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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8 사순절 두번째 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3. 6. 14:25
성서일과
- 1독서 창세기 12:1 ~ 4a
- 2독서 로마서 4:15, 13 ~ 17
- 3독서 요한복음 3:1 ~ 17
- 응 송 시편 121
설교 음원
https://drive.google.com/open?id=1S4PE9Sogl6AonH32UD-EayvExkMNiahi = '클릭' 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할 수 있습니다
설교 영상
https://youtu.be/bMxZkUcUMd0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떠난 사람이, 바라본 것은'
1
또 한주가 지났습니다. 환자들과, 일선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의료진들 뿐만 아니라, 실의에 빠진 시민들, 아울러 위축된 경기에 아프고 상한 이들이 없기를, 우리 모두 주어진 이 환경을 잘 이겨나갈 수 있기만을 빕니다. 코로나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코로나 이후의 삶에 대한 염려도 깊어져갑니다.
경기가 어려울 때마다 기업들은 대단히 예민해 집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문을 닫고 마는 이들도 있지만, 반대로 경쟁력을 갖추는 기회로 삼는 곳도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전문가의 의견을 반영하고, 시스템을 새롭게 하고, 라인이나, 조직을 개편합니다. 이전까지는 돈이 많이 들고, 그렇다고 잘 될지 아닐지 몰라 머뭇거렸지만 결단해야만 합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주저할 수가 없습니다. 상황이 선택을 강요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일단 어떤 결정을 하게 되었어도, 선택한 방식을 끝까지 따라가느냐 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입니다. 효과가 곧장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않기 때문입니다. 애궃은 비용만 지불한 것은 아닌지, 혹시 이전보다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다가 결국은 멈춰버리거나,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일도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들 신앙의 살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전의 하나님 없이 살던 삶에서 이제는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믿으며 살아간다는 것인데, 자꾸만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그렇지는 않아도 그런 욕망에 흔들리곤 하니 말입니다. 바라기는 오늘의 이 아픔과 절망의 시간을 지나고 난 이후 우리들안에서는, 다시금 어제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허무가 반복되어지지 않기를, 다시 돌아가는 곳이 ‘쓰러짐’이 아닌 ‘일어섬’의 자리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2
오늘 성서일과에서 만나게 되는 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울 만큼 대단한 인물입니다. ‘조상’이라는 말은 혈연적이나 유전학적인 조상을 말하는 것이 아닌, 믿음의 길을 떠나는 모든 이들의 ‘본’이 되는 사람이다라는 뜻입니다. 말씀이 그를 우리 모두의 본이 될 정도였다고 하니 한편으로는 부럽고, 또 한편으로는 어떻게 그런 믿음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대체 아브라함은 어떻게 살았길래, 그리고 어떤 면에서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울 수 있게 된 것일까요 ?
오늘 본문을 찬찬히 읽다 보면 유독 ‘떠나다’ 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떠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갔고 (4),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났으며 (5), 세겜 땅에 들어가서도 제단을 쌓은 뒤에 다시금 벧엘 동쪽으로(8), 그곳에서 다시금 남방으로 옮겨갑니다 (9). 물론 이후로도 그의 삶은 늘 ‘떠남’의 그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떠난다’는 말속에서는 묘한 ‘기대감’이 스며있습니다. 떠남의 뒤에 지금과는 다른,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설레임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떠난다’는 말은, 기대감 저편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두려움’을 지나쳐야만 한다는 부담을 가르쳐줍니다. 떠남 이후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는 알 수 없으니 ‘떠남’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쉽게 ‘두려움’에 발목을 붙잡히고 맙니다.
기분좋게 시작한 여행인데 목적지에 도착한 이후에 별 것 아닌 것 때문에 함께 하는 이들과 다투고, 어려움을 당하는 기억하기 싫은 여행이 되기도 합니다. 반면에 아주 어려운 시작이었기에 포기하고 낙담했는데 오히려 좋은 추억으로 남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떠남’에 대한 이미지는 대체로 부정적입니다. ‘지금’이라는 자리가 가져다 주는 안정감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떠난 이후가 더 나아질 것을 믿을 수가 없기에, 쉽게 발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그러니 곁에서 길을 떠나는 사람을 발견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3
아브라함은 본래부터 팔레스타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메소보타미아 갈데아 ‘우르’지역에 터잡고 살던 사람입니다. 어느날 그의 아버지 데라가 가족들을 데리고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먼 길을 돌아 하란까지 가게 되었고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 먼길을 떠나게 되었는지, 그 연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떠났다’는 히브리서 (11:8)의 짧은 내용만이 아브라함이 처했던 상황을 전해줄 뿐입니다. 이후에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그의 나이가 75세 ! 새로운 떠남보다는 살아온 시간을 갈무리 하며 흔들림 없는 안정감을 행복으로 여길 그런 시기에 그는 길을 나섰던 것입니다. 고향 우르를 떠난 것은 가장인 아버지 데라의 결정을 따를 수 밖에는 없었던 거라면, 아브라함이 왜 굳이 아버지 데라가 죽은 이후에 먼길 끝에 터를 잡게 되었던 하란을 떠나 일면부지의 가나안으로 향하게 되었을까요 ? 아버지 데라의 유언이 있었던 걸까요 ?
그가 하란을 떠나기 바로 직전의 상황을 정리해서 전해주고 있는 11장 후반부의 짤막한 내용이 아브라함이 길을 떠나게 된 이유에 대한 우리의 질문이 계속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직접 관련된 것은 30절입니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아브라함은 남부럽지 않을 만큼 부유했고, 안정감도 있던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그런 인생이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채워지지 않은‘허무’와 ‘공허’가 있었습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대 시대에는 성공한 인생, 복된 인생을 가늠하는 두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땅의 복과 자손의 복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문을 일구고, 후손이 풍성해지는 것은 스러지는 죽음을 거슬러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최고의 복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가장 중요한 이 생명의 복이 없었던 사람이었던 겁니다. 다른 것은 다 자신의 의지와 경험과 능력으로 극복이 되지만, 이것 만큼은 제 힘으로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하늘의 허락이 있어야만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의 뜻으로만 채워질 것을 바라보는 사람이었습니다.
4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고, 그와의 사이에서 체결해 주었던 하나님의 언약이 마침내 길을 떠나도록 그를 떠밀었습니다. 조건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약속 ! 이 주어졌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은 채 길을 떠나면 됩니다. 성경은 11장에서 12장으로 이어지는 아브라함의 길 떠나는 모습을 매우 단순하게 진술하고 있지만, 아마도 그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시기였을 것입니다. 지금 길을 떠난다는 것은 자칫 다른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모험입니다. 약속 말고는 무언가 확신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보통은 이럴 때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발목이 붙들리고 맙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그 두려움을 떨치고 길을 나섭니다. 잃게 될지, 얻게 될지, 그 언약이 성취될지, 헛된 망상이었는지, 그길이 복이 성취될지, 모든 것을 잃게 될른지, 대체 이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또 찾아오셨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두려움을 뒤로 한채 낯설은 미지의 땅으로 떠날 때 보다, 더 낯설고 두려워할 요구를 아브라함에게 하셨습니다.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그것입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 22:12
그런데 이번에도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따라 길을 나섰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를 찾아오신 하나님이 참으로 놀라웁고 경이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도 아브라함을 알게 되었다고 말씀해주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알고,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아신다는 것을 보면, ‘믿음’이란 것이 소원성취를 위한 우리의 일방적인 신념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고, 우리는 말씀을 통해 그 하나님을 압니다.
5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겠다’ 는 하나님의 약속은 사실 믿기 어렵기만 합니다. 허무맹랑하고 현실성도 전혀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낯설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만 가득합니다. 갈대아 우르, 하란 같은 땅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렇습니다. 그러니 현실적이라는 말은, 결국 우르나 하란에서 살아가는 방식의 총체입니다. 우르나 하란은 믿음으로 사는 땅이 아닙니다.
율법적으로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속편합니다. 자기의로 표현되는 업적주의, 실적주의를 따라 살면, 내일이 어찌될지는 몰라도 오늘 만큼은 든든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하란을 떠나는 자유도, 하나님의 은혜도 맛볼 수 없으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떠나는 이의 발목을 주저앉게 만드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떠날 수 있고, 믿을 수 없다 말하는 하란을 등질 수 있께 하는 힘이 ‘믿음’입니다. 두렵기 때문에 못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두려움을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아브라함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말씀을 따라만 가면 두려움은 언제나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낯설음일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길을 떠나고, 떠나고, 또 떠납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에도 여전히 그는 하나님 말씀을 따라 계속해서 떠나는 사람입니다. 낯설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두렵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말씀이 이끌어가시는 낯설음이 새롭기 때문입니다.
6
수영을 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멋지게 물살을 가르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먼저 해야할 것은 팔힘을 기르는 것도 아니고, 물장구를 치는 법을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공포심’을 극복하는 것이 첫번째 입니다. 물에서 하는 것이니, ’물에 빠진다’는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는 수영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
하나님이 열어가시는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르나 하란을 떠나야 한다는, 이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심을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 ‘물에 빠지고 말 것’이라는 공포심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 로마서 4:17
바울이 소개하는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입니다. 이런 분이라면 어떻습니까 ? 물에 빠져도 능히 건져내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면 어떻습니까 ?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면 사라지고 말 것들임에도 돈이나, 경험, 이룬 업적, 삶의 터전 이런 능력에 인생과 삶을 맡기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마음을 다해 믿어야 할 이가 누구입니까 ?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 로마서 4:20 ~ 22
오히려 믿음이 약해질 수 밖에 없었던 그 시퍼런 물속에서도 아브라함의 믿음은 더 견고해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힘은 대체 어디로부터 왔을까요 ?
7
유대인의 지도자였던 바리새파 사람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이유는 ‘표징’ 뿐이라 여기던 유대인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남’만이 하나님나라를 보는 유일한 길임을 말씀해 주셨는데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를 못하고 맙니다. 그를 위해 풀어주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요 3:5
땅이 요구하는 삶에서 거부하지도 벗어나지도 못한 채 살아가던 우리가, 표징이 없으면 단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던 우리가, 낯설음의 땅을 향해 떠나는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런데 이 거듭남은 물과 성령으로만 됩니다.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는 법, 낯설은 땅에서도 믿음이 더욱 견고해 질 수 있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밖에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오직 ‘물과 성령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은 위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의 방법과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믿을 수 있는 것을 아무리 찾아도 하란은 믿음 없음의 자리일 뿐입니다. 표징이 없는데도 한 걸음 나아갔으니 믿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말씀을 따라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그러나 너무나 낯설은 ‘떠남’의 여정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전까지 경험해왔던 모든 것이 변해 버렸습니다. 사실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이렇습니다. 상황이 이제 우리로 하여금 낯설음을 향한 길을 떠나도록 내몰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이전의 예배, 이전의 공동체, 이전의 믿음, 이전의 교회는 없습니다. 어찌 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제 힘으로는 내일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니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기댈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기댄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만 믿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으니 말씀이 있는 곳, 말씀이 지향하고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가야만 합니다.
표징이 있기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기에 모든 것이 표징이 되어주는 삶을 살아내게 하시기위해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표징을 구하며 허덕거리며 사는 삶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믿음의 주님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또 한걸음 나아갑니다. 꽃이 피었기에 봄이 온 것이 아니라, 봄이 왔기에 꽃이 피는 것입니다. 떠나는 길은 아름답습니다. 그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바를 알지 못하고 갔지만, 우리는 길이 되어주신 주님을 보며 걷습니다.
지금 떠난 이의 뒷모습을 보며 불안과 두려움에 주저앉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 떠난 이를 보지 마시고, 떠난 이가 바라보던 그것에 주목하십시오.
보이지는 않지만, 어디서 오는지 알 수는 없지만, 잎새를 흔드는 바람은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주님은 반드시 성령으로 우리를 거듭남의 삶, 새롭게 떠나는 삶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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