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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30 대림절 제1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5. 11. 26. 15:23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이사야 2:1-5
응송 | 시편 122
2독서 | 로마서 13:11-14
3독서 | 마태복음 24:36-44
* 설교음원 및 영상은,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이사야서 2:4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말씀을 따라 UN 앞에 세워진 동상 ⓒGetty Images '평화'를 연습하는 사람들
불가능한 꿈 앞에서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대림절을 시작합니다. 대림(Advent)은 '도래', 곧 ‘오심’이라는 뜻입니다. 오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셨던 주님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분이 열어놓으셨던 희망의 날을 향한 기다림의 문을 다시금 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무엇을 희망하며 기다림의 불을 밝히고 계신가요? 하나님에 의해 세상이 근본적으로 변화될 그 ‘평화’의 날을 갈망하고 있나요? 혹시라도 현실성없는 막연함에 절망하다보니, 어느새 상술로 덧칠해진 세속의 크리스마스에 시선을 빼앗겨버린 것은 아니겠지요?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곤 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칼과 창으로 가득하고, 우리의 일상은 끝없는 경쟁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성경은 주님에 의해 온 땅 가운데 평화가 임하고 사랑으로 가득찰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정말 가능할까요? 대림 첫주 성서일과 말씀들은 이 불가능해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는지,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솔직한 여러분의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1.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리라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절망의 시대였습니다. 기원전 8세기, 북이스라엘은 이미 당대 최강대국 앗수르의 군사적 압박 아래 무너져버렸고, 남유다 또한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위기의 순간을 걷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강대국들 사이에서 느끼는 불안과 헤치고 살아가야 하는 인생의 막연함을 그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 이사야는 놀라운 예언을 선포합니다.
"그가 민족 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
| 이사야 2:4우리가 감동하며 ‘아멘’한 그의 말이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더 없이 황당한 이야기였다는 것을 아시나요? 지금 당장 아시리아 군대가 쳐들어올 판입니다. 군사훈련을 해도 부족할 판인데, 칼을 쳐서 농기구를 만들라니요. 마치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창인 시대에,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에서, “무기 만드는 일은 포기하고 평화롭게 삽시다"라고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 이 말을 믿겠습니까?
게다가 이사야의 예언은 그가 살아 있을 때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로부터 230년 후,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우리 눈으로 보면, 이사야의 예언은 마치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그렇다면 이사야는 틀린 것이고, 거짓 선지자가 아니었는가?’라고 묻고 싶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서는 그가 외쳤던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실패로 끝난 그의 예언안에 ‘하나님 말씀’이라고 할 만한 무언가 담겨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걸 들여다보는 것이 오늘 우리의 신학적 통찰과 신앙의 내용이 되어야만 합니다.
자신의 예언안에서 이사야가 보고 있던 것과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다릅니다. 우리는 그의 예언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만,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외칠 수 있던 겁니다. 그 결정적 차이는 이사야가 인간의 시간표가 아닌 하나님의 시간표로 미래를 보았다는 겁니다. 그는 이미 인간의 노력으로는 결코 평화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외교를 잘하고, 국력을 키우고, 동맹을 강화해도, 결국 인간의 힘으로는 진정한 평화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류 역사상 전쟁 없는 시대는 없었습니까? 아무리 발전하고 문명화되어도, 여전히 전 세계는 천문학적인 돈을 무기 개발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어제의 우방이 오늘의 적이 되고, 평화협정이 맺어졌다가도 하루아침에 깨집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이런 인간 역사와 그 안에서 경험했던 우리의 무능과 절망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소망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림절’의 정신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어둠으로 덮인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소망의 불을 밝히는 것 말입니다.
2. 평화를 연습하며 사는 삶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언젠가 평화를 이루실 텐데, 우리는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성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그날을 미리 살아보는 연습, 그날의 삶을 앞당겨 사는 증인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대림절은 바로 그 연습을 다시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세상도 늘 연습을 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세상은 전쟁을 준비합니다. 군사훈련을 하고, 더 강력한 무기를 만들고, 경쟁에서 이기는 법을 배웁니다. 개인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를 비교하고, 뒤처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남들보다 앞서가는 법”을 끝없이 연습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정반대의 길을 가르칩니다.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경쟁이 아니라 사랑을, 지배가 아니라 섬김을 연습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의식적인 선택과 반복,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다시 선택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더 어리석어 보입니다. 모두가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데 나만 십자가의 길을 택하는 것 같고, 모두가 돈과 권력을 좇는데 나만 자기를 비우고 나눔을 선택하는 것은 손해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내용입니다. 세상이 전쟁을 연습할 때 우리는 평화를 연습하고, 세상이 미움을 학습할 때 우리는 사랑을 배우며, 세상이 움켜쥐라고 할 때 우리는 나누는 법을 익힙니다. 이것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삶입니다. 물론 현실은 ‘칼’과 ‘창’을 내려놓으면 불안해지는 곳입니다. 돈이 없으면 무시당하고, 경쟁에서 뒤처지면 패배자로 낙인찍힐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게 계속 무장하고 대비하고 경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평화를 연습합니다. 오늘은 작아 보이고, 당장은 손해처럼 느껴져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평화의 날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이야기만 보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이야기를 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완성의 날을 기다리며, 아직 오지 않은 그 나라의 삶을 지금 여기에서 미리 연습하는 것, 그것이 대림절 신앙입니다.
3.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삶
2독서인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 기다림을 살아내는 또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한때 율법을 누구보다 철저히 지키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야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었지요. 그러나 그는 결국 깨달았습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인간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움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 로마서 3:28이 고백은 우리 모두를 완벽주의의 감옥에서 풀어 줍니다. ‘완벽해져야 구원받는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 곧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 서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율법을 버리자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율법의 본질, 곧 사랑을 살려 내라고 말합니다. 이웃을 경쟁자나 위협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보는 것, 그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그 사랑을 완벽히 이루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질투와 경쟁이 인간 존재 깊은 곳에 배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포기해야 할까요? 바울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 로마서 13:11지혜란 하나님의 시간을 아는 것입니다. 구원의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잠든 사람처럼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롬 13:14). 13절과 14절을 이어주는 헬라어 접속사는 ἀλλά입니다. 앞에서 말한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그 대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먼저 나쁜 것을 다 버려라, 그러면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될 것이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비로소 앞에서 말한 것들을 조금씩 버릴 수 있게 된다고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육신은 끊임없이 욕망을 향해 기울어집니다. 그 사실을 부인할 필요도, 부인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옷’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매일 아침 옷을 갈아입듯이, 어제까지의 실패와 무너짐을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두고, 오늘 다시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결단이 아니라, 일상의 수행입니다.
바울 자신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고백했습니다. 구원의 기쁨과 육신의 욕망 사이에서 날마다 씨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나는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해 내고, 잠들기 전에는 “오늘도 결국 그분의 은혜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고백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잘했는지, 얼마나 완벽했는지는 결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 옷을 털고, 다시 그리스도로 옷 입으면 됩니다. ‘내일’을 가져다 주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매일 그리스도로 옷 입는 이 수행 자체가 우리를 은혜로 서서히 물들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인간의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변화의 길로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4. 하나님 앞에 서는 것
3독서 마태복음 본문은 긴박함이 고조됩니다. 다름아닌 예루살렘 성전의 붕괴와 세상 끝날에 일어날 대재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떨어지는 날, 우리가 의지하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그 날에 대한 경고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크고 작은 재해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별일 없을 것만 같은 오늘 같은 시대에 우리의 문명이나 인생이 이런 식으로 끝나리라는 말은 좀처럼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구약의 ‘노아’ 때 일어났던 ‘홍수’ 이야기를 덧붙이십니다. 그때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일상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들이 우리만 못하고 특별히 더 타락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알 만큼 알고, 소유할 만큼 소유한 '똑똑한'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을 놓쳤습니다. 홍수가 닥칠 때까지 깨닫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늘 똑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너희는 깨어 있으라’(마 24:42) 말씀하셨던 겁니다. 하지만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밤새 잠을 자지 않는 것이나, 혹은 늘 긴장하며 불안해하는 것처럼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평화를 가져다 주신 예수님께서 사이비 이단 교주처럼 우리를 불안에 떨어뜨리실리가 없습니다.
‘깨어있으라’는 것은 라틴어 "Coram Deo” 즉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라는 겁니다. 매 순간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의식으로, 하나님 앞에 선 듯한 태도로 살아가는 겁니다. 출가 수도승들은 이렇게 살기 위해 세례자 요한처럼 세상을 등졌습니다. 검소하고 단순하게 살면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장바닥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살아갑니다. 현실적으로 수도승처럼 살아 갈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삶의 태도 만큼은 똑같아야만 합니다. 교사든, 간호사든, 요리사든, 목수든, 전업주부든,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서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앙의 수행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있는지, 주님과의 친밀함 속에서 내 영혼이 풍요로워지는지를 보면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어떤 상황, 어떤 순간에 그런 자유를 경험하고 계신가요?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신다는 임재를 느끼고 있으신가요? 그런 순간이 간절히 기다려지나요? 성공이나 물질적 풍요가 아닌 주님께 간절하다면, 그야 말로 깨어 있는 삶입니다.
불가능한 꿈을 향한 여정, 대림
오늘부터 우리는 사주간의 대림절 여정을 시작합니다. 단순히 성탄절이라는 절기를 준비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쟁과 기근, 절망에 삼켜졌던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그토록 간절히 바랬던 꿈, 세상이 근본적으로 변화될 그날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입니다. 칼이 보습이 되고 창이 낫이 되는 우리가 닿을 수 없던 불가능이 현실이 되는 것을 보게 될 희망이며,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이루신다’던 예수 말씀안에서 보게 될, 지금까지 그 어떤 역사의 날보다 현실적이고 확실한 우리의 운명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이것을 불가능한 꿈이라고 말합니다. 비현실적이고 순진한 생각이라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간절함은 그럴 수록 더욱 깊어집니다. 우리는 주님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평화를 연습하며 살아갈 겁니다. 사람들이 경쟁에서 이길 방법을 찾고, 세상이 전쟁을 준비할 때, 우리는 주님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서 걸어갔던 신앙의 사람들을 따라, 예수와 한 운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매일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갑시다. 물론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 내일의 소망을 붙잡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불가능한 꿈을 꾸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꿈이 아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반드시 이루어질 미래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여러분은 반드시 깨어 있으십시오.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그리고 평화를 연습하며 살아가십시오. 우리가 걸어간 그 걸음 위에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주님이 이루시는 '평화'가 자라날 겁니다. 그 나라와 그 때가 오고 있습니다. 대림절 첫번째 주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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