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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15 사순절 셋째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0. 3. 13. 14:39

    성서일과

    • 1독서 : 출애굽기 17:1~7
    •   : 시편 95
    • 2독서 : 로마서 5:1~11
    • 3독서 : 요한복음 4:5~42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open?id=1hK0kafq_OUYbu7JFfbM8HoCBjov-ezDx = '클릭' 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할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AzseKIp6AS4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우물가에서 무슨 일이 있던걸까 ?"

     

    1

    예배가 귀해진? 요즘입니다. ‘예배’란 무엇인가의 물음을 가짐으로 예배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정체성을 더 건강하게 세울 수 있는 기회가 되니, 이런 위기의 때도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면에서 오늘 성서일과 3독서 본문인 요한복음 4장 5 ~ 42까지의 말씀은 대단히 시의적절한 말씀으로 읽혀지는 것은, 아마도 예배에 관한 나눔이 이루어질 때마다 반드시 언급되어지는 본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문속에서 예수님께서 수가성의 한 여인과 나누셨던 대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요한복음 4:21

     

    •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 요한복음 4:23

     

    오늘 설교는 이 말씀을 우리의 형편? 그러니까 '교회에 모여서 예배하여야 하는가? 혹은 그렇지 않아도 괜찮은가?'라는 주제에 곧장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예배 드림이 여기서도, 저기서도 아니라니, 굳이 예배당에서의 예배를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는 근거로 읽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 오늘의 이 말씀은 과연 우리의 상황, 주어진 이때를 위한 것일까요? 그것이 아니라면 본문속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

     

    사실 본문에 대한 설교나 해석중에도 더 깊이 논의해 보아야 할 문제들은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속에서 예수님과 여인이 마주치게 된 때를 가리키는 ‘여섯 시’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여인의 안스러운 삶의 모습을 극적으로 반영하기 위해서인지, 대체로는 여인이 우물가를 찾았던 그 때를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정오’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본문 어디에도 ‘정오’라는 표현은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다, 이런 식의 해석은 유대의 시간과 로마의 시간표기법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 오류일 가능성이 큽니다. 6시간을 더하는 유대 시간으로하면 ‘여섯 시’는 12시 즉 정오가 되겠지만, 사실 요한복음은 오히려 유대시간이 아닌 로마 시간표기에 더 익숙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이 갈보리에서 붙잡히신 이후 다음날 오전이었으니, 요 19:14 에 ‘제 육시’로 기록되어 있는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던 때는 로마 시간표기에 따른 오전 ‘여섯 시’로 읽어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시간 표기를 사용하고 있는 요한복음 본문의 만남의 시간은 말 그대로 ‘여섯 시’일 뿐이며, 여기에다가 주님이 길 가시다 피곤해 머문 때였다는 본문을 감안해 보면 아마도 모든 일과를 마친 오후 6시쯤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여하튼 예수님의 멈춤이 이 여인을 위함이었는지 우연한 만남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인은 물을 길러 나왔다가 그곳에 머물고 계셨던 예수님과 마주치게 됩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여기서부터입니다.

     

     

    2

    마주친 여인과 예수님은 짧은 대화를 주고 받게 되는데, 둘 사이에 상당히 어색한 거리감이 있음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대화가 마쳐진 이후 본문의 끝자락에서 이 둘 사이의 거리는 상당히 가까워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어긋난 것처럼 보이는 대화가 이 둘의 거리감을 도드라지게 해줍니다. 멀찌감치부터 여인을 바라보시던 주님은 마치 그녀가 곁에 이른 순간을 기다리셨던 것처럼 먼저 말을 건네셨습니다. ‘물을 좀 달라’

    하지만 사마리아인인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답변은 퉁명스럽기만 합니다.

    ‘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오히려 당신이 내게 생수를 달라 요구했을 텐데... ’ 안타까워 했던 주님의 답변이 도리어 여인의 마음을 더 상하게 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생수를 줄 수 있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사마리아 사람인 자신을 향한 유대인의 우쭐거림 정도로 들었던 것 같습니다. 물을 담을 그릇도 없어 자신에게 물을 달라던 사람이 할 말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겠지요. ‘당신이 야곱보다 큽니까 ?’ 그녀의 말투가 꽤 빈정거리는 듯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그녀는 미쳐 몰랐습니다. 물을 길어 올릴 그릇은 있으나 목말라 있는 제 자신의 삶을 채울 수 없는 그녀와 달리, 예수님은 물을 길을 그릇 따위는 필요가 없으신, 만민의 생명을 채우시는 영생하는 샘 자체이신데 말입니다.

     

     

    3

    하지만 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쉽게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흔들립니다. 남편 없이 혼자서 살아와야만 했던 허무와 공허로 인해 그녀는 늘 목말라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지금 6번째 남자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사별을 한 것인지, 결혼을 못하고 계속해서 헤어지게 된 것인지 왜 다섯명이나 거쳐오게 되었는지 연유는 알 수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 함께 하는 이도 실은 남편이 아닙니다.

    여인 혼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물며 남녀의 차별이 극심하던 고대시대에 혼자 살아가야 하는 여인이 경험해야했을 차별은 얼마나 더 심했을까요 ? 서러움도 많았을 테지요. 원인이 무엇이었든 남편이 없어 생기는 그 빈자리, 남편이 없기에 채울 수 없던 그 서러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계속해서 남편을 대신할 사람을 찾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섯번째 남자와 함께 하고 있는 지금도 그녀의 삶에 드리워져 있는 허무와 고독, 외로움은 여전하기만 합니다. 그녀가 찾았던 것은 갈증을 해갈할 답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자신의 허무의 처지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는 예수의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주겠다'는 말씀이 허투루 들리지가 않는 겁니다. 예수님을 대하던 그녀의 투박했던 말투가 이제는 간절함으로 바뀌었습니다.

     

    •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 요 4:20

     

    하나님께 나아가면 좀 나아질까 싶은 마음에 예배도 열심히 드렸지만,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효력이 없던 것은 여로보암에 의해 지어졌던 사마리아의 벧엘과 단의 산당이 정통이 아니었던 탓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신앙의 정통으로 여겨지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면 이 간절함이 응답될까요 ?' 라는 그녀의 물음은 유대인인 예수를 향한 부러움은 또 아니었을까요 ? 여인의 넋두리가 그저 안쓰럽기만 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21절부터 24절의 예배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여인의 이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산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니다 !’ 이 말씀은 예배는 장소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녀의 볼멘 투정속에서, 자유와 해방을 경험해야하는 예배 조차도 무언가를 해내야만 하는 조급한 구원의 수단으로 삼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가련한 여인은 예수를 만나기 이전까지 늘 가혹하기만 한 운명이나, 사마리아인이라는 출신, 혹은 율법에 합당하지 못했던 삶이나 예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패망감에 사로잡혀 살아온 것입니다. 돌아보니 지금까지 우리의 예배안에서도 이 가련한 여인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이는 것만 같으니 더 마음이 아련합니다.

     

    주님은 짐짓 무거운 종교적 언어나 짐으로 여인의 신앙을 폄훼하거나 꾸짓지 않으십니다. 속절없는 여인의 걸음을 멈추게 하시려는 주님의 아픈 마음은 이 말씀에 닿아 있습니다.

     

    •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만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이다 !

     

     

    4

    ‘영과 진리’로 라는 말이 낯설지 않습니다. 앞선 3장에서 비슷한 표현을 이미 들었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에게 전해주셨던 3장 5절 말씀입니다.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요 3:5

     

    ‘영과 진리’는 ‘영’으로, ‘진리’로 구별이 될 수 있지만, 실은 둘다 같은 의미로 보아도 무방해 보입니다. ‘영’으로라고 하면 보통은 무언가 ‘신비적인 것’이나 비이성적인 현상등을 생각하지만, 루터는 ‘영’이라는 뜻의 헬라어 ‘프뉴마’를 독일어 ‘가이스트’ (Geist) 즉 ‘정신’이라는 말로 번역했다고 합니다. 투박하게 말씀드리자면, 성경이 전하는 ‘영적’이라는 말은 ‘온전한 정신상태’를 말하는 셈입니다. ‘알레테이아’라고 하는 ‘진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는 감추어져있던 것이 드러나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경험되고 폭로되어지는 하나님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 이라는 말도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 성령안에서 발견되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은혜라고 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24절의 '영과 진리로의 예배' 에 대한 말씀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라고 하셨던 22절의 말씀의 정리인 셈입니다.

    그러니 어떤 것이 되었든, 영과 진리로 드려야만 하는 예배란 ? 어떤 목적에 사로잡히거나, 신비에 대한 기대감에 비틀거리지 않으며, 정신 똑바로 차리고 위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며 주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심을 아는 것이 예배의 핵심이며, 그런 예배에서야 비로서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삶을 구원해 내시는 예수 생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5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기에, 그녀의 예배는 비어있는 자기 삶의 문제를 채우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을 뿐입니다. 생명이신 예수님 앞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율법적 사고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방식이야 말로그녀의 삶을 허무로 몰아세워왔던 것이었음을 모른 채 말입니다. 이런 식의 예배에서는 생명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바라보는 곳이 다르면, 살아가는 모습이나 결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속도보다는 방향이 중요하다’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다른 목적지를 바라보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전혀 다른 곳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똑같은 시대를, 똑같은 상황을 사셨으나, 예수님은 그런 시대와 상황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오롯이 하나님안에만 계셨습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우리의 길이 되어주실 수 있으신 겁니다.

    우리는 모두 이 여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갈증이 없는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갈증을 안고 살아갑니다. 단지 어떤 것에, 무엇 때문에 갈증을 느끼고 있는지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허무와 공허함의 갈증을 대하는 삶의 태도는 또한 모두 다릅니다. 어느날부터인가 직면하게 되었던 허무로 비어버린 삶을 채우려고, 수가성의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까지 몸부림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채우려고 하면 할 수록 그녀의 공허는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이미 다섯 남자를 거쳤으나 여전히 타는 갈증안에 있던 것이 그 증거입니다. 이것이 공허를 채우려는 세상에서 경험하는 삶입니다.

     

     

    6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곧 그니라’ | 26

     

    우리는 오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길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니 이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물동이를 던져두고 마을로 뛰쳐 들어갔던 여인과 함께 기쁨의 환호를 지르며 뛰쳐나가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 길을 찾았으니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 혹시 아직 우물가에서 주억거리고 계시고 있는 것은 아니신지요 ? 그분의 말씀처럼 이 갈함을 채울 것을 주실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은 생긴 것 같지만, 여전히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지, 무엇을 해야 그것을 얻을 수 있게 되는지 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신지요 ?

     

    29절을 보면 물동이를 내 던진 여인이 마을에 들어가서 소리칩니다

    내게 말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분명합니다 와서 보세요

     

    그후에 예수를 믿게 된 성안의 사람들이 여인을 향해 말합니다.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줄 앎이라

     

    무엇이 빈 물동이를 내 던지고 달려가게 만들었을까요 ?

    불퉁 거리던 여인은 예수안에서 자신의 모든 허무를 채울 수 있는 생수가 흘러 넘침을 보았고, 그렇게 예수를 사건으로 경험하는 순간 비로서 그녀는 짓눌렸던 삶에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능력이고 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제 우리가 어떻게?’ 라는 질문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구원의 능력이 있음을 믿는 것 말고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만 믿는 것입니다. 그 생수의 능력이 우리를 구원해냅니다. 이것이야 말로 예수안에 담긴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 능력의 실체를 바울은 로마서 5:3b ~ 4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환란이 연단이 되고, 소망을 이루도록 인내할 수 있는 능력이 예수 생명의 경험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 함께 예배 가운데 있어도, 우리가 다 같이 말씀을 읽으면서도, 예수 생명을 경험하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 생명의 경험이란 우리 힘이나 우리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외침을 들어보십시오.

     

    •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께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라’ | 로마서 5:5

     

    이것이 핵심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만 예수 구원의 사건을, 예수안에 담긴 생명의 물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는 말씀이 바로 이말입니다. ‘영과 진리’로, ‘물과 성령’으로 그리고 로마서에 담긴 바울이 전한 말씀까지,
    우리로 하여금 깊은 갈함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삶이 가져다주는 갈증을 도리어 생명을 향한 갈급함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이 바로 ‘성령’ 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7

    아직 한가지 문제가 더 남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안에서 예수 구원을 경험하고 누리지만, 어떤 사람은 또 그렇지 못하고 소외되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목마름으로부터 벗어나는 궁극적인 방법은 목마르지 않는 곳을 찾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당장에 마실 물만 찾다가 다시금 목말라 합니다. 그러다보면 결국은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없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하고, 다투는 자리로까지 무너지곤 합니다. (출 17:2)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입니다. 그 사실을 믿음으로 맛본 사람은 그 생명을 경험하되, 점점 더 깊이 경험하고 싶다는 갈망에 사로잡힐 수 밖에는 없습니다. 날마다, 시간을 더해, 마음과 뜻이 오직 예수안에 있는 영생에만 담기게 됩니다.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하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예수안에 있는 한, 끊임없이 이 갈망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배고픔이나 질병이 찾아왔을 때, 오직 살아야만 한다는 생각만 남게 되는 그 순간이 되면, 그토록 많은 날을 한숨 쉬고, 절망하고, 낙망하게 하던 것들이 다 사라지는 법입니다.

     

    예수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믿으며 살아갈 때, 성령께서 물이 없어 갈한 땅에서 헤매일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우리 걸음을 하나님만이 이루시는 놀라운 생명의 길로 이끌어 가실 것을 믿습니다.

     

    예배의 자리를 다시금 기억합니다. 예배의 자리가 어디인가의 물음은 핵심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함께 복음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이신 그리스도만 믿으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경험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외에 다른 구원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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