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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07/ 09 성령강림후 5주성서의 거울 앞에 2017. 7. 9. 14:03
본문 - 마태복음 11:16 ~ 19, 25 ~ 30
https://youtu.be/MKrr8p78omI = '클릭' 하시면 설교영상을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안에서 드러난 하나님 나라"
1 헛헛하고 무겁기만 한 삶의 자리에서
지난 한주간도 삶의 걸음 최선을 다해 살아오신 여러분들께 참 좋으신 우리 주님의 위로와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주간의 삶을 살아낸 우리의 걸음이 대견하기만 한 것은 비단 철학자들의 관념 언어라고 치부할 수 없을 만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매일의 삶은 무겁고 답답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괜시리 서글퍼지는 삶입니다
태어남으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삶에는 끊임없는 수고함으로 가득 채워져있습니다 스스로의 수고함이 없이는 무엇하나 내것으로 누릴 수 없고, 당장의 내일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또한 수고함이 없이는 가족의 평안도 지켜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아무런 투정도 부리지 못한 채 수고로이 땀흘리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땀흘리는 노동의 가치을 기쁨으로만 볼 수 없을 만큼 우리 삶은 너무나 수고롭기만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신들의 노여움을 받은 탓에 산꼭대기까지 커다란 돌을 밀어올리고 꼭대기에 이르면 다시 출발점으로 돌을 굴림을 영원히 반복해야하는 시지프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지프스의 내일이 끝없이 수고하는 오늘의 영원인 것처럼 어쩌면 우리들의 삶도 끝을 알 수 없는 수고로움으로 가득해보입니다
과연 우리 인류는 이러한 수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
2 강요와 짐 지우기에 익숙한 세상속에서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은 어느 곳이 되었든 천국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아무리 복지가 잘 되어 있고, 사람 살만한 곳이라고 하더라도, 본질적인 우리 수고의 짐은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이 세대’라는 말로 우리가 터잡고 있는 세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수고를 강요하고 수고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누릴 수 없다고 말하는 세대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내가 주도권을 쥐고 나의 인생을 선택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선택한 것이나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닥 많지 않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의 선택은 어찌할 수 없이 강요된 선택들일 뿐입니다 게다가 짊어져야만 하는 무거운 짐까지 지우면서 말입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지 못하게 되면, 강요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 철저하게 배제되고 소외시키는 세상입니다 낙오된 이를 뒤돌아보아 주거나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경쟁과 갈등속에서 탈락한 이를 동일하게 대우하는 것을 부정의라고 말하는 세상입니다 사실은 이런 생각은 이미 우리들 보편적 정의관으로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와 한국 노동자의 품은 다릅니다 비정규직 사원과 정규직 사원이 다르고, 학력과 학벌에 따라 받는 대우와 품이 다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능력과 실력에 따른 차별이므로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으십니까 ? 육시, 구시, 십일시에 일하러 온 이들을 모두 동일한 품을 쥐어주는 곳,없는 이들, 낙오된 이들, 동일한 선에서 출발할 수 없는 이들을 모두 차별없이 동일하게 대하여 주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는 우리가 사는 나라가 아닙니다 바로 신약성경 마태복음 20장에서 예수가 전해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3 하나님 신앙에 경도되었던 유대인들의 삶의 모습
하나님 야웨의 선택받은 민족으로 자부하며 살았던 유대인들은 어떠했습니까 ?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셨다고 전해지던 율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현현 경험으로 지키며 살아갔습니다 유대인들의 정체성은 율법을 지켜내는 이인가 아닌가에 따라 좌우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켜내며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 백성 유대인인 셈입니다
그들의 삶은 온통 율법을 얼마나 지켜냈는가? 로 판가름이 납니다 짐짓 규정에서 어긋나기라도 할라치면 부정하고 범죄한 이로 낙인이 찍혀버립니다 공동체의 낙인이 없더라도 개인적 신앙에서도 실패인 셈입니다 지나친 규정과 규율, 그리고 엄격한 적용이 강박증을 유발시키듯 이들의 신앙과 삶은 공격적인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율법을 지켜내는 이들에게 한없이 관대합니다 율법을 지켜내는 이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나도 그와 함께 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율법을 지켜내지 못하거나 실패한 사람, 혹은 애초에 율법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사랑은 단호하기만 합니다 정죄와 비난은 다반사입니다 분노하며 공동체적 린치를 가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귀신들렸다고 규정하며 부정한 이로 낙인을 찍어 공동체에서 격리시키기도 합니다
연약한 사람, 힘이 없는 사람, 탈락한 사람을 대하는 그들의 신앙적 강박증은 잔인하기만 합니다
4 공감 부재의 여유없는 삶
오늘 본문에서 마태는 그러한 신앙관에 경도되어 살아가던 유대인들을 비유로 평가하신 예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6 ~ 17절입니다 이 세대가 마치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같이 놀이를 하며 피리를 불어주면 그에 맞추어 춤을 추어주고, 초상집 놀이처럼, 슬피우는 시늉을 하며 가슴을 찢고 함께 어울려 주고 맞추어 주어야만 놀이가 성립합니다 그런데 딴지 부리듯 초상집 놀이에 잔치집에 있듯 기뻐하고, 잔치집 놀이에 통곡을 한다면 함께 함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가 보았을 때 이 세대가 딱 이런 모습이었다는 말입니다
공감하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 세상은 하나님 나라일 수 없습니다 그런 곳에는 갈등이 있고, 좌절과 슬픔이 머물게 됩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에 앞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에 그들은 요한이 지나친 금욕주의자라고 말하며 그를 멀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경건의 모양만 흉내낼 뿐 실상 그렇게 살지 못했는데, 요한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재물에 대한, 권력에 대한 욕망없이 경건을 추구하며 금욕적인 삶을 살아냈기에 요한에 비추면 자신들의 형편없는 모습이 드러날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본문 18절에는 요한더러 귀신들린 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귀신들렸다는 말은 정상적인 우리와 다른 이로서 격리하고 소외시키는 폭력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랬던 그들이 예수께서 찾아오셨을 때에는 또 다른 대응을 합니다 율법을 지켜내는 경건과 금욕이 아닌 진정한 복음의 자유를 추구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시며 사시는 모습을 보며 먹기를 탐하는 이라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모습은 마치 오늘 우리 세대의 일면과 같지 않습니까 ?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 아니니 않되고, 또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니 않된다고 벽을 세워가는 것 말입니다 공감부재의 삶은 하나님의 부재의 자리일 뿐입니다 왜냐면 주님은 죄인과 공감하시기 위해, 죄인의 친구가 되어주시기 위해 이 땅에 찾아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5 예수가 걸어간 걸음
예수의 짧은 삼십 삼년의 삶이 보여주는 걸음의 흔적은 너무나 선명합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닌, 세대가 하나님과 공감하지 못하고, 사람들과도 공감하지 못한 채 그런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때에 예수는 분명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들고 세상을 관통해 걸어가셨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울어도 통곡하지 않는 그들,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이, 그런 세상이 전부라고 말하며 갈등과 투쟁, 수고함과 무거운 짐을 타인에게만 짊어 지우려는 그들의 세계로 주님은 찾아가셨습니다 비난과 저주, 강요와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들앞에서도 주님은 결코 굴복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자유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가 그분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있는 이처럼 숨쉬고, 걷고, 일하고, 사람을 만나고, 사역함으로 그들의 세계와는 너무나 선명하게 다른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셨습니다
어둠 가운데 빛이 있으면 감추려해도 드러나는 것처럼 예수의 삶은 이 세대의 삶에서 너무나 눈에 띄는 걸음이었습니다
세상의 목소리, 이 세대의 외침은 타박하고 강요하고 비난하고 짐지우는 거친 소리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그 앞에서 주눅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신 예수의 목소리는 다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예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의 목소리는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세상과 달리 주님은 책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으십니다 한참을 정신없이 잘못된 걸음 걷다 결국은 뒤돌아 보았을 때, 세상이 모두 나를 버리고 포기해도 그저 아무말 없이 너를 믿는다며 눈을 마주하는 어머니의 시선, 언제고 집으로 돌아오라는 어머니의 목소리입니다 예수의 음성은 우리에게 쉴 곳이, 평안을 얻을 곳이 되어줍니다
6 우리가 귀 기울이고, 열광하고, 자유를 경험하는 예수가 드러낸 하나님 나라
예수께서 삶으로 드러내신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 쉼 없이 끊임없이 채우고 소진하며 살라고 말하는 세상과 반하여, 쉼을 가지라고, 숨 한번 쉬어보라고 괜찮다고 말하는 나라입니다
강요와 속박에서 일탈하지 마라고 억누르고 억압하는 세상과 달리, 그의 풍요속에서, 그의 은혜 가운데 자유를 누리라고 말하는 나라입니다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이들, 이미 다 이루었다고 말하는 이들, 모든 경쟁에서 승리하고 모든 이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될 만한 이가 아닌, 가장 수고하고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자를 제일 먼저 부르고 초대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다시 시작하는 회복이 있습니다 그 나라는 누구라도 함께 할 수 있으며, 무너진 삶의 언저리 그 끝에서 언제고 다시금 일어서게 하는 나라입니다
7 우리는 어떤 나라를 만들어 갈 것인가 ?
예수는 말만 번지르하게 하고 마는 그런 류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부르신 그분은 늘 그런 이웃들과 함께하는 삶의 자리를 찾아가셨습니다 그가 살아낸 그 나라가 바로 우리 가운데 임한 하나님 나라였던 것입니다 2천년전 예수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짐승 만리의 땅에 속하였지만 그 안에서도 굴복을 거부하며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셨고 그 삶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만일 마태가 오늘 우리의 세대를 보면 어떻게 평가할까요 ?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살아내신 그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낼 것인가 아니면 이 세대에 묻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아니 또 다른 누군가의 삶에 그런 짐을 지워주며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하심에 기대어 살아가는 이들의 삶 가운데에서 피어나는 나라입니다
굴복하지 않고 예수처럼 세대를 관통하며 사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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