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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12 부활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0. 4. 9. 13:03

    성서일과

    • 1독서 : 사도행전 10:34~43 혹은 예레미야 31:1~6
    •   : 시편 118:1~2, 14~24
    • 2독서 : 골로새서 3:1~4 혹은 사도행전 10:34~43
    • 3독서 : 요한복음 20:1~18 혹은 마태복음 28:1~10

     

    설교 음원

    https://drive.google.com/open?id=1JGZ77NLSHU63xwa2FCoH5l-nBrETed-7 = '클릭' 하시면 설교 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 주일 예배후, 업로드 됩니다 )

     

    설교 영상

    https://youtu.be/lqqWfpQJUlc = '클릭' 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 * 주일 예배후, 업로드 됩니다 )

     

    우리를 부르는 소리

    | 낯설은 오늘 아침

    극심하게 치솟던 확진자수가 그래도 안정을 찾아가는 같고, 완치된 이들의 소식이 희망이 되는 요즘입니다. 주중에, 선별진료소에 검사를 받으러 갔다가 양성으로 확인되고 곧장 격리 시설로 옮기워졌던 환자가 퇴원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이후, ‘이렇게 내가 죽을 수도 있다 막연한 두려움속에서 하루 하루 버텨오던 한달여의 시간드디어 철통같이 굳게 닫혀있던 병원문을 열고 나오던 그녀가 갑자기 왈칵 눈물을 쏟고 넋두리를 합니다. ‘꽃들도 이리 피어있고, 그 사이에 세상이 참으로 많이 바뀌었네요철에 맞지 않는 두터운 외투를 입고 있던 그녀가 흐느끼며 내뱉은 말이었습니다. 길가에 개나리나 목련이 올해만 유달리 이쁘게 것도 아닐테고, 지나는 사람들이 유독 멋져보인 것도 아닐텐데, 그녀는 세상에 처음 나온 사람 마냥 한참을 병원입구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것이지요라는 말만 되풀이 합니다.

    부활의 아침, 믿음을 가지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예배함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마음안에도 또한 이와같은 감탄과 경이로움이 가득하기를 기대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놀라운 경험과 감격을 어떻게 표현할 있을까요 ? 그대로 죽음을 넘어본 없는 이들로서는 결코 경험할 없을 기쁨을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안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목사인 저로서는 이런 질문을 많이 받게 됩니다.하나님을 본적이 있느냐 ?’ 거나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말이 되느냐?, ‘부활하신 예수를 적이나 있느냐 ?’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사실이 감당할 없을 만큼 우리에게는 그저 놀라운 일이기에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 여러분은 주님의 부활을 믿고 계십니까 ? 대체 여러분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보셨습니까 ?

     

    | 낯설은 만남

    예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주님의 죽으심이라는 현실앞에선 넘어지고 말았었지요. 십자가 앞에서 그는 배신하고 도망하는 부끄러운 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는 다시금 일어났고, 마침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님께서 약속하셨던 것처럼 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스승을 버리고 도망쳤던 비겁한 겁쟁이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순교로 생을 마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그를 이끌었던 것은 다름 아닌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죽었다고 여겼던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부활하심을 보게 이후부터는, 그를 두려움에 도망치게 만들었던 세상의 권력도 이상 무섭지 않게 되었고, 휘황찬란한 그들의 권세도 부럽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변화된 베드로의 삶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가 틀림없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음을 믿을 있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그를, 오늘 누가가 전하고 있는 사도행전 본문속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욥바에서 머물던 그는 지금 가이사랴에 있습니다. 이방인 백부장인 고넬료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그곳에서 그는 신약 성경의 지평을 바꾸어 놓는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그런가 보다 하는 마음으로 쉽게 읽었지만, 베드로와 이방인 고넬료가 만났다는 사실은 대단히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있는 베드로는 유대인이었고, 지독한 선민사상에 휩쌓여 있던 이들에게 이방인은 함께 없는 부정한 이들일 뿐이었습니다. 하물며 자신의 민족을 침탈한 로마의 백부장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자원해서 이곳에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한 이끄심에 결국 순종하고 따른 길입니다. 그러나 고넬료와 집에 있던 이들이 복음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을 보면서 만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었던 베드로는, 예전 삶이 깨어져버렸던 가련한 여인을 구원해주시려 부정한 사마리아 지나는 것을 꺼리지 않으셨던 예수님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억하자 오늘 자신을 이곳까지 이끄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더욱 선명해 집니다. 유대인인 자신들이 받아들일 없었던 이방인들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화평의 복음을 통해 구원해 내셨습니다.

     

    | 화평의 복음

    고넬료의 집에서 전했던 베드로의 설교 핵심은화평의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뜻하는케리그마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 베드로의 인생을 바꾸고, 이방인 조차도 하나님 백성으로 구원했던복음 무엇일까요 ?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것이 우리의 구원에 어떤 의미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분안에 대체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바울, 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삶과 죽음, 부활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의 모든 소망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처럼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이르기만을 갈망했습니다.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그들에게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보물을 발견했으니 재산을 팔아 그것을 사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 복음서를 읽으며 만나게 되는 그의 걸음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하고 경험하고 계십니까 ? 성경을 암송하고, 제자훈련을 받는 것이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있었던 , 예수께서 하셨던 일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오늘의 삶에 새기는 것이야 말로 복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경험입니다.

     

    주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 14:11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과, 그분 안에 있었던 일은 무엇일까요 ?

     

    | 차별과 소외를 거스르는, 복음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는화평의 복음 소개합니다. ‘복음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었던, 모든 인류에게 좋은 소식입니다. 화평의 복음은 그대로, ‘화평하게 하는 좋은 소식또는화평이 좋은 소식이다라고 새겨도 무방하겠지요. ‘화평이라는 한자어가 모두가 함께 차별없이 하나의 밥상을 나누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라고 설명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화평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의 핵심은 세상이 차별한 이들을 하나님은 모두 받아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과 함께라면 우리는 누구와도 하나가 있었고, 또한 그분과 함께라면 누구도차별함 받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누구에게나 좋은 소식, ‘복음 되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 역사가 인간의 평등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어느 시대, 어디에서도 우리는 참된 평등을 경험해 본적이 없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사회와 삶은 불평등합니다. ‘경쟁차별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니 그럴 밖에는 없습니다. 멸시를 받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을 뛰어난 사람이라 칭송을 받습니다. 오히려 평범을 실패라고 여기는 세상이지요. 신분으로, 출신이 어디인지, 학벌이 어떤지, 부유함이나, 능력, 명성의 정도, 하다못해 생겼는지 생겼는지도 사람 사이를 가르는 기준이 됩니다. 마치 어떤 이유를 찾아서라도 서로를 가르려는 것만 같습니다. 요즘은 아이들도 부모가 얼마나 버는지, 아파트에 사는지 빌라에 사는지로 친구 사이를 가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형편은 얼마나 발전한 사회인지, 어떤 국가 형태를 이루고 있는지와는 무관합니다. 어느 곳에서든 사람 모이는 곳에서는 크고 작은 차별과 구분이 생겨납니다. 성경은 이런 갈등으로 결국 사람과 사람사이,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갈라 놓는 것이야 말로마귀에게 속한 일이라고 단언합니다. 마귀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을 차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단절되고 고립된 끊임없이 불행한 존재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하지만 누구도 마귀의 권세로부터 벗어날 힘이 없으니, 차별이 문제임을 알면서도 자신도 불행하고, 타인도 불행하게 만들면서 그런 세상에 일조하며 살아가고 맙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화평하게 하시는 복음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누구이며 어디 출신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원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행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문은 열려 있습니다’ | 34 ~ 35 (메시지성경) 

     

    뿐만 아닙니다.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 10:38

     

    조금만 힘이 있고 능력이 생기면 어스름을 피우며 어떻게 해서든 타인 위에 서려는 우리네와 달리, 성령의 능력이 기름 붓듯 충만하신 예수께서는 곧장 마귀의 권세를 깨트리고 그에게 눌려있는 이들을소외로부터 구해내셨습니다. 예수의 화평의 복음과 만나면 누구든지 순간부터 쳐지고 기울졌던 삶이 채워지고, 하나님을 향한 꿈을 가질 있게 됩니다.

     

    | 불평등한? 복음의 소식

    그러나 우쭐 거리는 이들을 낮추시고, 그들이 깔보던 이들을 높이신 예수는 차별을 권세로 여기는 이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마신 예수를 보며 차별하는 이들과 차별당하는 이들 모두그것 보라고’, ‘그럴 알았다 말합니다. 한편에서는 조롱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체념과 절망이었을테지요. 예수께서 말씀하시던 그런 하나님의 나라는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결국 모두가 공범자가 되어 인간의 방식으로 주님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인간은인간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죽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은 죄입니다 !

    그러나 부활의 아침, 하나님은 하나님만의 방식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다시 살려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부활의 아침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와 우리가 꿈꾸던 세상이 끝났다고 말하는 모든 하나님의 가능성과의 차별과 소외를 가로막고 거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하시는 놀랍고 위대한 역사는 누구에게나 드러나는 사건이 결코 아닙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소식은 어떤 사람에게는 들리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결코 들리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이들에게 부활은 들려지고 보여지는 것일까요 ?

     

    요한에 따르면, (요한 20) 부활의 아침 막달라 마리아가, 마태에 따르면 여인들이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었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드러내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에 빌라도나 가야바 같은 시대에 가장 영향력있는 이들앞에 드러내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 자신이 옳았음을 밝히거나, 영향력을 행세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가장 효과적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요한은 마리아가 예수를 붙들려 했으나 예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마태는 예수를 붙잡았던 여인들을 향해, ‘두려워하지 마라시는 주님의 말씀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부분을 메시지 성경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있는 힘을 다해 나를 붙잡고 있구나! 그렇게 무서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하여라 거기서 내가 그들을 만나겠다고 전하여라’ | 28:9~10 (메시지)

     

    여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세상과 사회의 차별에 소외당하고 눈물 흘리던 이들이었습니다. 용납하시는 화평의 복음을 이들 만큼 간절히 소망하던 이들이 있었을까요 ? 세상을 자신의 구원으로 삼는 이들이 아닌, 세상에서 냉대받고 차별에 소외당하는 이런 사람들만이 주님을 힘껏 붙들 있으며,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드러내어 주십니다.

     

    | 간절한 이들을 부르는 음성

    ? 우리에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목소리가 들리지가 않을까요 ? 여전히 세상의 소리는 크게만 들리고, 예수께서 살아계신 증거가 어디있을지 자신없는 걸음만 걷게 될까요 ? ‘부활한 예수를 보았느냐? 질문에 쭈뼛거릴 밖에는 없는 걸까요 ?

    여기 사랑에 빠진 연인이 있다고 생각해 볼까요. 여인에게 그의 남자는 세상에서 제일인 사람일 뿐이고, 남자에게도 여인은 세상에 하나 뿐인 여인입니다. 그의 능력, 그녀의 미모, 부유함과 명성은 자랑꺼리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사랑의 이유가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하면 어느새 사람이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과 비교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관계는 깨어지고 것입니다.

     

    예수의부활 누군가에게 허무맹랑한 소리일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삶을 바꾸는 사건이 됩니다.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 10:43

     

    베드로는 고넬료를 향한 설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화평의 복음이신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부활하신 그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자라면 누구라도 사함 받습니다. 사람들은 사함 거북하게 생각합니다. 못한 것을 반성하고 자꾸만 회개하라는 채근이 불편한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이 말하는 사함 도덕이나 윤리적 강압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은 죽음의 그림자가 짓눌러 때마다 결국은 아무것도 없는 무능하고 불쌍한 인간 실존을 기만한 스스로를 구원해내라고 우리를 채근합니다. 그러다보니 자꾸만 주변 사람과 비교하고, 그들을 나보다 못하게 만들려고 차별하고 소외시킵니다. 나는 저들보다 낫다, 나는 안전하다는 위안을 받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서로에게서 소외되고 우리의 삶은 파괴되어갈 뿐입니다. 반면에 믿음으로만 얻는 사함은, 차별을 부추기는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효라는 것을 말합니다. 돈으로도, 명예로도 없습니다. 오직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만이 죽음앞에 소외되어 있는 우리 모두를 구원해 있습니다.

     

    간절히 봄을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길가에 하나도 결코 가벼이 보일리가 없습니다. 

    삶의 힘을 다해 주님만 붙들고 있던 마리아였기에, 썩은 내가 진동하고 죽음만 가득한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 아니, 실은 주님은 생명으로 나아오라 지금 순간에도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나 음성을 들을 있는 사람과 들을 없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믿음은 삶을 향한 간절함과 동의어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위로받을 없던 여인들은 처연한 간절함을 안고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간절함만으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없습니다. 부활은 주님이 죽어 있는 우리를 불러주실 때에만 경험할 있는 사건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시신이 사라져 무덤안을 들여다보며 황망해하던 마리아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자꾸만 마음을 설레이게 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음성이 아닌, 무덤 밖으로 나오라는 생명의 초대였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초대하고 계십니다.

    주님안에만 생명이 있음을 굳게 붙잡고 사는 이들을 향해, 부활의 주님은 찾아가시고, 불러 주시며, 그들로 하여금 부활을 목격하고 경험하고 누리며 사는, 믿음으로만 얻는 사함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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