 기쁨의 이유가 되어야 할텐데,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듣고 있을까 싶습니다. 우리도 나를 향한 주님의 말씀 때문에 가슴이 뛰고 행복했던 사랑의 때가 있었는데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기쁨과 행복의 이유가 되고, 넘치는 사랑으로 경험되었던 ‘하나님 말씀’이 짐짓 자신을 감추고 덧씌우는 무겁고 불편한 종교적 짐이 되어버린 것만 같아 속상한 것은 저 뿐일까요.
4.
복음서는,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먹음으로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을 어겼다고 한통속이 되어 제자들을 비난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그들과 논쟁하고 계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으로 그들과의 논쟁을 정리하셨습니다.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 마가복음 7:6b -7
물론 그들이 없는 말로 제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 정말 열심히, 말씀이라면 토시 하나도 허투루 대하지 않고 지키려고 애썼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왜 이렇게 혹독한 말씀을 하신 걸까요? 구약 성경에 ‘손씻기’ 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된 부분은, 레위기 11장 25, 28, 32절 정도입니다. 주검이나 시체로 인해 부정해 진 것들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씻어내야 한다는 명령이며, 613개 계명중에서 265번째의 규정입니다. 이 말씀이 의도하고 있는 일차적인 목적은 깨끗이 씻음을 통해, 더럽고 부정해 진 것들로 인한 질병이나 피해로부터 신앙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더러워진 것들이나 범죄한 사람이라도 다시 용납받을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 결국은 죄인을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는 것이 의식의 최종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씻음’이라는 행위가 단순히 외적인 종교적 행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통렬하게 깨닫는 근거가 되어야만 하는 겁니다. 그러나,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손 씻음은 그저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종교적 의식일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식사의 자리에서 직접 손을 씻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늘 대신 하인들이 손을 씻어주는 대접을 받으며 잔치같은 식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식사 전 손을 씻는다'는 전통은 너무나 손쉬울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은근히 자신들의 고귀한 신분을 드러낼 수도 있었습니다. ‘율법’이야 말로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야고보 1:25a)라고 말하는 ‘야고보’사도의 주장과 달리, 이들은 은혜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남들에게는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만드는 흉기로 사용했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정말 이들이 틀린 걸까요? 이들처럼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이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혹시 ‘야고보’ 사도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애당초 ‘율법’이나 ‘규례’와 ‘명령’에는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것들이 담겨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5.
이런 의심은 타당합니다.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어떤 면에서 오늘 교회에서 요구하는 거룩하고 신실한 신앙과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에 문제가 있을리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마가복음 7:15
주님의 말씀처럼, 자유와 구원을 가져다 주는 영생의 말씀을 흉기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언제나 우리 자신일 뿐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윽박지르도 생명을 파괴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네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그 말에 복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입으로는 달갑게 여기면서도, 마음으로는 자기들의 욕심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를, 악기를 잘 다루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사랑의 노래나 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네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그 말에 복종하지는 않는다.” | 에스겔 33:31b-32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망하게 되었던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있던 ‘에스겔’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에스겔’ 뿐만 아니라 유대 땅 본토에서도 선지자 ‘예레미야’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지만 유다 백성들은 돌이키질 않았고, 결국 그들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겠다’고 멀리 ‘바벨론’까지 ‘에스겔’ 선지자를 찾아옵니다. 겉으로 보면 대단한 신앙이고, 말씀을 듣겠다는 신실한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백성들이 듣지 않는다고 말하십니다. 여전히 말씀을 듣고 따를 생각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종교적 가식이 놀랍기만 합니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시켜서 한 그 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 말씀이 이루어지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었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될 것이다’ | 에스겔 33:33
하지만 아무리 듣지 않는 이들이라도 결국은 깨닫게 될 날이 오게 될 겁니다.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그 날에는 우리 가운데 ‘예언자가 있었다’는고 후회하게 될 겁니다. 들어도 듣지 못하는 이들의 어리석음은 마치, 제 자신의 일이 되기 전까지는 말씀은 그저 귀로 듣는 것일 뿐,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우리를 닮아 있습니다.
6.
이제, 말씀의 결론을 맺어야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시편 기자나 아가서의 여인처럼 넘치는 기쁨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유와 구원을 주시는 영생하는 말씀으로 누리며 살 수 있을까요?
'겨울은 지나고, 비도 그치고, 비구름도 걷혔소. 꽃 피고 새들 노래하는 계절이 이 땅에 돌아왔소. 비둘기 우는 소리, 우리 땅에 들리오.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무화과가 열려 있고, 포도나무에는 활짝 핀 꽃이 향기를 내뿜고 있소. 일어나 나오오. 사랑하는 임이여! 나의 귀여운 그대, 어서 나오오.’ | 아가서 2:11 -13
이 여인이 이처럼 기뻐할 수 있던 것은, 그리하기로 결단했다거나 얼마나 오래 기다려왔는지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그 날이 왔기에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 날이 왔기에 환호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기다림’의 사람들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바로 이 기다림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다림’은 그저 막연한 것들을 인내하며 참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교회안에는 이 부분에서 큰 오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기독교’가 ‘복음’이 아니라, ‘예수’께서 ‘복음’이라는 사실을 놓친 탓입니다. ‘예수’ 사건의 본질을 놓치자, 유대인들이 그리하듯 ‘주님의 날’을 언젠가 오게 될 막연한 ‘날’ 즈음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다림이 무색할 만큼 많은 시간이 지나자, 오히려 이제는 ‘무관심’하게 잊혀지고 있습니다. 도무지 신앙과 삶이 ‘그 날’, ‘그 나라’와 전혀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였고! 시작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서 걸어갔던 1세기 교회로부터 모든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도 이 신앙의 터위에서만 가능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또한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삶’이란 선물처럼 귀한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고 해도, 삶의 끝이 보이는 상황에 내몰리기 이전까지는 그저 그럴 듯한 말일 뿐 우리는 또다시 내일의 허상을 쫓아 오늘을 소비하고 말 겁니다. 의지와 결단만으로는 힘겹고 무거운 ‘오늘’은 전혀 기쁨이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의미없는 종교성에 떨어지지 않고,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혀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날’이 이미 이곳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 그 절박성에 눈을 뜨는 길 뿐입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 모든 것이 ‘그 분’으로부터 시작되고 완성되었으니, 우리로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사건에 주목하는 수 밖에는 달리 다른 방도란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그 누구라도 죽으면 끝입니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사람이 죽었으나 다시 사는 사건’이 있었다는 소식, 그런 놀라운 일이 우리의 역사안에서 시작되었다는 한가지 소식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증거가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약을 먹고 산 사람이 있었다며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십자가’에서 살해 당했던 이가, 하나님에 의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있었다면, 이미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사실에 마음을 담고, 영혼을 집중하는 것, 그 나라를 가지고 오신 주님께 운명을 걸고 살아가는 것 뿐입니다.
'행함'을 강조했던 '야고보' 사도는 '낙타 무릎'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 할 때 마다 무릎을 꿇다보니 무릎이 낙타처럼 '굳은 살'이 맺혀진 연유라고 합니다. '살아냄'과 '실천'을 강조했던 그의 삶이 결국 언제나 '주님'앞에서의 '기도'로 시작하고, 그곳에서 마쳐졌다는 것은, 숱한 두려움과 염려, 근심과 고뇌, 순교의 위협앞에서도 '믿음'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를 일으켜 세웠던 것이 언제나, 지금 여기에 계시는 '주님'의 나라를 향한 귀 기울임에서 시작되었음을 가르쳐줍니다.
지금 우리 각자의 삶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그 종말의 날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이 절체 절명의 사태에 여러분은 얼마나 눈을 뜨고, 귀를 열고 계신가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지금, 여기에 계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계신가요?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