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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7/ 16 성령강림절 6주성서의 거울 앞에 2017. 7. 16. 15:42
본문 - 로마서 8:1 ~ 11
https://youtu.be/9CLXhYqayxs = '클릭'하시면 설교 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르는 사람들'
1
사람됨의 됨됨이는 그가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보면 어느 정도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한 평생 출세를 목적으로 삼으며 달려갑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의 평판이나 명성을 향해서, 또 어떤 이들은 물질적 풍요를 향해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수 많은 사람들의 달음질 중에 어떤 이들은 목적을 이루기도 합니다 대단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목적을 이룬 이들을 부러워는 할 망정, 본받아야 할 사람이나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대단하다고 할 만한 목적이나 꿈도 없이 그저 하루 하루를 소소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도 있습니다 이루어야할 목표나 욕심이 없으니 그닥 분주하지도 않고 주어진 하루를 충실하게 보냅니다 또는 함께 하는 이웃들이나, 세상에 유익함을 위하여 자신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 수고에는 재산이나 시간, 노력 그리고 때로는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인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 살고 있지만 수 많은 사람들의 추구하는 것들은 다 다릅니다 그리고 그 다양성 만큼이나 사람들의 됨됨이도 천차 만별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2
바울은 그렇게 다양하기만 한 우리들의 삶과 세계를 두 가지로 구분짓고 있습니다
육과 영, 육신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으신가요? 우리는 모두 육신을 입고 있으며 육신을 벗고 있을 수 없으니 애당초 바울이 말한 육신에 속하였다고 하는 이 말은 우리의 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이 추구하는 세상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에 속하였다고 하는 말은 그와 대비되고 있는 ‘영에 속함’이라는 말을 풀어 낼때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바, ‘영에 속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신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 성령이 요구하시고 이끄심을 따르는 영에 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
3
신약성경, 특히 바울 서신에서는 ‘육신’, ‘육체에 속한 삶’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스도인의 삶과 비교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육체 (헬라어 ‘사릌’) 라고 하는 한계속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먹어야 하고, 마셔야 하고, 쉬어야만 합니다 육체의 본질적인 특징이 소멸되고 소비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시들어지면 그 가치를 잃게 되고, 젊음을 가득 담아내고 있는 청춘도 곧 시절이 지나고 나면 담아내고 있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처럼, 우리의 육체로 경험하는 모든 것들 ( 대부분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 은 본질적으로 소멸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것은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채워가려고 합니다 자신의 빈 자리가 발견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자꾸만 새로운 것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나’의 경계 밖에 있는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빼앗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합니다 육에 속한 삶에는 늘 불안과 불만과 갈등과 폭력, 미움과 시기와 같은 함정에 쉽게 빠져들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휩쓸려 사는 것을 ‘죄’라고 하며, 그런 세상을 육신에 속한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소멸되어지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의 덫입니다 치열하게 몸부림치며 버텨왔지만 기다리고 있는 끝은 ‘죽음’이라는 이름의 ‘소멸’일 뿐입니다
마치 자신의 탐욕과 출세만을 위해 다른 이들을 돌아보지 않고 기만하고 속이며 달려가던 인생의 끝이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갇혀서 마쳐지는 인생이나, 혹은 평생을 내 명성을 위해 미친듯이 돈을 벌어왔지만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해야하는 덧없는 삶 처럼 말입니다
4
육에 속하여 살아가는 삶과 반대에 있는 것이 바로 ‘영에 속한 삶’입니다 진리를 좇으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런 삶은 풍요로움이나 효율성에 천착하는 세상과 달리, 생명이나 가치, 의미를 추구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교통사고나 자연재해 같은 상황을 보면서도 보상금이나 보험금 이야기를 먼저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헐 벗고 굶주리는 이들의 생계보다는, 인간답게 대접받으며 살아가지 못하는 삶의 문제보다는 경제 발전과 효율성을 먼저 이야기하는 세상은 모두 육에 속해 있는 세상이 분명합니다 돈이나 명예가 조금만 있어도, 가지지 못한 사람, 없는 사람 함부로 깔보고 무시하는 천박한 이들의 세계는 분명 육에 속한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동경하는 이들이 속해 있는 세상도 역시 육에 속한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은 돈을 많이 벌어서 채우라고도, 명예를 누리라고도, 성공하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는지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얼마나 의미있고 가치있는 바르고 합당한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살아내었는가에 관심을 가질 뿐입니다 그래서 영에 속한 삶은 비록 화려하지 않고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더라도, 그런 가치와 놓여진 길을 내 인생의 길로 여기며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것입니다
5
바울은 예수를 만나 인생이 완전히 뒤 바뀐 사람이었습니다 육에 속한 세상에서 추구하는 성공의 문턱에 이른 사람이었지만 예수를 만나고 난 이후, 그의 삶은 하루 아침에 정반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쉽게 말해 그는 망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분과 명성과 출세가 보장된 모든 조건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육이 지배하는 세상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살기로 회심한 바울을 붙들고 있던 가장 큰 어려움은, 그의 삶 가운데 여전히 예수를 믿기 이전의 모습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이전의 추구하던 육이 지배하는 세상의 가치관과 그것을 바라는 성품과 모습, 두려움과 걱정, 그리고 그런 이 발견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며 살아가는 삶에 대한 회의와 두려움이 그 세계를 버리고 예수의 삶을 선택한 그를 붙들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탐욕에 지배를 받고, 여전히 불의하고, 기만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 한계를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 오죽하면 바울이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 것인가?’라고 했을까요 ?
6
과연 우리가 육이 지배하는 세상을 거부하면서도 완전한 해방과 자유를 경험할 수 있기는 한 것일까요 ? 다시 말해서 육이 속한 세상이 장담해주고, 약속하는 것들을 거부하면서도 두렵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으면서 올곧게 예수의 길을 따라 걸어갈 수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성공이나 풍요를 말하는 세상에서 바르고 옳게 살아감을 선택하며 배고픈 길을 갈 수 있겠냐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먹어야만 하고, 입고 살아야만 하는 육이 지배하는 세상속에서 말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어떻게 하면 물고기가 물 밖에서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처럼 불가능의 명제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끊임없는 소비와 자기 채움이 강요하는 ‘죄’의 삶으로 내몰려 살아야만 합니다 그곳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7
본문 9절은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있으시면 우리가 육신의 것을 추구하며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안에서 고뇌하고 좌절했습니다 사망의 곤고한 몸에서 나를 건져내어 달라고 외쳤던 바울의 외침이 여기에 있습니다
육의 세계안에 흔들리는 자신을 보니 자신안에 하나님의 영의 거하심이 의심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신앙의 현실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실수하고, 여전히 세상의 가치에 흔들리고 마는 자신을 보면 과연 내 안에 성령이 계시는지 의심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심은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일까요 ?
바울의 9절의 외침은 우리들 삶에서 이렇게 경험되어지고 외쳐집니다
‘우리가 이 세상이, 이 세대가 요구하는 풍요와 성공, 소비와 소멸이라는 가치를 거부하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땀흘리고 정직하게 살고, 죽은 자리, 소망 없는 이들, 상처가 가득한 삶, 아파하고 고통당하는 이들의 편에 서서 일어서고, 힘을 내고, 살아낼 수 있도록 도우며 살아간다면 우리 안에 생명의 영이신 성령, 살려내시는 성령이 함께 하고 계심이 분명하다’고 말입니다
8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성령이 함께 하셔야만 살 수 있는 삶은 얼마 만큼이냐?의 수량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표현은 우리가 무엇을, 얼마 만큼 하였느냐? 라는 물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느 편에 속하여 있느냐 ? 라고 하는 물음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성령에 속한 이처럼 살아가야 하는 걸음이 100이라고 한다면, 오늘 이 중에 1걸음만 걸었는지 99걸음을 걸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100걸음을 향한 길을 지향하면서 나아가고 있는 사람인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9
한걸음만 걸을 때 육에 속한 세상이 우리의 연약한 걸음을 손가락질 할 수 있고, 우리 안에서 불안감이나 실패감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무력감이 올라올 수도 있습니다 이때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을 좇을 수 있을까요 ? 그 길이 옳음을 어떻게 신뢰하며 걸을 수 있을까요 ?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따르는 우리 안에 이미 내주하시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는 이 선언을 믿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안에 함께 하시는 성령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상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를 둘러싼 삶에서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를 주의 깊게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육의 세계의 강요에 굴복하지 않아도, 실패라고 말하는, 죽음이라고 말하는 그 삶을 살리시는 성령의 역사를 추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육의 것을 추구하는 이에게는 육의 것이 보입니다 부동산 투기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돈이 되는 땅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사람을 존중하는 이에게는 사람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선한 양심과 정의를 좇는 이들에게는 아직도 이 세대 가운데 흐르고 있는 정의의 빛이 보입니다
악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겨 버리면 온통 세상을 지배하는 악의 권세에 압도당하고 맙니다
하지만 결연하게 세대를 거스르고 죽은 자를 살려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함께 하시는 성령을 추구하는 이에게는, 오늘 이 시간에도 생명을 살려내고 있는 성령이 보이기 시작하는 법입니다
주님이 어디 계신가요 ?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어디에 있습니까 ?
찾는 이, 구하는 이,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주어지고, 찾아지며, 열려지는 세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놓으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즉을 몸도 살리시리라’ (11절)
이 말씀처럼, 육에 속한 세계가 요구하고 강요하는 것들을 거부하고 예수를 따르며 살아가는 우리안에 함께 하시는 성령이 반드시 이 육신의 삶, 육체를 붙들고 억압하는 삶으로부터 우리를 살려내실 것입니다 아멘, 주의 평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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