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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29 사순절 다섯번째 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3. 28. 13:20
성서일과
1 독서 : 에스겔 37:1~14
2 독서 : 로마서 8:6~11
3 독서 : 요한복음 11:1~45
응 송 : 시편 130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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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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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라 ! 나사로 !'
1. 코로나 19, 일상
어려운 일을 겪고 나면 사람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지요. 원치 않았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낯설은 요즈음 시간은 우리의 손을 거칠게 이끌고 ‘나’와 ‘너’, 그리고 실은 ‘우리’가 어떤 존재였었는지를 직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위기의 때,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람다움을 확인하는 기쁨의 한켠에서, 대체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라는 깊은 탄식을 내뱉게 만드는 이들도 마주치게 됩니다. 이런 양상은 비단 한 공동체나 국가에만 해당하지 않음을 똑같이 반복되는 것 같은 뉴스를 통해 쉽게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리고 비틀거리는 우리들과는 달리, 완연히 겨울을 떨쳐낸 봄의 햇볕이 따사롭기만 하고, 지천에 피어오르는 개나리와 진달래가 어쩌면 오늘 우리 모두 집단적으로 나른 한 봄 기운에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착각마져 들게 합니다. 갑자기 서러운 마음이 올라온 것은, 세상 돌아가는 상황에 걸리고 넘어짐 없이 그렇게 무심히 제 할일 묵묵히 하는 그 자유로움이 부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내일은 좀 괜찮아지겠지 싶었는데, 반복되는 매일이 쌓이다 보니 어느새 제 마음 한켠에도 ‘내일도 똑같을 거라’는 막연한 두려움과 절망의 조각들이 자리를 잡았었는가 봅니다. 질병이 오래되거나 헤어나올 수 없는 삶이 지속될 때, 슬그머니 자리잡는 ‘나아질 것은 없다’는 좌절감은 제 아무리 듬직한 사람이라도 삼키울 수 있다는 말을 이제 우리는 모두 그렇게 실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한주간 어떻게 살아내셨습니까 ? 어찌할 수 없다는 절망과, ‘그래도 내일은…’ 이라는 기대감의 경계 어느편을 버텨오셨습니까 ?
2.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오늘 성서일과 요한의 복음서 11장의 장면 분위기는 오늘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감정의 분위기와 유사합니다. 두려움, 절망, 되돌릴 수 없는 죽음이 드리워진 갑갑함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친구라 불리우던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도착하셨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죽고 말았습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바쁜 걸음을 옮기지 않으셨다는 것과, 게으른 놈 밭고랑 메는 것처럼 느긋하기만 했던 예수의 의도?에 특별한 목적이 있음을 주목하고 있긴 하지만, 여하튼 이미 나사로가 죽은지 사흘이 지난 후에야 예수님은 그곳에 도착하셨습니다. 죽음이 임한 그곳은 여인들의 통곡과 무거운 절망만 가득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는 마르다의 외침(21)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녀의 말속에는 이미 ‘죽음’이 드리워졌으니 ‘모든 것이 끝나고 말았다!’ 라는 현실에 대한 절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녀 뿐만 아니라, 그 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 수 없으니 당연한 것입니다. 오누이들의 웃음이 들리고, 잔치가 벌어지기도 했던 그 집이 지금은 통곡으로 가득차 있었고, 나사로의 여동생들인 마르다와 마리아의 예수를 향해 그간 가지고 있던 특별한 믿음과 신뢰도 오라비에게 찾아온 죽음을 인정하고 체념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해줄 수 없었습니다.
‘죽음’, 이것은 아무리 터부시 하고 피하려고 하여도 결국은 누구나 부딪히고 마주쳐야만 하는 슬픈 인간의 운명이며, 죽음앞에서 옷벗기워짐을 피할 수 없는 무능이야 말로 오늘 우리가 직면하는 인간 실존이기도 합니다. 이 절대적인 힘과 사실앞에서 사람들은 무덤하게 체념하고 살던가, 아니면 애써 그런 일은 내게 없을 것처럼 망각하면서 사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렇게 힘들어하면서도 열심히 살고, 무엇인가를 이루고, 더 많이 가지려하는 본능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모두 죽음을 잊어버리거나,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입니다. 하지만 내일을 빼앗긴 두려움을 극복해보려는 이 안타까운 본능도 결국은 제 발앞에 놓여있는 운명을 막아설 수는 없습니다.
내가 '살아있다’고 하는 말은 한편으로는 ‘아직은 죽지 않았다’는 죽음을 외면하려는 자기 위안일 뿐, 누구도 안도의 한숨을 내쉴 만한 여유 같은 것은 없습니다. 누구나 죽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서슬퍼런 죽음의 권력앞에서 도망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인간 삶은 결국 ‘살아있다’말하지만 실상은 늘 죽음앞에 서 있을 뿐입니다.
성서일과 1독서에서 만나게 되는 선지자 에스겔이 경험한 마른 뼈의 사건은 여기에 더해 개인적 죽음이 아닌, 민족 공동체적인 수준의 죽음의 상황을 직면한 절망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천에 널려 있는 마른 뼈들은 실상은 유대민족의 현실의 모습입니다. 신흥 패권 국가들의 틈바구니에서 근근히 살아나기는 했으나, 그들의 현실은 마른뼈와 같이 소망없는 비참한 운명 공동체일 뿐이었습니다. 오늘 코로나 19로 인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세상의 모습속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환자를 수용할 능력도 인력도 없어 어떤 환자를 살리고, 어떤 환자는 죽음에 방치해야하는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참담한 일들 앞에서, 그리고 죽음이 가져다주는 두려움과 혼돈에 빠져드는 모습들을 보면서, 자꾸만 에스겔 선지자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던 널려 있던 마른 뼈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3. 그러나 그곳에도, 소망이
나사로의 집은 말 그대로 오늘 우리들의 삶, 우리네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으로 뒤덮인 이 초상집은 우리 시대의 죽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무차별적인 죽음의 폭력성에 짓눌려있는 나사로의 집에 마침내 예수님이 도착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지 나흘째를 맞는 시신이 사람들이 열어 놓은 무덤문을 지나 걸어나왔습니다. 빠져 나갔던 생명이 다시 돌아온 것,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 동안 주님께서 행하였던 이적들 모두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읽다보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에 대한 설명이 그닥 많지 않다는 것이 어색합니다. 그는 아무말도 없습니다. 그가 무엇을 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모두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예수님과의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 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요한의 시선은 나사로가 아닌, 예수님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똑같이 기도를 하고 똑같이 말을 한다고 해도, 예수 아닌 다른 누구도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요한은 죽음을 거슬러 사람이 살아나게 되었다는 사건보다는, 죽음이 덮여 생명이 빠져나간 몸을 다시금 일으켜 세운 예수에게 압도당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대체 예수안에 무엇이 있는 걸까요 ?
요한은 본문속에서 그것을 ‘영광’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요 1:14
게다가 오늘 본문속에서도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단어는 ‘영광’ 입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함이라’ (4)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20)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일어날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일이지요. 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숨이 멎은 사람을 살려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 하나님만이 하셨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을 목격할 때, 즉 영광이 이곳에 있다는 말은 곧 ‘하나님’께서 이곳에 계신다는 사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찬양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이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 라는 말임을 알고 계셨는지요 ? 여러분은 어디에서, 어떤 때에 하나님이 이곳에 계심을 경험하십니까 ? 저는 우리 모두의 삶에 내 눈이, 내 귀가, 내 입이 ‘하나님이 지금 이곳에 계십니다’라는 영광의 고백을 외치는 일이 넘쳐나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영광’이란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일이니, 우리의 인식 수준을 벗어나는 ‘신비’로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리 되는지,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신비라고 하는 말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것을 이해하거나 발견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과학자들은 세상은 다양한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삼차원, 사차원하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론적으로는 10차원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세상을 결코 인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점이나, 선 정도만 보게 될 뿐입니다. 10년전 우리는 10년후인 오늘의 우리를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 10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나인데 말입니다. 1분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이 문 밖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 시간 지구촌 반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것을 알아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제가 다 아는 것처럼 떠버리며 삽니다. 그것을 영향력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알면 알 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더 아는 사람이 더 말을 못하게 되는 겁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더 아는 사람이 져줄 수 밖에 없는 것처럼 …
우리가 아는 것은 아주 작습니다. 나 자신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우리입니다. 세상이 어찌 돌아갈지, 내일은 또 어떻게 우리 앞에 서게 될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죽음이 무서운 이유는 살아 있는 한은 그 다음, 그 너머를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죽음이란, ‘아무것도 모릅니다’라는 것이 모여있는 총체, 시쳇말로 끝판왕 정도가 아닐까요 ?
하나님의 영광을 제외시키면 직면하는 두려움은 제 아무리 작아보여도 ‘죽음’처럼 무거워지지만, 다가온 두려움을 예수와 함께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으로 비추어보면 죽은 자가 살아나는 ‘신비’를 경험하는 문이 됩니다. 그러므로 알 수 없다는 미지에 대한 막연함을 하나님 없는 ‘죽음’같은 두려움이 아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로 담아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 이룬 것처럼, 혹은 반대로 다 끝난 것처럼 사는 사람, 내일을 다 아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소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소망은 ‘미지의 세계’앞에 서는 사람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의 영광, 지금 이곳에
에스겔 선지자는 마른 뼈만 뒹굴던 현실속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앞에서 그는 현실 너머의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영광을 보았습니다. 마른 뼈가 들어 맞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이고 마침내 일어나 큰 군대가 되는 소망을 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런 ‘영광’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 죽음을 몰아내고, 다시 살아남을 보게 되는 그 신비를 오늘 우리 삶에서도 보고 싶습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 그것은 따져 묻거나, 연구하거나, 헤매어 다닌다고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영광’은 신비이므로, 그에 맞는 방법으로만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의 선언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롬 8:11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던 나사로였지만, 결국 그는 다시 죽었습니다. 죽음에서 온전히 벗어난 육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에 반하여 예수는 죽은 후 사흘만에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았다는 말은, 죽음의 지배에서 완전히 자유케 된 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하나님만이 하신 그 놀라운 사건이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영광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한 곳,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곳에는 ‘살아남’의 역사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를 살리셨던 그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 영이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을 귀담아 들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하나님 영광의 증거가 바로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는 ‘성령’입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 요 11:40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다는 마르다의 절망에 대한 앎을 깨트리시며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믿음’으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인지의 범위를 벗어나는 그러나 여기에, 깨어진 내 삶에, 절망하는 오늘에 하나님의 영광이시며, 예수의 영광이 되셨던 성령이 함께 하고 계심을 믿는 것이 그것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 롬 8:16
의 말씀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지금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우리 안에서 증언하고 계십니다. 믿음은 이 사실을 더불어 증언하는 우리 영의 증언입니다. 그런데 이런 증언하는 마음이 어떻게 일어날까요 ? 무턱대고 그래야지하면 저절로 되는 걸까요 ?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영이 이 사실을 증언할 수 있도록, 믿을 수 있도록 돕는 능력이되시는 이가 또한 성령입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인지할 수 없는 범위 밖에 계신, 그러나 지금 이곳에 계신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붙잡아 주십니다. 절망할 수 밖에 없는 무덤앞에서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믿음을 쓰도록 북돋우시는 이가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신다는 바울의 증언은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5. 나오라! 나사로!
요한은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이후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53)는 소식으로 다시 살아나는 기적 사건의 단락을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끈질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음습한 결말입니다. 다시 살려내고야 마는 하나님의 영광을 거부합니다. 여전히 ‘그리 할 수 없다 !’ 라며 우리의 발목을 절망의 나락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죽음’입니다. ‘너는 어쩔 수 없어’, ‘이미 죽은지 사흘이나 지났어’라며 죽음이 지배하는 절망앞에 무너지게 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어쩌면 밖에서 들리는 소리보다, 마음 한켠에서 울리는 소리가 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매일 자신의 무능함과 마주치고 있습니다. 나의 무능, 너의 무능, 우리의 무능함을 직면합니다. 모두 소망이 무장해제되고, 매일이 똑같고, 그런 내일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마는 우리를 구원해줄 능력은 우리 안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의 무능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영광’이 필요합니다.
‘나사로’의 이름 뜻이‘하나님이 도우셨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엘르에젤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죽음 앞에 서 있는 그를, 하나님만이 도우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마침내 예수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났습니다.
그러니 거친 죽음의 힘이 붙들고 있던 나사로를 불러내시던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나사로 ! 나오라 !
베로 수족을 동인채 그대로 무덤에서 나오고 있는 나사로의 모습에서 우리는 죽음 조차 거스를 수 없는 주님의 말씀의 능력,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나오라 ! 나사로 !
살아있으나 죽은 것처럼 고개를 떨구고 꿈을 몽땅 빼앗낀 채 주억거리며 살도록 하려는 저 어둠의 연대들을 향한 우렁찬 주님의 호통이 들리십니까 ?
나오라 ! 나사로 !
주님의 영광이 임하였는데, 어둠은 소리없이 사라졌는데 여전히 죽음에 짓눌린 듯 무덤에서 옴짝달짝 못하고 있는 우리 영혼을 깨우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으십시오.
주님께서 지금 죽음의 절망에 손과 발이 묶여 있는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분의 영광이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믿는 이라면 누구나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을 수 있습니다. 봄을 기다리는 이들은 봄의 움돋는 소리를 듣고, 비를 기다리는 농부는 대지를 적실 소나기 소리를 듣는 법입니다. 어둠의 속삭임에서 벗어나 주님께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그리고 이제, 저 너머 주님의 부르심을 들으셨다면 그 생명에 ‘아멘’하십시오. 그가 음습한 어둠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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