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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1 사순절 첫째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2. 27. 13:29
성서일과
- 창세기 2:15 ~ 17 / 3:1 ~ 7
- 시편 32
- 로마서 5:12 ~ 19
- 마태복음 4:1 ~ 11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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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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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시험하다"
- 사순절의 시작
지난 26일 ‘재의 수요일’로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신 걸음을 그의 한 몸된 교회가 오늘에 조명하는 절기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들춰내고 고발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보여줍니다. 부활은 그처럼 무거운 죄의 절망으로부터, 하나님의 전적인 ‘살림’을 경험하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순절 기간 우리는 먼저 ‘죄’의 엄중함과 그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함을 뼈져리게 직면해야만 합니다. 자신의 내면과 실체를 가슴 아프게 직면할 수록, 그 끝에 만나게 되는 ‘부활’의 감격은 새롭게 다가올 것입니다. 사순절의 기간, ‘죄’라고 하는 가리워져 있고, 또한 감추고 싶은 심연으로부터 빛 가운데로 불러내시는 그리스도의 손을 붙잡을 수 있기를 빕니다. - 광야로 가시는 까닭은 ?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후 예수님이 곧장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시지 않으시고, 제일 먼저 들르신 곳이 있습니다. 마태는 성령께서 예수님을 이끌고 가셨던 그곳이 ‘광야’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성령은 왜 ? 예수님을 그곳으로 인도하셨을까요 ?
사실, ‘광야’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광야는 특별한 어떤 장소가 아닌 ‘메타포’일 뿐입니다. 빛도 생명도 없는 죽음의 땅으로 대변되는 곳이 ‘광야’입니다. 광야는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평온한 땅 같았지만, 한순간에 광야를 경험하게 되기도 합니다. 광야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땅입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생명에 꼭 필요한 목을 축일 물이 없는 공허한 땅이며, 함께 있는 것 같지만 고독한 땅입니다. 가난에 찌들고, 오랜 병에 시달린 사람들의 마음이 거칠고 날카로워지기 쉬운 것처럼, 소망없는 황폐한 광야에서는 사람의 영혼은 쉽게 상하고 깨어지기 마련입니다. 광야, 그곳은 마귀가 지배하는 땅입니다.
광야는 누구도 제 힘으로는 살 수가 없는 생명이 없는 땅입니다. 제 힘으로 경작하고 수확하고 열매맺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아시스를 발견하지 못하면, 만나를 얻지 못하면 죽는 땅, 그러니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 살 수 있음을 경험할 수 밖에는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땅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생명의 주가 생명이 깨어진 광야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걸어가신 40일간은 잃어버린 그 땅은 더 이상 광야가 아닙니다. 제게는 광야를 찾으시는 모습이 시험을 받으시기 위함이 아닌, 생명이 메말라버린 땅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방문으로 보입니다. 상하고 깨어진 불행했던 한 여인을 타는 듯한 삶의 애환에서 건져내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해주셨던 예수께서 그곳에 계시니 이제 광야에도 샘이 넘쳐날 것입니다. 예수께서 광야를 벗어나오신 이후, ‘광야’라고 하는 메타포는 ‘아무도 살 수 없는 땅’에서, 누구든지 ’하나님 말씀으로만 사는 땅’ 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지요. 오늘 이 아침, 광야를 살고 오신, 광야를 헤매이는 영혼의 시린 아픔을 경험하고 계시는 분들에게, 회복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발견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빕니다. - 왕 노릇하는 세상의 힘 : 유혹
예수님의 걸음을 가로막았던 존재가 있었습니다. 마태는 그를 ‘마귀’라고 정의합니다. 거칠고 투박한 생명없는 땅,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삼키우는 그 땅의 왕노릇하는 이가 바로 마귀입니다. 마귀라는 말의 뜻은 헬라어 ‘디아블로스’, 즉 ‘고소자, 훼방하는 자, 비방하는 자’ 입니다. 마태에 의하면 예수님은 그곳에서 마귀에게 시험, 즉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시험을 받으셨다는 말은, 인간은 누구나 시험앞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이고 실존입니다.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했어도, 믿음이 제 아무리 좋아도 시험과 유혹은 찾아옵니다. 오죽하면 주님께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가르치셨을까요 ?
마귀의 세 가지 유혹은 ‘돌로 떡을 만들어 보아라’ (3),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6), ‘엎드려 경배하라’ (9)입니다. 마귀는 예수를 유혹하면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라는 문구를 전제 조건으로 붙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로서의 증거를 보여보라는 요구입니다. 이정도는 해야 메시야로 인정할 수 있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험입니다.
시험은 가볍게 여길 것들이 아닙니다. 누구도 이 시험앞에 당당할 수가 없습니다. 마귀가 제시한 이 세가지 유혹은 모두 인간의 본성에 기대고 있는 것들입니다. 떡을 만들어 먹는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입니다. 먹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먹고 사는 문제는 큰 시험이 됩니다. 배부를 때는 모르지만, 배고픔이 경험되는 순간, 이보다 더 큰 유혹은 없습니다. 실제로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불의함앞에서 눈을 감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불법에 가담하기도 하는 것이 우리이니 말입니다.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라’는 마귀의 유혹은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는 시편 91:11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 이런 현상이 없으면 하나님께 버림받고 부정당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자신의 발앞에 엎드리고 경배하라는 요구는 어떨까요 ? 이 또한 모든 사람을 넘어트릴 만큼 매혹적인 유혹입니다. 마귀의 말은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닙니다. 마귀가 왕노릇하는 세상은 돈과 권력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땅입니다. 마귀에게는 그럴만한 권세가 있습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가 왕노릇하는 세상이니 그를 따르기만 하면, 그의 길을 인정하기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오늘날 돈만 많이 벌 수 있고, 명예와 권력을 얻을 수만 있다면 불법과 불의라도 서슴지 않고, 양심이라도 팔겠다는 천박함에 넘어지는 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부러운 마음이 일어나는 것까지 숨길 수는 없습니다. - 우리도 예수를 시험하다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으며 넘어트리려고 하는 마귀의 시험과 유혹은 공격적입니다. 마귀는 그 이름의 뜻대로 예수님을 비방하고 조롱합니다. 마귀는 물리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내면이 믿음없음, 불신으로 무너지게 만드는 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정체성과 권위를 스스로 의심하고 무너지게 하려는 유혹입니다. 버려진 것처럼 이런 광야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자신의 처지를 자꾸만 의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유혹앞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증거를 보여달라’는 마귀의 이 속삭임이 가장 크게 들리는 곳은 다름 아닌, 우리 마음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겠노라 결단한 우리임에도, 시시 때때로 마귀의 권세와 유혹에 마음이 흔들리곤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더니 그것 밖에는 않되느냐 !’ 는 마귀의 사특한 속삭임이 우리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그런데 마귀가 예수를 유혹하고 시험하던 이 요구를 오늘 우리도 주님을 향해 쏟아내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구하는 기도는 대부분 메시야이신 증거로 마귀가 주님께 요구하던 것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 눈에도 그런 것들이 성공이고, 그것이 행복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왕노릇하는 세상을 통해서 매일 듣고 보아왔던 것들이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이미 우리가 그의 통치방식에 익숙해져버린 결과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요구하는 이런 것들을 인생의 성공과 행복으로 추구하는 세상에서는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마귀가 요구하는 것들은 모두 누군가와 비교되어질 때만 만족을 확인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들입니다. 먹는 것이든, 누리는 것이든, 소유하는 것이든 그것을 채움으로 만족한다면, 어디까지 ? 어느 수준까지 채워야할까요 ? 우리는 그 기준을 내 밖에 있는 누군가와 비교함으로 기준을 삼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어떤 사람보다 못하니 불행합니다. 비교한 누구보다는 더 많이 있다고 해도 또 다른 누군가를 둘러보는 순간 더 갖지 못한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론적으로는 마지막 정점에 있는 한 사람만 행복할 수 있지만, 이도 또한 언제 비교의 대상으로 떨어지게 될지 모르는 불안하기만 합니다. 모두가 불행한 세상입니다.
마귀가 메시아의 증거로 요구하는 세상의 행복은 모두 자기불안과 자기연민을 강화시키는 것들입니다. 어떻게 자신을 채울 것인지에만 몰두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먹고 사는 그 문제가 태산처럼 커보입니다. 그리고 염려와 불안에서 사로잡히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믿어지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내몰린 그곳이 광야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 숨어있는 시험의 정체
마귀가 요구하는 증거를 찾아내고, 이루고, 성취하는 방식으로는 마귀의 유혹을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이 시험을 이기는 길은 마귀의 시험 자체를 무너트려는 것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아셨지요. 마귀의 세가지 유혹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사람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4),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 (7), ‘하나님께 경배하고 섬겨라’ (10) 세가지 입니다. 핵심은 ‘하나님’ 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만을 믿으셨고, 그 믿음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시고, 말씀이 하나님이십니다. 천지를 보시기에 좋아하실 만큼 온전함으로 있게 하시는 능력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먹고 사는 그 문제에 빠져버리는 순간부터는 말씀이 우리를 살리는 능력이 있음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마귀가 던진 시험의 목적입니다.
마귀의 시험은 예리합니다. 시편말씀으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주인이시며, 나를 구원하시는 분이시지, 애당초 우리의 시험의 대상이 되실 수 없습니다. 또한 온 땅과 온 하늘이 모두 하나님의 것인데, 마귀는 천하만국의 왕노릇을 하면서 예수님을 유혹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말씀을 믿는 것인데, 유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비롯했던 최초의 유혹을 생각해보십시오. 창세기 3장 1, 5절입니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_창세기 3:1, 5
인류가 처음 경험하였던 시험의 핵심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먹지 마라’하셨던 하나님 말씀을 깨트린 것이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의 본질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는데, 이제는 말씀없이 살게 되고 만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은 그런 것들을 추구하고 누리며 사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되묻고 싶을 만큼,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기에 충분할 만큼 매력적이고 탐스럽습니다. 하지만 일단 이런 것들의 공통점은, 일단 추구하고 쫓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시야가 좁아진다는 겁니다.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 시야가 좁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점점 속도가 붙고나면 어느 순간 시야에서 하나님을 놓치고, 마음에 담기었던 그의 말씀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가슴이 냉랭해지기 시작하고, 말씀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세상이 요구하는 것에 질질 끌려다니는 인생, 노예로 있던 애굽에서 출애굽했던 걸음인데, 광야에서 마귀의 노예로 추락하고 맙니다.
이제는 말씀이 깨어져버렸으니 말씀이 능력이 되어 살 수 없습니다. 제 힘으로 이루고, 책임지고, 감당하며 살아야만 합니다. 수고하고 땀흘려야하고, 내일을 알 수 없으니 늘 불안과 염려에 드리워진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귀의 시험에 휘둘린 결과입니다. - 왕노릇하고 있는 땅에서 벗어나는 길
마귀는 여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의 왕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 권세와 위세는 여전하고 또한 누구도 거스를 수 없을 만큼 위세도 대단합니다. 돈의 위력, 명예나 권력앞에서 여전히 종처럼 굽신거리며 살고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마귀가 왕노릇하는 것처럼, 우리도 염려나 근심,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노예 노릇을 하고 맙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시던 예수님의 말씀안에 담겨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만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의 세 번의 답변은 모두 ‘하나님만’이었습니다. 너무 뻔한 답변처럼 들리십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 외에 마귀의 체제를 무너트릴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 말씀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믿음’은 ‘선택’과도 같습니다. 내가 ‘이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많은 것들 중에 ‘이것’에만 마음을 담는 것, 다른 모든 것은 ‘포기’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만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 하나님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은 포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에덴의 이야기속에서 하나님처럼 신적 능력을 갖게 되어 나 자신을 구원해내고 싶은 것이 우리의 죄된 본성임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결국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기대, 가능성이 깨어지는 자기부정을 의미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는 이 고백만이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내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발견하고 붙들고 있는 한, 우리 내면에 하나님은 수 많은 구원들 중에 하나 일뿐,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은 자라날 수 없습니다.
때아닌 바이러스의 공격에 암울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마비된 것처럼, 아득한 매일입니다. 자고나면 뉴스를 보는 것이 두려울 만큼 답답한 매일입니다. 이렇게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고, 삶의 수준이 이렇게 좋아졌다고 우리가 세운 문명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저 알아서 바이러스가 사그러들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처절한 것인지의 ‘죄’의 실상, 광야의 죽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도와줄 이도, 대신해줄 무엇도 없습니다. 나는 무능하고, 무익합니다. 나 자신에게도, 다른 누군가에게도 …
이 절망의 때에 우리는 시편 기자가 만났던 하나님을 부를 수 밖에 없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_시편 32:1~2
하나님 없이 달려오던 길에서 돌이켜, 오직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의 자리를 찾는 이를 하나님은 그 죄와 허물을 덮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왔던 걸음이 멈추어지는 곳에서만 ‘하나님만을 찾는 믿음’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나의 무능을 고백하는 그 순간이 하나님의 전능을 만나는 순간이며, 그때 비로서 마귀의 종노릇하는 세상에서 벗어나, 선하신 하나님의 통치와 인도하심안에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_시편 32:7
어떻게 하여야 뱀처럼 매혹적으로, 때로는 거칠고 압도적인 권력으로 다가오는 유혹으로부터 돌이켜, 나의 무능을 실감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기대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
나는 배고프고, 버려져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마귀가 불어넣는 생각과 질문에서 벗어나는 길은, 생각, 꿈, 계획, 직면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치시키며 살아가는 것이 그것입니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 의미를 가지며 사는 것 뿐입니다.
기쁠 때에는 그에게 감사하고, 슬플 때에도 그의 자비를 구합니다. 불안할 때 그의 도우심을 구하고, 외로울 때 그의 따스한 품에 안깁니다. 세상앞에 작아지는 나를 보지 않고, 세상보다 크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모든 어두움을 밝혀내시는 거룩한 생명의 빛이십니다.
마귀가 요구하는 것에서 시선을 돌리고, 그가 요구하는 소리에 귀를 닫으셔야 합니다. 삶의 걸음을 광야의 허탄한 곳에 두지 않고 예수님께로 향하게 되면, 어느새 주님의 빛이 우리의 영혼과 삶을 덮어주실 것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점점더 그의 빛에 물들게 될 것입니다. 허탄했던 마음이 주님의 생명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고, 불안하고, 염려하고, 방황하며 질서 없이 혼돈으로 치닿던 삶이 주님의 인도하심안에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으로 충만해지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런 능력이십니다. 그가 우리의 주님이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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