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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1 성령강림후 19주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2020. 10. 8. 11:31

    성서일과

           1독서 | 출애굽기 32:1 ~14 혹은 이사야 25:1 ~ 9

           응송 | 시편 106:1 ~ 6, 19 ~ 23 혹은 시편 23

           2독서 | 빌립보서 4:1 ~ 9

           3독서 | 마태복음 22:1 ~ 14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o9HOorDetL_wWu-BuFM4-FP42FYkq2jT/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Meda9ampSwg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1562-64년 베로네제의 유채화,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불안' 을 벗겨내는 하나님의 '평강'

     

    1

    어떤 임금이 귀하게 키운 아들을 결혼시키게 되어 성대한 혼인 잔치를 열었습니다. 국가적인 잔치인 왕자의 결혼이니 규모가 대단했을 겁니다. 문무백관과 나라의 유력자들이 모두 초대를 받았습니다. 누구라도 이런 자리에 한번 참석해 보는 것이 소원일 텐데, 왕에게 초대받은 사람들은 그닥 잔치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평상시 하던 대로 할일 하면서 왕의 초청을 무시했고, 심지어 왕이 보냈던 전령을 잡아 면전에서 모욕하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모욕을 당한 왕이 화를 참지 못하고 군대를 보내 살인자들은 진멸하고 동네를 불살라 버리고 맙니다. 여튼 하객도 없이 잔치를 치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왕은 밖에 나가 누구라도 데려다가 자리를 채우라고 명령합니다. 출신, 신분, 악당인지, 선량한 사람인지, 그의 행실이나 사람 됨됨이도 따지지 않습니다. 격식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이렇게 채워진 이들로 잔치가 치루어질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와중에 미쳐 예복을 입지 않았던 이가 왕의 눈에 들어왔고, 노한 왕이 그를 쫓아내 버렸습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재미있으셨나요? 초대를 거부한 이들을 진멸하는 왕이 무섭게 여겨지셨나요? 아니면 왕실 잔치까지 오게 되었지만 예복이 없어 쫓겨난 사람들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으셨나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전해주신비유 말씀입니다. 안에는 사실 두개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첫번째는 잔치에 초대받고도 거부한 이들이 누구인가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조건없이 초대받았지만 예복이 없어 쫓겨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는 임금이 바로하나님 나라천국이라고 하셨으니, 임금의 초청은하나님 나라로의 초대를 말하는 것이고, 결국 임금의 초대를 거절했다는 것은 결국하나님 나라 초대와 부르심을 거부했다는 말인 셈입니다. ‘천국을 마다할 사람이 있겠는가?싶겠지만 사실 오늘도 하늘의 부르심을 가벼이 여기고 거부하는 경우는 허다합니다.

     

    천국의 초대를 거부한 이들이라 핀잔을 받고 있는 이들, 그러니까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할 사람들이 합당하지 않다 그들이 바로유대교인들입니다. 반면에 뒤늦게나마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기독교인들 교회 공동체를 뜻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잔치에서 좇겨난 사람은 교회 공동체안에 있지만 천국에서 소외된 이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 천국의 초청을 받게 은혜를 입었음에도 내어쫓기고 말았을까요?

     

    2

    1독서 출애굽기 32 1 ~ 14절까지의 내용은 사뭇 무겁기만 합니다. 광야 행진 도중,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 삼천명이 죽임을 당하게 되는 끔찍한 사건의 발단이 여기에 담겨있습니다. 끔찍한 참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사로잡혀 약속의 땅을 향하고 있던 이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우리는 사건의 참혹에 대해 우상숭배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정을 둘러보면 이내 무턱대고 비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지만, 그들의 처지는 그대로 매일 생존 위협을 받는 상황입니다. 비록 삶이 고단하고 자유가 없는 노예신분이었지만, 애굽에서는생존자체를 걱정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찬 불안하기 짝이 없는 날을, 구비구비 넘어서야만 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뵙겠다고 산으로 올라갔던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는 사십일 동안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다는 불안감이 덮쳤고, 일순간 그들은 죽게되었다는 집단 패닉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금송아지 만든 것은 이런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이 선택했던 해결책이었던 겁니다. 불안감을 지우기 위해 지금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여기에 계신다는 의심할 없는 표지가 필요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보니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송아지 앞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절일을 선포하고 축제를 벌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아론은 금송아지를 지칭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 32:4b

     

    다른 이방신이나 우상을 염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눈으로 보기 원한다는 바램에서 금송아지를 만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엄습해 오는 불안에서 벗어날 없었던 자신들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찾고 있었을 뿐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금송아지따위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거북스럽게 보일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사실 성전을 지어놓고 하나님을 대하듯 천착했던 유대인들이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다고 만한 차이가 없어보입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 놓인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

    사실 출애굽기의 본문은 열왕기상 12 25 이하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시대의 역사와 문헌사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배경안에서 본문을 읽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이 솔로몬왕 이후 남과 북으로 분열되고 이후에, 땅을 보아도, 속해 있는 지파의 수를 보아도 남유다의 르호보암의 비하면 월등한 세력을 가지게 되었던 여로보암이지만, 그에게는 도무지 만회할 없는 아킬레스같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유다에는 있지만 북이스라엘에는 없는성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며, 공인된 성전은 바로 유다의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땅은 갈라져있더라도, 북이스라엘의 백성들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유다로 건너가야만 합니다. 아무리 현실적 권력이 있어도 여로보암 입장에서는 유다로 건너갔던 백성들이 이탈하고 배신할까 두려울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 것이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벧엘 그것들을 두고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다라고 선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론이 백성들에게 외쳤던 말과 정확히 동일한 말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금송아지 사건의 발단임을 엿볼 있습니다. 성경은 사건 때문에 여로보암을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악한 왕으로 비난하고 있습니다.

     

    3

    다른 신을 섬겼다는 것이나, 열등한 짐승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형상화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로보암왕도, 광야의 이스라엘도 이것 때문에 징계를 받게 겁니다.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이 우상숭배가 되는 걸까요? 먼저 사람들이 언제 눈에 보이는 것을 찾게 되는지를 생각해 봐야합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있는 것을 확실한 것이라고 믿으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을 찾는다는 것은 무언가 믿을 만하고 확실한 것이 필요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상황은 바로불안입니다.

     

    현대에 퍼져있는 대부분의 정신 질환들의 원인이라 불릴 만큼불안 굉장히 무서운 질병입니다. 철학자 알랭 보통은불안속물적 세상이 우리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_알랭 드 보통, '불안', 은행나무_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처럼불안 우리에게 내려진천형 같은 형벌일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떼어놓으려고 해도 위세는 여전하고, 없어보여도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덮기도 합니다. 불안은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갈등에서부터, 바램과, 희망, 욕심, 때로는 지나간 일이나 오늘의 막연함으로부터 찾아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불안이내일 대한 막연함과 모호성이 우리안에서 고개를 드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어쩌다 한번 불쑥 찾아드는 불안이라면, 한번 크게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수준의믿음으로 얼마든지 건너갈 있지 싶습니다. 하지만 찾아온 불안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매일처럼 반복되는불안 사로잡히게 되면 천하 없는 장사나, 아무리 믿음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쓰러지기 마련입니다. 그럴때 우리를 사로잡는 유혹이 바로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붙들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이제야 성경이 금하는우상숭배 실체가 어렴풋이 드러나 보입니다. ‘불안 조급함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 말씀이 약속하는 것은 자꾸만 거부하고 우리의 방식, 우리의 때를 하나님께 강요하게 만듭니다. 불안에 사로잡힌 섣부른 조급함의 결과가 결국은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는 것을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의 손을 놓고 또다시불안 노예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을 기대하는 눈을 거두고, 그를 붙들던 손을 놓는 것이우상숭배 아닐까요?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훈련이 같아도 우리의 연약함은 결국은 이런 식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정도의 차이, 상황의 차이만 있을 누구나 똑같은 형편입니다. 게다가 조금 유식해지고, 그럴듯해 보이고, 윤리적인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해서 여기에서 벗어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길들여 살아온 지금까지의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며, 더욱이 지금도하나님 없이 사는 방식대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한다고 해도 오랜 습성이 벗겨지지 않는 겁니다. 그런 삶에 익숙해있으니 막상 생존의 문제가 닥쳐올 때나, 내일에 대한 막연함이 짙은 안개처럼 삶을 뒤덮고 있을 , 만치를 없다는 답답함이 밀려올 때마다 우리는 다시금 불안이 작동하는 대로 반응하고 무너집니다.

    불안하면 초조하고, 초조해지면 시간도 여유도 사라집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방식은 조급하고 마음 급한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느리고, 비효율적이고, 어리석어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참고, 기다리고, 인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을 외면하고, 자신들이 탑을 쌓아 올리고 어둠을 밝히는 방식을 선택하며 살아온 인간 역사속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소외 당해오셨습니다. 

     

    4

    잔치에 합당한예복 입지 않아 쫓겨났던 사람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넝마 입은 사람이나, 세련된예복 입은 사람을 같은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예복 사람의 생각과 , 살아가는 방식과 됨됨이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천국 잔치에 걸맞는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말은, 여전히 자신이 걸치고 있던 이전의 것을 고집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초대를 받은 사람이라면 누더기는 벗어던지고 그에 걸맞는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삶의 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과는 달리 살아가려고 마음 먹는 순간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느긋한 걸음을 기다리는 막연함 말고, 당장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세우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하라 속삭임이 곧장 들려올 겁니다. 때로는 만큼 기도하고, 만큼 에배를 드리고, 이렇게 교회를 지켜내고, 그렇게 선행을 쌓아 보라는 재촉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지금까지 삶을 돌아보면불안 휘어잡고 있는 우리 실존이 여기에서 스스로 벗어날 없음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 13:14

     

    바울이 감옥에 갇히고 나서 빌립보 교회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내일에 운명에 대한 불안에 온통 휩쌓여 있었습니다. 복음을 따르는 길이 불안해 보이는 순간, 교회는 할례파들의 꾀임에 흔들리던 위태로운 형국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릇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입는 사람,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고, 말씀이 이끄시는대로 살아가야만 한다고 외치고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로 옷입는 외에는 다른 답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그리스도 옷을 입을 있을까요?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 4:9

     

    행하기 위해서는 배우고, 받고, 듣고, 것이 았어야만 합니다. 성도가 주목해야하는 그것은 바로복음입니다. 복음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가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바라시는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행함 삶이 됩니다.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임을 깨닫는 것만이, ‘주안에서삶을 기쁨으로 채울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불안 속삭이는 내일이 아닌, 이미 내게 주어진복음 기쁨으로 붙잡을 , 우리의 삶을 천국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평강 경험입니다.

     

    당장 숨이 멎을 듯한 고통에 짓눌리는 문제도, 지나고 어느 순간 돌아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도우셨구나라고 고백할 때가 있습니다. ‘지나 갔으니 그렇게 보는 것 뿐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고백은 결코 누구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이 밀려올 , 홀로 있는 같은 외로움에 몸서리가 쳐질 불꺼진 제단앞에 엎드려 기도했던 사람, 없는 불안감에 짓눌려 온통 삶이 어둠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 눈물을 삼키며 아무리 불러도 들리는 소리 없는 기도의 자리를 지켜냈던 사람, 납득할 없는 현실이 폭풍처럼 밀려올 때에도, 헤어진 가슴을 부여잡고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멈추지 않았던 사람, 그렇게 밀려오는불안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힘써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받고, 듣고, 보는 일에 믿음으로 나아간 시간을 가진 이들에게만 경험되는 시간입니다.

    역시 바울과 같은 말씀을 드릴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내게서 배운 것과 여러분이 듣고 보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을 협력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탁월한 조화 속으로 여러분을 끌어들이실 것입니다’ | 4:9 ( 메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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