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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10/ 29 종교개혁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17. 10. 29. 12:51

    본문 - 누가복음 9:57 ~ 62


    * 설교 영상 파일에 에러가 생겨서 '영상'을 올리지 못하고, 설교문으로 대신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라'



    종교개혁 500주년에 즈음하여

    좋으신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루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올해는 각종 집회, 학술, 예배 그리고 교단별, 교회별로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들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아마도 오백주년이라는 상징성보다는, 그로부터 오백년이나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개혁의 대상으로 서 있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통렬한 아픔이 자꾸만 종교개혁이라는 단어에 천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을, 5백주년을 말하면서도 마음 한켠이 불편한 것은 개혁을 말하는 노력과 시도가 결국은 개혁되어야 할 대상을 넘어서지 못하는 슬픈 한계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종교개혁은 루터 이전 인문주의가 싹틔어오면서 성경과 어긋나 타락으로 치닿는 교회현실에 대한 반감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병균이 들어오면 몸안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그것이 결국에는 고름으로 터져나가는 것처럼, 기존 교회 (구교)의 부패함이 쌓여만 가던 때에 ‘루터’에 의해 둑이 무너지듯 시대적 흐름으로 이어진 것이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의 장입니다

    루터는 진정한 구원에 대한 깊은 고뇌와 갈망에 사로잡혔던 사제였습니다 신앙좋은 이들이 넘쳐날 거라 예상했던 로마를 방문했던 그는 깊은 좌절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계는 도적과 강도, 타락한 사제들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제는 루터에게 ‘가급적 빨리 자주 예배를 드리시오 그래야 돈을 많이 벌게 됩니다’ 라고 까지 말했다고 합니다  가장 결정적인 동기는 ‘면죄부’입니다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10세는 성 베드로 성당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는데, 막대한 비용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생각한 것이 바로 ‘면죄부’였습니다 말 그대로 ‘죄를 사면’해 주는 증서를 돈을 주고 사는 것입니다 루터는 사람의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라는 성경의 말씀을 왜곡하는 교회의 타락함을 견딜 수 없었고, 교회현실에 대한 95개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앞에 걸어두었고 당시 팽배해있던 개혁을 향한 성도들의 열망이 유럽전역으로 퍼져나가기에 이른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

    루터의 저항과 개혁의 근거는 ‘오직’ Sola 에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이 교황과 교회가 정하는 수많은 방법과 시도가 아닌, 오직 성경에 의하여, 오직 믿음을, 오직 은혜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 첫번째 우리가 할 수 있는 무엇으로도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자각, 두번째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고백을 말합니다 

    오직 성경으로는, 내 방식대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고, 오직 믿음으로는 구원을 줄 수 있는 이를 찾아 손을 내미는 것을, 오직 은혜로는 건짐과 자유의 희열이 내가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 아닌, 자비로운 손길이 나를 잡아주었기 때문임을 뜻합니다 결국 루터가 외친 종교개혁의 ‘Sola’는 전적인 하나님의 자비로운 도우심만이 나의 구원을 이룸을 말합니다 


    그러니 종교개혁의 출발점은,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절망적 자각으로부터 비롯하여 ‘구원의 경험’으로 마쳐집니다 아무리 실력이 좋은 의사가 있어도, 아무리 먹고 살만한 행복한 길이 있어도, 아무리 시원한 물이 있어도, 제 자신이 병들었음을 모르고, 굶주리고 있음을 모르고, 목마름 가운데 있음을 모른다면 구원은 경험할 수 없습니다 

    저는 병원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감기가 걸려도 왠만하면 버텨보거나 약을 먹는 편입니다 운 좋게 나을 때도 있지만 고생 고생하다가 결국은 병원을 찾는 일이 있습니다 내 힘으로 나을 수 없음을 직면하고 나서야 고집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 경우 괜한 고집으로 고생하고 후회한 적이 대부분입니다 


    절망으로부터돌아섬으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

    나는 구원 즉, 병들고, 목마르고, 굶주림으로부터 건짐을 받아야만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진 존재임을 자각할 뿐 아니라, 그 절망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무능을 인정하여서,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내 기대, 가치관, 인생을 거는 것입니다 예수를 좇으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길임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지금까지 추구하고, 찾으며, 애써왔던 방식으로는 이룰 수 없는 구원임을 깨닫고 받아들이게 된다면 반드시 지금까지의 길을 멈추고, 구원을 향해 길을 바꿀수 밖에는 없습니다 틀린 길임을 알면서 계속 길을 고집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절망의 벽앞에서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니 만일 지금까지의 삶에서 절망했으나 예수에게서 구원의 소망을 발견하였다면 반드시 이전과는 달라지는 변화가 있어야만 합니다 혹여 예수 이전과 예수 이후에 내 살아가는 방식과 삶의 내용이 바뀌어지지 않았다면 애당초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지 못했거나, 예수에게서 소망과 구원을 발견하지 못했거나의 둘중에 하나임이 분명합니다 맛있는 음식이 있는데 손을 내밀지 않는다는 것은 배고프지 않다는 반증이 아니겠습니까 ?


    예수를 믿기로 선택하는 것, 기도하는 것, 말씀을 읽는 것, 예배를 드리는 것 모두 내 방식의 절망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통한 구원을 소망하는 이들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쉬운 길입니다 믿음, 기도, 말씀, 전도, 예배 모두 강요로는 결코 그 의미와 그 내용과 그 열매를 경험하고 맛볼 수 없습니다 배고파서, 아파서, 소망은 없고, 절망의 무게에 짓눌려, 타는 목마름을 해소할 길이 없는 이들에게만 유효하고 실재하는 길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예수 믿음의 구원이, 하나님의 통치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은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의 무력과 불가능을 믿지 않고, 다른 믿을 것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 차를 고쳐도… 최종적 판단이 나면 포기하게 됩니다 …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저런 삶을 사는 것, 죽은 것처럼 살던 사람이 산 사람으로 사는 것처럼 회개는 질적인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조금 변화하고, 나머지는 남겨두는 식의 선택은 불가능합니다 


    제자로의 부름

    예수는 언제나 무의미, 아픔, 상실감, 허무와 고통같은 삶의 절망앞에 서 있는 이들을 불러내고 있습니다 오늘 짧은 본문속에 예수는 세 부류의 사람들과 갈등을 벌이고 있습니다


    첫번째 예수를 따라 어디든 가겠다고 말하는 사람,

    둘째 나를 따르라 하시니 아버지의 장사를 먼저 지내게 해달라는 사람

    셋째 가족과 작별하고 떠나겠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반응은 너무 과격하고 단호하기만 합니다 나를 따르라고만 말씀하십니다 너무 퍽퍽하고, 무례하게만 보입니다 이런 예수는 불편합니다 가족애가 전혀 없는, 목적만 향해 가는 냉철한 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에 대한 불편함은 이런식으로는 예수를 따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왜 우리는 자신이 없을까요 ? 왜 우리에게는 예수의 요청은 어렵기만 할까요 ? 

    예수와 갈등하고 있는 세 부류의 사람들의 요청은 누가 들어도 지극히 정상적이고, 예수의 거절은 지나쳐보입니다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따라가겠다는 요청은 자식으로서 마땅합니다 더욱이 유대 율법 규례집인 ‘메길라’에도 아버지를 장사지내는 것은 모든 성전예배, 절기, 할례의식보다 앞서는 마땅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왜 ? 죽은 자들로 작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뜻모를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


    가족에게 작별을 고하고 따르겠다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의 다짐은 허투루 하는 빈말이 아닙니다 다만 오늘날과 달리 이천년전 스승을 따라 나선다는 것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길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들과의 정리는 지극히 인간적인 도리입니다


    우리는 첫번째 부류의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왜 그리 단호하게 대하였는지 예수의 본래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평행본문인 마태복음 8장 19절을 보면 첫번째 부류의 사람을 ‘어떤 서기관’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서기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들은 예수와 그의 무리와 달리 일반 백성들에게 꽤 명망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을 제자로 받아들이게 되면 얻게 될 유익함은 분명해 보입니다 

    게다가 스스로 어디로 가시던지 끝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니 금상첨화인 셈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시덥지 않다는 투로 그의 의지를 꺾어 버리고 맙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를 둘 곳이 없도다…’ 


    한마디로 나를 따라와봐야 머리 둘 집 한칸 없는 빈털털이 신세를 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상황이 좀 좋지 못해도 나아질 것이라고 에둘러 말할 수도 있으련만 예수의 표현은 직선적입니다 예수를 좇겠다고 한 그이는 예수와 함께 할 때 경험하게 될 영광, 소위 꽃길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세속적 근거에 얽매이거나 구속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는 영광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고난을 적당히 지나쳐 갈 수 있다거나 편법으로 걸러낼 수 있다고 속이지 않습니다 


    당당한 예수의 말속에는 ‘선택’에 대한 ‘우선순위’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이 담겨있습니다 무엇을 더 중히 여기느냐?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속에 언급된 천국은 모두 우선순위의 문제로 그려집니다 재산을 다 팔아서 밭을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 


    제자됨 그리고 종교개혁?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전까지 예수 없이 살던 삶의 무의미성과 허무를 버리고, 예수와 함께 길을 나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생각하고,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예수와 함께 살아내는 것입니다 두가지 선택만이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살 것인가 ? 예수에 관해 듣기는 하지만 예수와 상관없이 살 것인가 ?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인가 선택의 문제입니다

    이것도 저것도는 없습니다 이것을 선택하면 저것은 이보다 가치가 없을 뿐입니다


    부친을 장사지내고 오겠다는 이에게 예수는 요구합니다 ‘죽은 자들에게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여기에 사용된 죽은 자 ‘투스 네크로스’라는 말은 죽어있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누가 예수에게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상태에 있는 자들입니까 ?

    무엇이 가치있는 것인지를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일, 하나님 나라의 일에는 관심 조차 없고, 오직 이 땅의 것, 이 땅의 일, 이 땅의 관심사에만 천착하는 이들입니다 생명이 아닌 돈에만 관심 가지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생명을 살려내는 일이 하나님께 속하고, 죽이는 일이 땅에 속한 것이라고 구별합니다 


    하지만 우선순위의 갈등을 안고는 예수를 따를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선택을 하여서 예배만 드리라거나, 선교를 떠나라거나 하는 종교적 행위를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러 나오면서도 여전히 돈을 따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주일을 지켜내지 못했음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머무는 자리를 지켜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종교적 거룩성을 말하면서도 그 안에 탐심과 저주와 미움이 가득한 이도 있으며, 심드렁해보이지만 한 없이 따듯함으로 사람을 섬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와 예수의 길을 선택하면 예수 이외의 길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따르면서도 하나님의 채우심을 경험할 수는 있지만, 예수의 길과 채움의 길을 동시에 걸어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돈이 채워질 수는 있지만 예수와 돈이 제시하는 길을 동시에 걸어갈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하나님 나라 말하라

    우리는 오늘 예배의 자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예수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며, 돈이 제시하고, 세상이 강요하고 유혹하는 방식은 우리의 구원일 수 없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또한 세상이 이야기하는 것이 구원일 수 있다고 여기는 순간 우리는 이 예배의 자리를 지킬 수 없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늘 이런 우선순위의 문제에 대한 선택 앞에 있습니다

    커피 한잔과 헌금, 내가 사고 싶은 것들과 십일조, 내 문화 생활과 예배, 내 명예와 낮은 자를 섬김, 내 배를 채움과 가난한 자를 돌봄,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과 조건없는 사랑, 돈과 생명의 가늠자 위에 우리는 늘 서게 됩니다 

    예수는 왜 그리 단호하게 말씀하셨을까요 ?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좋은 곳이고, 멋진 곳이며, 다른 수 많은 나라 처럼 있을 수도 있는 나라였지만, 예수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만이 실재였기 때문입니다 예수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만이 이 세상의 모든 불의와 거짓과 그릇된 가치와 탐욕, 그리고 짓눌린 고통과 상처, 눈물과 아픔, 배고픔과 절망을 무기 삼는 죄가 지배하는 나라들을 전복시키고 이미 이곳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만이 있었습니다 이미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속하였고, 갈등하던 그들은 여전히 전복되어야 할 세상속에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는 ‘이 다음에’라는 우선순위의 미룸을 거부합니다 예수는 ‘오늘’ 하나님의 나라를 선택하고, ‘오늘’ 그 나라를 말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사망선고를 받은 사람이 치료제를 발견하고도 이 다음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나를 좇으라

    예수는 ‘나를 좇으라’는 말로 말씀을 맺습니다 왜, 무슨 일을, 어떤 고난이 올 것인지 장황한 설명은 없고, 나와 함께 가자며 손만 내밀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상의 해결보다 더 근본적인 것, 배고픈 한끼를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 치는 것이 아닌, 영원히 배고프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근본적인 해결인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라고 말입니다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의 반박문을 써 붙였고, 그 한 사건이 종교개혁의 불을 당겨버렸습니다 적당히 이것도 저것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아닙니다 남들도 다 그러니까도 아닙니다 예수와 함께 이 나라에 속할 것인가 ? 아니면 그렇게 원망하고, 그렇게 고통스러워하고, 그렇게 절망하면서도 여전히 예수의 손을 거절하고 돌이키지 않을 것인가의 선택만 남습니다


    진정한 종교개혁은 내미는 예수의 손을 붙잡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종교개혁은 나 한 사람이 예수 이전과 다른 예수 이후의 나로 돌아서는 것에서 비롯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의 손을 붙잡는 순간,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삶 가운데 임한 나라입니다

    주의 성령이 우리 영혼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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