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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10/27 성령강림후 스물 세번째 주일 (* 종교개혁주일)
    카테고리 없음 2024. 10. 23. 18:39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욥기 42:1-6, 10-17 혹은 예레미야 31:7~9

      응송 | 시편 34:1-8(19-22) 혹은 126

    2독서 | 히브리서 7:23-28

    3독서 | 마가복음 10:46-52

     

    # 설교음원

    http://naver.me/IFgTbYjF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LTdjix1N-Nc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칼 하인리히 블로흐, <예수 그리스도와 소경 바디매오>

     

    '믿는다'는 것, '본다'는 것

     

    1.

    그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올 것이며, 그들이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인도하겠다. 그들이 넘어지지 않게 평탄한 길로 인도하여, 물이 많은 시냇가로 가게 하겠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이고, 에브라임은 나의 맏아들이기 때문이다.’ | 예레미야 31:9

     

    오늘 선택본문은 예레미야 31장 말씀은 ‘하나님’께서 포로로 끌려가 땅의 끝으로 흩어진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가슴벅찬 약속의 말씀입니다. 응송인 시편 기자도 ‘하나님의 구원의 날’을 기뻐하며 찬양하겠다고 소리를 높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정겹습니다. 하지만, 도무지 현실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이런 희망의 노래를 계속 듣다보면, 느닷없이 현기증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예언은 헛된 망상처럼 들리고, 기쁨의 노래라는 것도 그저 나와는 무관한 남의 이야기처럼 냉담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이런 식의 말씀이나 설교도 자꾸만 희망고문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마주하게 될 내일은 더 나아질 것도 좋아질 만한 건더기도 보이질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보면 정말 어제나 오늘, 그러니까 예수 믿기 이전이나 예수를 믿으며 사는 오늘이나 딱히 달라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는 오늘 왜 예수를 믿고 있는 걸까요?

     

    2.

    올해는 ‘가을’이 느닷없이 찾아왔습니다. 혹독한 무더위가 갑자기 물러갔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가을의 빛깔이 지천으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재미있습니다. 정작 ‘가을’자체는 눈에 보이질 않는다는 겁니다.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데,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익숙한 방식으로만 본다면, ‘가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지금이 ‘가을’이라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는데, 갑자기 ‘가을’은 존재하는 것인지 자신이 없습니다. 

    우리는 감각을 통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인지하게 됩니다. 듣는 것과 보는 것, 그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보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저 또한 이런 감각에 의존해서 모든 것을 직접 듣고, 보고 확인하려 들었고, 그런 것만이 있는 것이라고 단언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들어 점점 나 자신이 ‘듣는다’ 거나 ‘본다’라고 하는 것에 회의적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눈을 감고 듣고, 눈을 감고 보려고 하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그럴 것이다’라고 확신했던 것들이 대부분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오히려 인생과 삶, 그리고 역사가 보이지 않는 것들을 통해 작동하고 있다고 실감한 탓입니다. 우린 이면에서 역사하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듣는 것과 보는 것이 모든 감각을 통제하기 시작하는 순간, 이런 인식과 깨달음은 쉽게 잊혀지고 지나쳐버리게 됩니다. 그리곤 다시금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염려와 근심, 두려움에 떨어지고 말 겁니다. 이런 일을 우리는 숱하게 반복하며 경험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알지 못한다’는 말이 있음에도,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보이는 것으로 쉽게 사람을 평가하거나 신뢰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엉터리 같은 선택이었는지는 또다시 배신과 상처로 얼룩지게 되는 ‘시간’을 통해서만 깨닫게 됩니다. 

    한 눈에 천하를 내려다보고 세상 이치를 꿰뚫어본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정작 사람은 자기 자신의 마음 조차 헤아리지 못할 만큼 그 품이 작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일어난 일이 내일은 어떤 상황으로 바뀔른지도 모르고, 또한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들어야 할 것들은 듣고 보아야 할 것들은 보기 위해서 더 유심히 들어야 하고, 더 진솔하게 들여다 보아야만 합니다.

     

    3.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보는 것’과 동일시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 히브리서 11:1-2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무엇을 보는 것이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의 삶이란 또 무엇을 보면서 사는 것을 말하고 있을까요? 오늘 복음서 말씀을 통해 이 답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복음서 말씀은 계속해서 ‘마가복음’이 주어집니다. 오늘 예수님 마주했던 특별한 사람은 ‘바디메오’라고 불리우던 눈먼 거지였습니다. ‘바디메오’에서 ‘바’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디메오’라는 이름은 ‘디메오’의 아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디메오’라는 이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절망, 부정, 더러움, 불결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저 부정하고 불결한 사람이라고 불렀을 뿐, 정작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의 신세가 참으로 서러워 보입니다. 세상은 늘상 이런 식입니다.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 못난 사람, 실패한 사람 처럼 처해있는 형편이나 상황으로 부를 뿐,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리곤 어느새 사회 안에서 ‘그런 사람’이라고 낙인을 찍고 그의 이름을 빼앗아가 버리고 맙니다. 

    여튼 그는 여리고성 부근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날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눈’을 뜨게 된 겁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본문의 이야기안에서 ‘바디메오’가 경험했던 이 놀라운 기적에 쉽게 시선을 빼앗기고 맙니다. 나도 그런 기적을 경험하고 싶다는 조급함 때문에, ‘바디메오’가 어떻게 말했고, 어떻게 행동했는지, 어떻게 믿었기에 기적의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를 배우려고만 합니다. 그리곤 부르짖어 기도하라던가, 주님께로 나아가라, 혹은 절대적으로 믿으라는 식의 단어 몇개로 본문의 메시지를 읽고 지나칩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기적’은 성경의 곳곳에 넘쳐납니다. 이 시간에 성경이 소개하고 있는 ‘기적’사건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를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간단히 이렇게는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직접 보지 못한 어떤 ‘사건’이 있었음은 틀림없습니다. 그 사건은 마치 자연법칙을 뛰어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기적 사건’을 기록했던 당시의 성서기자들에게 오늘의 우리들처럼 ‘자연법칙’을 이해할만한 지식이 없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그런 식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런 사건을 통해 무엇을 경험하고 목격하였느냐?가 훨씬 중요한 겁니다.

    성경의 기적 사건은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것에 마음을 담고 머물면 않됩니다. 성서기자는 바로 ‘하나님 경험’ 그것을 말하기 위해 ‘기적’ 사건을 언급할 뿐입니다. 기적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기적은 곧장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다는 믿음으로 이어져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오늘 그들의 경험을 근거 삼아, 우리 자신에게 허락된 방식과 삶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믿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르게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4.

    여튼 오늘 사건은 그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그러고보면 우리도 들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소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소식 말입니다. 그런데 ‘바디메오’의 들음은 놀라운 경험으로 이어졌는데, 정작 우리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질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믿을 만한 일이 없다는 겁니다. 까닭이 무엇일까요?

    일단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바디메오’의 반응과 관련된 ‘동사’를 주목해 보세요. 그는 먼저 듣고, 외치기 시작했고, 일어서서 주님께로 나아갔으며, 결국 보게 되었고, 따라 나섰습니다. 같은 ‘복음’을 들었으면서도, 여전히 멈추어 있고, 절망하며, 주님이 아닌 상황과 세상에 내몰리고, 영광을 보지 못하며, 주저하는 우리와 다른 모습입니다.

     

    당신 앞에 서게 된 ‘바디메오’를 향해 주님이 하신 질문은 지난 주일 그러니까 바로 앞단락인 36절에서 제자들에게 던지셨던 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 마가복음 10:51a

     

    제자들은 주님의 물음에, 주님의 좌, 우편 으뜸되는 자리에 세워달라고 헛발질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바디메오’는 무엇이라고 답했을까요?

     

    그 눈먼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 마가복음 10:51b 

     

    분명한 것은 그에게는 제자들이 구했던 것들이 전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는 겁니다. 그저 그가 바란 것이라고는 ‘보는 것’ 한가지 뿐이었습니다. 이 답변이 제자들에게 실망하셨던 주님의 섭섭한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마가복음 10:52

     

    곧장 그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5.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듭니다. 대체 ‘믿음’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대뜸 눈먼 거지 ‘바디메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한 것’이라고 선언해 주셨으니 말입니다. 대체, 우리 기준으로 볼 때 그가 주님 앞에서 ‘믿음’이라고 할 만한 무엇이라도 했었을까요? 혹시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무언가를 바라는 우리 마음도 그 만큼이나 진실하고, 간절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겉으로 보면 우리나 제자들이나, 그리고 ‘바디메오’나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첫번째 그와 우리들, 서로가 바라는 것들이 달랐고, 두번째 그것을 들어주시기를 바라고 있는 각자의 주님이 달랐다는 겁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는 예수님께 ‘믿음’을 인정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비교나 경쟁에서 타인들보다 우월한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으뜸되기를 바랬던 제자들의 바램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 그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요구했습니다.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바디메오’가 원하는 것은 ‘눈 뜨는 것’ 한가지 뿐입니다. 이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라도 막상 시력을 몽땅 잃게 된다면, 전재산을 내어주어서라도 고치려고 할 겁니다. 그렇다면 ‘눈 뜨는 것’이 ‘부자’가 되는 것보다 귀한 겁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 마땅하고 당연한 선택에 주저합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에 이끌려 눈 뜨는 것에는 관심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귀한 것이라고 실감이 난다면, 그것 하나 만으로도 만족하면서 기쁘게 살아야 할 텐데, 이미 내 손에 들어온 것은 본래가 내것이었던 것처럼 여겨지니 곧장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겁니다.

    이게 바로 사람의 본성입니다. 너도 나도 다 똑같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이미 출애굽했던 공동체의 이야기안에서 숱하게 보았습니다.

     

    이집트 사람은 '우리 모두 다 죽게 되었다'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서 이 땅에서 떠나라'고 재촉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빵 반죽이 부풀지도 않았는데, 그 반죽을 그릇째 옷에 싸서, 어깨에 둘러메고 나섰다.’  | 출애굽기 12:33-34

     

     

    서슬퍼런 ‘바로’와 제국의 압제로부터 탈출하던 그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둘러 급하게 빠져나와야만 했습니다. 언제라도 바로의 마음이 바뀔지 알 수 없었으니까요. 얼마나 급했는지 빵 반죽이 부풀기도 전에 반죽채로 짐을 싸들고 나왔다고 합니다. 먹는 것을 따져물을 시간도 없었던 겁니다. 그만큼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 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성인 남자라면 보름, 여성과 노인들이 있다고 해도 한달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라고 생각했던 출애굽 여정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겁니다. 먹거리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이스라엘 진중에 소란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마실 물이 없어서, 먹을 것이 없어서, 고기가 없어서, 불평이 끊이질 않습니다. 심지어는 만나 때문에 이제는 살게 되었다고 감동했던 것이 엊그제 일인데, ‘이것 밖에 없으니 입맛마저 떨어졌다’는 불평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민수기 11:6) ‘내일도 살 수 있겠다’ 확신하는 순간, 살게 되었다는 기쁨은 간데 없고 오히려 덜 중요한 것 때문에 죽고 싶다고 원망하는 처지로 떨어지게 되는 겁니다. 모두다 참으로 소중한 것,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없을 만큼 둔해지고 무뎌져 벌어진 일입니다.

     

    6.

    우린 어떨까요? 오늘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천국은 어떤 곳이고,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예수께서 가져다 주신 ‘천국’이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드러난 생명이 충만한 나라라는 사실에 가슴이 뛰시나요? 여러분이 믿고 계신 하나님이 혹시 풍요와 안정, 복지 같은 화려한 삶을 약속하는 저 가나안의 ‘우상들’ 중에 하나 같은 신은 아닌가요? 아니면, 광야에 내몰려 죽을 수 밖에 없던 사십년 동안, ‘그래도 나는 너만은 반드시 살려내겠다’고 구원의 손길을 베푸시는 분입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 안에서 이런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면,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눈은 뜨고 있으나 실은 보지 못하는 이들’일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바디메오’가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주님의 눈으로 본다면 지금 그곳에는 눈 뜬 사람은 ‘바디메오’ 한 사람 뿐입니다. 충만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갈망하던 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바디메오’의 이름을 불렀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더러움의 아들이라고, 불결한 사람이라고 불렀을 뿐, 오늘 본문에서 처럼 그가 나타나면 늘상 꾸짖고 내어쫓기가 일쑤였습니다. 가까이 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부끄럽지만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여전히 우리는 ‘바디메오’의 이름 보다는, ‘눈먼’ 그리고 ‘거지’라는 단어를 그의 이름으로 기억하고 맙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 우리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앞에 선 그를 ‘바디메오’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고 물으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가장 높으신 그가, 가장 비참한 땅의 아들인 ‘바디메오’를 향한 이 물음안에는 있는 그대로 그를 받아들이고, 하늘보다 귀한 존재로 대하시는 하나님의 순전하고 따듯한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그는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 히브리서 7:25a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예수를 만나고 그를 본 사람들은 '바디메오'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대로 자신을 용납해주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먹는 것도, 입는 것도, 권위도 아닌, 마땅히 구해야할 한 가지를 구할 수 있도록 '눈'을 열어줄 수 있습니다. 다시 ‘보게 되는 눈'을 가지면 어떻게 될까요? '다시 보게'되었다고는 하지만 '바디메오'는 이전의 다른 사람들처럼 썩어 없어질 것이 아니라, 예수의 길을 따라나섭니다. 생명의 길이 그이의 안에 있음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을 보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오늘의 우리는 어떤 것들을 보고 있는 걸까요? 주님을 만나기 이전의 것들을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안에 담겨있는, 그리고 주님만이 가져다 주실 전혀 새롭고 신령한 것들을 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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