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05 고난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4. 1. 23:59
성서일과
이사야 50:4 ~ 9
시편 31:9 ~ 16
빌립보서 2:5 ~ 11
마태복음 27:11 ~ 54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open?id=1qcrIkq0fGDfTRjA4MkINzUHWhapM95v7 = '클릭' 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할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1bT01BN753Q = '클릭' 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wWHTooFJG8Y = '클릭' 하시면 예배 전체 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사람
1. 고난주간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신음과 절망을 헤집고 맞은 4월의 첫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부활절을 한 주 앞둔 오늘은 특별히 종려주일, 또는 고난주일이라고도 부릅니다. 명칭이나 의미의 소소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의 목적지인 ‘십자가 / 죽음’을 향한 마지막 걸음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동일합니다. 해마다 전세계의 교회와 성도들은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이번 마지막 한 주를 금욕과 경건한 삶을 살아가면서 예수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예수의 고난에 깊이 침잠하면 할 수록, 예수안에서 발견하게 될 부활의 기쁨은 더욱 선명해 지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평생 결코 잊을 수 없는 고난 주간의 기억이 있습니다. 2014년 수련목회자 과정을 모두 마치고 목사안수를 앞둔 그해 마지막 주어진 사역이 고난주간 새벽기도회 인도였습니다. 기도회 기간중에 발생했던 세월호 사건은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고 만 절망과 아픔, 그리고 상처를 고스란히 ‘고난 주간’에 대한 기억속에 남겨놓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고난 주간만 되면 숨 쉬는 것이 답답해집니다. 과연 이런 세상에서 나는 어떤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까 ? 자식을 잃고 통곡하는 이땅의 어미들에게 목사가 된 나는 어떤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 이 답을 찾아 몸부림치며 안수를 받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파했던 그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새롭기만 합니다. 공기가 순간에 사라져버린 듯한 답답한 절망속에서 ‘우리는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만 선명해졌을 뿐입니다. 그리고 어느새 6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 오늘 이 고난주일의 아침, 우리는 다시금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엄중한 자각속에 깨어 있습니다.
사순절, 특히나 오늘부터 맞이하게 되는 고난주간은 단순히 ‘예수의 고난’을 추억함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 자신을 돌아봄으로 빗나가고 있던 걸음들을 추스리고 제자리로 옮기워, 예수께서 열어 젖히신 부활과 해방의 문을 향하여 한걸음씩 나아갈 때만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고 보니 죽음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무기력하기만 했던 불행한 우리 삶의 실체를 직면했던 그해를 지나고, 어느새부터 우리의 사순절은 다시금 평범한 일상속에 낯설은 절기가 되고 있었습니다. 평상시 죄와 죽음, 무능함과 절박함, 구원에 대한 물음을 팽겨치고 먹고 사는 일에 몰두하며 살다가, 우리는 예수가 걸어갔던 ‘고난’의 사건만 기억할 뿐 그 의미에는 한번도 닿아보지 못한 채 어색하고 불편한 사순절을 그렇게 조급하게 해치워버렸고, ‘부활절’을 통과하며 하루 빨리 삶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걸음을 재촉해 왔습니다. 그런데 … 그만 이 걸음이 다시 멈추어졌습니다.
2. 억울한 시련과 고난의 현실
고난은 인간의 삶에서 땔래야 땔 수 없는 한쪽 면 처럼 우리들 곁에 있고, 우리의 삶은 힘에 겹기만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고난’은 아프고 피하고 싶고 반갑지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림자처럼 삶을 따라다니는 고난에 대한 우리의 방어 기제는 애써 현실을 외면하면서 살기 위한 의미없는 웃음이나 쾌락을 좇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외면하면 할 수록 고난은 우리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인간은 죄인이므로 고난을 받는다는 교리에 ‘그래 나만, 어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 그런거야’라고 일반화시키고 스스로를 자위하고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둘러보면 언제든 쉽게 마주치게 되는 ‘악인의 형통함’이 애써 외면하고 있던 내 고난의 문제와 그로인한 아픔을 다시금 수면위로 들춰내고 맙니다. 맘이 상합니다. 그렇다고 다시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고난은 덮어놓고 외면함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알기에, 아프고 쓰리지만 우리는 다시금 고난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해야만 합니다.
왜 ? 고난은 우리를 떠나지 않고 찾아오는 것일까요 ? 아니 그 물음은 둘째치고라도, 대체 왜 ? 악인이 도리어 형통하고, 의인은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요 ? 선지자 이사야 역시 이 사실에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 이사야 50:6고난받는 종의 노래로 불리우는 본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이가 수치와 모욕과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수난의 이야기가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들리십니까 ?
의인이 왜 고난을 받아야하는가 ? 그리고 악인이 어떻게 형통할 수 있는가 ? 의 물음은, 결국 과연 선하신 하나님은 존재하시는가 ? 라는 질문으로 이어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머리를 붙들고 씨름을 해보아도 풀리지 않고 어렵기만 합니다. 막상 머리로 이해될만한 답을 찾아내도 마음이 흡족해지는 것은 또 아닙니다. 불평등해 보이시는 하나님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에 조금은, 이 물음을 풀어나갈 실마리를 찾은 기분입니다.
이전까지 누가 더 힘이 세고 누가 약한지, 누가 더 잘 살고 누가 못사는지가 명확히 구분되었던 세상이었는데, 지금보니 모두가 절망하고, 모두가 힘겨워하는 세상입니다. 어쩌다가 이런 고통의 일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본래 이런 모습이었음을 엿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복’과 ‘화’를 나누고 정의하는 기준은 무엇이었고, 또 어떤 경우에 고난, 치욕, 억울함같은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 걸까요 ? 대부분 건강한 것이나 부유함, 다른 사람보다 유능해지거나 혹은 그렇지는 않아도 ‘남들만 못하지 않게 되는 것’을 불행해지지 않고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우리 삶을 구원해 낼 수 없는 것들이라는 사실은 그 어느때 보다 더 명확해졌습니다. 누군가와의 비교나 우월함이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모두에게 닥쳐오는 절망과 죽음에서 지켜줄 수 없음을 우리 모두의 눈으로 보고 있으니 말입니다. 억만금을 싸짊어져도 피해갈 수 없고. 누구라도 도망칠 수 없으니 ‘평등함’입니다.
반대로 이런 것들이 없어서 우리 삶이 불행해지거나 파괴되는 것이 아님도 명백해집니다. 사실 돈이 없으면 조금 불편해지고, 건강하지 않으면 조금 덜 자유한 것 뿐입니다. 다른 사람처럼이 아니라는 말은, 오히려 ‘나 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여기에 붙들려 있습니다. 이 사회가 구성하고 만들어 놓은 시스템안에 우리는 모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하는 대로 생각하고, 살아가게 하는 대로 살아왔을 뿐입니다. 누구도 이것을 거부하고 자유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성경이 세상 권세라는 것이 바로 이 것을 말합니다.
누군가와 비교하면서 더 가진것을 행복으로 여기거나, 덜 가진것을 불행으로 여기는 방식으로는 누구도 자유할 수 없습니다.
3. 고난을 거스르는 사람들
이사야는 하나님에 의해 선지자로 세움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만 합니다. 문제는 아무도 이사야의 예언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외에 다른 것은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며 사는 것은 한가로운 소리로만 들립니다. 이사야의 말이 옳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 살지는 않습니다. 모두 세상에 편승하며 살아갑니다.
게다가 세상에 순응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믿으며 살라’는 그의 메시지는 세상의 주인들에게는 여간 귀에 거슬리는 소리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들의 권력에 도전하고, 그 실체를 폭로하고 있으니 가만히 둘리가 없습니다. 핍박하고 박해합니다. 수염이 뽑혀지고, 뺨을 맞고,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한다(6)말이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따르며 살다가 이런 일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 마음에 밀려드는 것은 후회, 좌절, 고독감입니다. ‘왜 ? 나만 이렇게 살아야하는가 ?’, ‘이렇게 산다고 뭐가 달라질 것인가 ?’ 누구나 다 이런 갈등 사이에 섭니다. 제 아무리 믿음이 좋고 신앙이 깊어도, 우리는 늘 은혜와 믿음의 경계에서 흔들거리는 존재일 뿐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거칠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모욕을 당하고 있는 선지자가 도리어 힘을 내어 큰 소리를 외칩니다. 오히려 당당하기만 합니다.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 이사야 50:8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어떻게 믿음의 길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
고난의 길을 향하시던 예수님의 걸음을 주목해 봅시다. 잘 못 되어도 무언가 단단히 잘 못된 현실입니다. 예수님은 죽임을 당할 만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짓밟힌 민중에게, 상처입고 절망한 백성들에게, 병들고 버려진 이웃들에게, 정죄당하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거룩한 사명을 감당한 것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서슬퍼런 권력과 불법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는 어둠의 권세들에 의해 죽임에 내몰려 있습니다. 온 맘으로 끌어안았던 백성들은 바라바를 선택하고 자신을 죽음에게 던졌습니다. 그러나 억울함을 벗거나 실낯같이 살아날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었던 빌라도 앞에서도 예수는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주어진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틀렸으니 체념하거나, 포기한 것일까요 ? 예수는 어떻게 세상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그가 외쳤던 하나님 나라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처럼, 그 권세에 기대어 늠름하게 걸어갈 수 있었을까요 ?
4. ’죽음’으로만 벗어나는 길
십자가에 달리신 그날 제 구시에 이르러 예수는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내뱉은 한마디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부르짖음 뿐입니다. 너무나 무력하고, 너무나 참혹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결국 ‘죽음외에 다른 길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이 말에 넘어지지 않으시기를 빕니다. ‘죽음’외에는 이 땅의 권세를 거스르고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십자가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은 무기력한 패배가 아닌,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진정한 해방의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몸은 내 별까지 돌아가기에는 너무 무거워’라고 말하던 지구 별에 떨어졌던 어린 왕자가 독사가 물어주었을 때에 다시 그의 행성에 돌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_ 셍떽쥐베리 <어린왕자>
사순절의 마지막 고난 주일, 우리는 다시금 ‘죽음’앞에 직면하고 섭니다. 십자가가 말하고 있는 ‘죽음’은 무엇일까요 ? ‘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실상은 ‘너희도 죽어야만 한다’는 말씀이 아니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주님은 어떤 죽음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걸까요 ?
세상이 가르쳐주는 방식으로는 결코 죽음이 몰고오는 이 세상의 고난과 고통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돈을 많이 벌어서 주의 일을 하겠다거나, 이 다음에 성공해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생각은 애당초 그릇된 것입니다. 무엇을 많이 소유하고, 업적을 이루고, 유명해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고난과 환란, 시련과 아픔이 찾아오면 그것을 지워내기 위해 무언가를 이루고 해내야 한다는 것이야 말로 세상의 방식입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은 그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세상 고난이나 핍박을 벗어나거나 해결하는 법을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피묻은 십자가는 우리에게 고난을 대면하고, 죽음을 직면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는 법을 가르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상징으로 바라보는 이 종교가 늘상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 바로 ‘죽는 법’입니다. 탐욕을 추구하며 악을 도모하고 사는 것이나, 불의에 고개숙이고, 타협하며 살다가 썩어지는 그런 죽음이 아닌, 세상의 권세에 승리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히는 ‘길’로서의 죽음을 예수에게서 배우고,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신앙이 말하는 ‘죽음’은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 성공과 출세를 향해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눈, 부러워하고, 자신을 부끄러워하던 눈이 감아지는 겁니다. 인정받으려는 욕구에서 벗어나, 비교와 경쟁을 부추기는 소리에 귀가 닫히는 것, 세상의 기준과 가치관이 부정되고 그리스도께서 나아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이야 말로 바른 ‘죽음’, 다시 사는 ‘죽음’ 입니다.
5.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
십자가가 가르키고 있는 ‘죽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할까요 ? 온갖 아름답고 화려한 것으로 우리 눈을 사로잡는 세상의 유혹을 뿌리치고, 핍박과 환란과 고통과 두려움에도 여전히 이 길위에 버티고 설 수 있도록 ‘자기부인’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그 힘말입니다.
‘이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 마 27:54
예수께서 숨을 거두신 그 순간 백부장과 함께 예수를 지키던 이들이 내뱉은 외침입니다. 그러나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숨지시기 이전에 깨달았더라면 이런 허무한 죽음은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때늦은 후회와 세상의 인정에 속이 상합니다. 하지만 마태가 십자가 죽음 뒤에 이들의 고백을 기록한 목적은 이 억울함을 표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마태는 예수를 잡아 죽인 이들의 입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 다시 말해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안에 계셨던 분이셨음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이적과 기사, 놀랍고 신비로운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그리스도이시며 구원으로 해석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빌 2:8 ~ 11
십자가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예수의 길이었고, 그런 예수를 모든 이들의 주와 그리스가 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이 만나고 믿었던 예수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발견되는 그리스도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말을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세상을 둘러보면 그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겨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파도를 보고, 바람의 소리를 듣는 순간 한 없는 물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말았던 베드로의 모습은 오늘 우리의 연약한 실존이기도 합니다.
‘내가 무엇을’, ‘세상이 어떻게?’라는 질문은 답이 될 수 없습니다.오히려 이 질문에 답을 해 보십시오.
‘누가 우리를 구원하십니까 ?’,
‘누가 당신의 구원이십니까 ?’,
‘누가 우리의 대적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해 낼 수 있습니까 ?’예수와 한 몸을 이룰 때, 예수와 함께 하는 것, 그와 함께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만이 하나님과의 관계안에 거하는 길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해주시는 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를 희망으로 삼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 고난의 기간, 부디 고난의 현실에서 살려는 몸부림을 멈추고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함으로, 세상에 대하여 죽으십시오. 그것만이 죽음에서 벗어나는 ‘사는 길’이며, 그때 우리안에서 당당한 외침이 터져나오도록 성령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헤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 이사야 50:8 ~ 9
'성서의 거울 앞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4/15 삼일기도회 (0) 2020.04.15 20/04/12 부활주일 (0) 2020.04.09 20/04/01 삼일기도회 (0) 2020.04.01 20/03/29 사순절 다섯번째 주일 (0) 2020.03.28 20/03/25 삼일기도회 (0) 2020.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