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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4 성령강림 후 19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6. 9. 30. 07:35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출애굽기 20:1-4, 7-9, 12-20 혹은 이사야 5:1~7
응송 | 시편 19
2독서 | 빌립보서 3:4b-14
3독서 | 마태복음 21:33-46
* 설교음원과 영상은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보임, 그 너머를 듣는 일
1.
성령강림후 열아홉째 주일, 우리는 또다시 거룩한 말씀의 숲 앞에 섰습니다. 계절이 깊어갈수록 바람은 차가워지고, 나뭇잎들은 제 삶의 가벼운 옷을 벗어 던지며 조용히 땅으로 내려앉고 있습니다. 세상은 날마다 비우는 연습을 하는데, 정작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무언가를 채우려 소란스럽기만하니 부끄럽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영혼은 왜 이토록 곤비하고 피곤하기만 할까요? 세상의 소리가 너무 크고 빽빽해서 정작 들어야 할 하늘의 음성을 놓치고 살기 때문은 아닌가 싶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고, 남보다 앞서야 하며, 내 몫을 챙기기 위해 고함을 질러야만 살아남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오아시스를 잃어버린 사막의 길손처럼 바짝 말라가고 있습니다.
지금껏 우리는 매주 예배당에 모여 기도하고, 설교를 듣고, 성경을 펼쳐 읽습니다. 하지만 불현듯 "나는 참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내가 들었다고 믿는 그 소리는 혹시 내 욕망이 만들어낸 아늑한 메아리는 아닌가?” 너무나 분명하다 싶었던 신앙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스스로를 향해 던지는 질문앞에서 화들짝 놀라곤 합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 (고후 13:5)
사도 바울의 말처럼, 오늘 함께 읽은 성서일과 세본문들도 우리를 이 절박한 질문 앞으로 불러세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신앙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가 믿는다라고 말하고 있는 그것 말입니다.
2.
1독서인 출애굽기 말씀은 시내산의 웅장하고도 두려운 광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번개와 연기, 쾌청한 하늘을 갈라놓는 나팔 소리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도자 모세에게 애원합니다.
어른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시오. 우리가 듣겠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우리는 죽습니다. (출 20:19)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 영이시며 온 우주에 가득 찬 신비로 계시는 그분의 거룩함 앞에 감히 피조물인 인간이 직접 설 수 없다는 거룩한 공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낸다는 것이 나의 깨어짐, 즉 육의 한계를 벗어나는 '영적인 죽음'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던 겁니다. 참으로 솔직하고 정직한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이런 식으로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쉽게, 그리고 무심히 말씀을 읽고 지나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실은 ‘말씀’을 ‘말씀’으로 경험해 본적은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보니 모세는, 그리고 옛 신앙의 선조들은 어떻게 그 무한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던 건지 의문이 듭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음성을 우리 삶의 이정표로 삼을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그 실마리를 '우리가 듣겠다'던 군중의 외침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실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는 것은, 하늘의 음성이 들리느냐 들리지 않느냐? 채근하고 윽박지르는 설교자의 외침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울리는 우뢰처럼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고집으로 꽉 찬 마음, 듣고자 하지 않고, 배우려들지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 말씀은 결코 들리는 법이 없습니다.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을 통렬하게 자각하는 사람, 길가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멩이의 서글픈 아우성에서도, 철없는 어린아이의 눈망울에서라도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배우려는 가난한 심령을 가질 때 비로소 닫혀 있던 영혼의 귀가 열리고, 하늘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가난해진 영혼, 비워진 영혼만이 하나님의 음성이 머물다 가는 거룩한 성전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누군가를 가르치려 들고, 훈계하려 하며, 내 판단을 절대화하는 자 오만함을 하늘의 소리는 뚫고 들어가질 못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소란한 내 목소리를 잠잠히 멈추고, 그저 그분께로부터 듣고자 하는 '듣는 자의 마음의 결'에 달려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모든 자연의 소리, 모든 내면의 울림을 다 하나님의 음성이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 공기가 가득하지만 너무나 당연하여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듯, 하나님의 은총이 온 우주에 충만하다 하여 아무 소리나 덥석 하나님의 말씀으로 취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삼을 수 있을까요? 20절 말씀이 시약(試藥)으로 삼을 만한 근거입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을 시험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이며, 당신들이 주님을 두려워하여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출 20:20)
말씀은 늘 우리를 시험합니다. 과연 자신을 절대화하려는 타성과 유혹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오만을 부술 수 있는지 말입니다. 내가 옳았음을 증명하고 내 욕망을 정당화하는 목소리는 거짓된 소리 결국은 스러지는 환청일 뿐입니다. 그런 선택에 익숙해지면 삶이 피폐해질 수 밖에는 없게 됩니다. 생명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탓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듣기에는 매우 씁니다. 생명의 길을 걸으려면 거슬러야 하고 돌이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3.
그러나 현실은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 하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정작 그분의 음성을 외면하고 맙니다. 이사야 5장에 등장하는 포도원의 노래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비극과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아프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땅을 일구고 돌을 가려내어 가장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망대를 세우고 즙 짜는 틀까지 준비하며 정성을 다했습니다. 당연히 극상품 포도가 맺히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런데 맺힌 것은 먹을 수 없는 들포도뿐입니다. 질문해 봅니다. 누구의 잘못입니까? 아마도 포도나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하지만 본래 들포도나무는 들포도를 맺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열매는 나무가 애를 쓴다고 맺히는 것이 아니라, 농부의 수고와 자비로운 햇살, 그리고 땅의 기운이 빚어내는 은혜의 결과일 뿐입니다. 아무것도 결실하지 못한 포도나무를 향해 담을 허물고 황무지로 만들겠다고 호통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자연스럽지가 않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어 "이제 끝이다!"라고 외치시는 이유는, 정말로 끝장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제발 돌이켜 살기를 바라시는 타는듯한 애틋함 때문입니다. 그들이 돌이켜 당신의 은빛 은총 아래에서 다시금 참된 사랑을 공급받는 아름다운 포도나무가 되기를 원하시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가혹한 심판과 분노처럼 들리는 선지자의 메시지는 사실은 '예언이 실패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으로 읽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듣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예배와 제사, 종교적 제의만 열심이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에만 열심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망했습니다.
이 안타까운 사랑의 드라마는 마태복음 21장의 포도원 주인과 소작들에 대한 비유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사실 복음서 말씀은 구약의 예언서의 말씀에서 이어지는 후속편입니다. 그토록 듣지 못하고 들으려 하지 않던 이들에게 실망하시면서도, 포도원주인이신 하나님은 지금껏 포도원을 포기하지 못하고 계셨습니다. 못쓰게 된 땅, 포기하고 버리겠다던 으름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들을 보내고 또 보내고 계셨습니다. 아무리 보내도 종들을 통해 전한 메시지를 듣지 않자, 이제는 하나뿐인 당신의 '아들'까지 보내신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눈이 어두워지고 들을 수 없을 만큼 귀가 먹어버린 소작인들에게 주인의 진심은 전해지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이 자신들의 것이 될 것이라는 발칙한 생각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욕망에 눈이 멀자 주인의 은혜도, 아들의 거룩함도 보이지 않게 된 겁니다. 하늘로부터 듣는 법을 잃어버리자 의 음성을 들을 귀를 잃어버린 인생은 마침내 그 아들마저 길 밖에 던져 죽이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바로 이 아들의 모습 속에서 나를 향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가슴 시린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의 말씀은 교리적 지식이나 사변적 언어가 아니라,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아들까지 내어주신 실존적인 사랑을 실감하는 방식으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4.
교회안에서 우리는 그렇게나 자주 결단합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지. 들포도가 아니라 좋은 포도를 맺고 결실하는 신자가 되어야지.”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애를 쓰면 쓸수록 깊은 절망과 무력감에 빠지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내 열심으로 신앙의 성취를 이루고, 내 힘으로 은혜를 얻으려 하고, 내 노력으로 주인의 사랑을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서인 빌립보서에서 이것을 가리켜 '육체에 신뢰를 두는 일'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고, 가문과 학식과 열정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엘리트였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조건들이 과연 그에게 진정한 평화를 주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 열심은 오히려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를 핍박하는 가시가 되었고, 타인을 단죄하는 잔인한 무기가 되었으며, 헛헛한 심령, 깊은 정죄감에 짓눌렸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육의 삶을 지키고 성과를 이루어내야 조건들과 종교적 열심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막는 해로운 가림막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니, 바울의 깨달음이란 참으로 놀라운 전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삶을 지탱하던 가치를 모두 포기하고 말 그대로 백기를 들었던 거니까요.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빌 3:12b)
이 문장안에는 신앙의 신비가 숨어 있습니다. 내가 어떤 위대한 깨달음을 얻어 도를 얻거나, 주님을 향해 열렬히 달리고 스스로 하나님을 붙들어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나를 사로잡아 주셨기에 내가 비로소 그분 뒤를 따라갈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은혜입니다. 비교와 경쟁, 성과와 효율성을 입증해야만 살아남는 종교적 세상안에 갇혀 있던 바울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덮쳐왔습니다. 사로잡힌 겁니다. 이 주도권의 전환, 즉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나를 사로잡으신 주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살아남으려던 비참한 몸부림과 욕망은 비로소 멈추게 됩니다. 자유를 얻게 된 겁니다.
5.
이제 우리는 다시 처음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 그리고 신앙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했던 질문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매주 설교를 듣고, 성경 지식을 쌓고, 큐티책의 빈칸을 채우는 종교적 루틴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나의 불완전함과 무력함을 겸허히 인정하고, 지금 이 순간 나를 둘러싸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실감하며 사는’ 겁니다. 신앙은 애써 그렇게 살아내는 노동이 아닙니다.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뒤집어 쓰는 거추장스러운 포장도 아닙니다. 나를 사로잡으신 그 크신 사랑을 실감하기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거룩한 중독 상태로 들어가는 경험입니다.
화려한 진수성찬 앞에서 허겁지겁 음식 탐욕을 부리는 사람은 밥 한 알이 담고 있는 참 맛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주려진 마음으로 갓 지은 쌀밥 한 톨을 입에 넣고 오래도록 씹어본 사람은 알게 됩니다. 그 소박한 밥 한 알 속에 들어있는 아득하고도 달콤한 감칠맛, 가득히 담겨있는 농부들의 수고함과 꿈을 말입니다. 영적인 삶이란 이런 겁니다. 세상의 거창한 소리와 화려한 성공에 눈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허락하신 작고 소박한 일상, 아침의 서늘한 공기, 타인의 따뜻한 한마디, 나를 위해 울어주는 이들의 눈물, 그 모든 사소함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알아차리는 경험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결코 부재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그러나 가장 실존적인 신비로 지금도 우리 삶의 포도원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그분께 내 삶의 운전대를 맡겨 드리는 것,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참된 ‘믿음'입니다. 모쪼록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둔해진 영혼의 귀를 열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고집을 내려놓고 “주의 여종이 듣겠나이다”라고 고백했던 마리아의 가난한 마음이 우리에게도 부어지기를 원합니다.
나를 사로잡으신 그리스도의 손길에 기꺼이 포로가 되어, 세상이 줄 수 없는 깊은 은총과 평화 속에서 좋은 열매를 절로 맺어가는 저와 여러분의 거룩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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